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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34화 (34/138)

34회

chapter1공기가 무겁다. 공기의 질량은 더 무거워질 턱이 없었다. 무거워진 건 분위기였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정원이와 함께 거실로 끌려나왔다.

거실에서 누나는 나보고 무릎을 꿇으라고 했다. 다시 한 번 엎어치기를 당하고 싶지는 않았는지라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면에 누나가 측면에 앉았다. 정원이는 누나 옆에 앉았다. 나만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머지는 소파에 앉아있으니 정말로 재판이라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누나는 정원이를 아이 대하듯 부드럽게 손을 잡고 데려갔다. 아차하는 순간에 정원이는 누나에게 붙들려있었다. 누나를 바라보자 누나는 정원이를 달래고 있었다. 정작 정원이는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그래, 강휘가 혹시 덮치거나 하진 않았고?”

“아, 아니에요. 전혀 그런 일은 없었어요!”

“강휘랑 안에서 뭐했어?”

“아니 그냥 이야기를 좀.”

“너는 닥치고 있어.”

“예.”

나는 입을 다물었다. 누나는 어디까지나 정원이에게 묻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 말이 아닌 정원이의 말을 먼저 들으려는 생각 같았다. 어차피 정원이가 말한다고 하여 없었던 사실이 생기진 않겠다 싶어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정원이는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뭣!”

정원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은 오해를 사기가 너무도 쉬운 몸짓이며 말이었다. 나는 움찔하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누나가 째려보고 있었기에 다시 엉거주춤 무릎을 꿇었다.

정원이의 심정도 이해는 갔다. 아마 방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용서했다는 것도, 다 큰 어른이 돼서 몸을 부둥켜가며 장난을 친 것도 어느 쪽도 밝히기에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히 쪽팔린 일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정원이는 몰랐겠지만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내겐 가족 내 인권이 걸린 필사적인 상황이었다.

“누나, 발언권을 줘.”

“닥쳐.”

누나는 싸늘하게 말했다. 누나는 평소엔 부드럽고 상냥한 대신 잘못을 했을 때 굉장히 엄했다. 게다가 폭력적이기도 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정원이에게 열심히 눈치를 보내자 정원이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정말로 내가 설명해야해? 어. 정말로 해야 해. 결국 정원이는 내 필사적인 눈빛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 진짜로 별 일 없었어요. 진짜 별 일 없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거에요.”

“근데 왜 이렇게 흐트러져 있었어?”

“그, 으. 좀 장난을 치느라…….”

정원이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누나는 그런 정원이를 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나를 째려봤다. 그런 눈빛을 받은 나보다 정원이가 더 위축되고 있었다. 아마 여자와의 접촉 자체가 거의 없던 녀석이라 그런 거겠지.

누나는 귀여운 것을 꽤나 좋아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옛날에 마피아 두목이 시가를 물고 뚱뚱한 고양이를 쓰다듬는 모습이 생각난 것은 누나에게도 정원이에게도 비밀이었다.

“얘 안 건드린 거 맞지?”

“진짜로 안 건드렸어.”

“지, 진짜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진짜에요.”

정원이가 누나의 손을 양손으로 간신히 밀어내면서 말했다. 누나는 정원이가 거부하자 조금 아쉽다는 듯이 손을 뗐다.

“알았어. 그럼 무릎 풀고 앉아서 얘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렴.”

누나의 목소리와 함께 분위기가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발언권이 생긴 것이 내가 정원이를 덮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돼서인지 정원이를 쓰다듬어서 마음에 안정을 찾은 지는 잘 모르겠으나 좋은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나는 정원이를 바라봤다. 모두 다 밝혀도 되냐는 의미였다. 정원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누나가 정원이를 쓰다듬기 전까진 밝혀도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러고 나서 사실 전 남자였습니다라고 밝히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소 각색이 필요했다. 물론 가족을 특히 누나를 속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에 나는 그냥 사실을 말하되 정원이가 남자였다는 사실만 빼놓고 말하기로 했다. 그러자면 가장 곤란한 점은 우리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었다. 뭐라고 한다. 일단은 있는 그대로 설명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그래. 얘는 내 오랜 친구야.”

“너 여자사람친구도 없었잖아.”

바로 누나가 그 점을 찌르고 들어왔다. 이 점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면 바로 들킬 것 같아 나는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하여간에 오랜 친구야.”

“서란아 일단 강휘 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보자.”

“네, 아빠.”

나는 감사의 의미로 아버지에게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하여간에 얘가 오랜 친구고 친한 친군데 지방에서 올라왔거든. 그래서 내가 좀 도와주고 그랬어. 집 구하는 거나, 다른 일이나 뭐 이런 거.

그러다 얘가 몸이 좀 안 좋아져서 퇴사를 했는데, 그랬더니 얘 부모님들이 얘보고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하더라고. 걱정이 되셨나봐. 근데 얘는 또 서울서 살고 싶다고 하니까, 내가 돕겠다고 하다가 일이 좀 꼬였어.”

“꼬이다니?”

“그, 에휴. 얘네 부모님들한테 얘 돌봐주겠다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어.”

아버지와 어머니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결국 먼저 정원이를 가리키며 입을 여셨다.

“얘 혹시 우리 며늘아가니?”

“아아아니요!”

정원이가 펄쩍 뛰며 곧바로 답했다. 나는 답하기가 곤란해 고개를 돌리고 뒷목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누나는 그런 나와 정원이를 보더니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더 자세하게 말해보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정원이를 혼자 두는 게 걱정되시면 제가 신경 좀 쓰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지키겠습니다, 그랬더니 니가 뭔데 얘를 지키냐 그러시잖아. 그래서 어쩌다보니 남자친구 행세를 좀 했어.”

그러고 어머니를 바라보니 어머니가 아버지의 팔을 톡톡치며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저 내용이 무척이나 궁금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게 되면 굉장히 위장이 쓰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책임지겠다는 말은 거기서 나온 거고?”

“어, 뭐 어쩌다보니.”

“어쩌다보니가 뭐니…….”

누나가 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나는 그 시선이 아파서라도 말을 황급하게 이었다.

“하여간에 그러고 나서 아버님이 직업은 있냐고 하시길래 없다고 했지. 그러니까 본인께서 나를 뭘 믿고 믿어야겠냐고 하더라고.”

아버님이래! 라고 어머니가 오두방정을 떠셨다. 감히 부모님께 이런 말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 오두방정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그제서야 단어 선택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말을 이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얘랑 동반입사하면 인정해주시겠냐고 했더니 정말로 해낸다면 인정해주시겠다고 하시더라고.”

“동반입사?”

외치기는 누나가 외쳤으나 아버지고 누나고 나를 굉장히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사회의 기본도 모르는 초짜를 바라보는, 마치 생전 처음 물에 빠진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안쓰러운 감정이 서린 눈빛이었다. 누나야 그렇다고 쳐도 아버지께 저런 눈빛을 받는 것은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동반입사를 하기로 했는데…….”

“했는데? 어, 너 설마…….”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새를 기다리지 못하고 누나가 재촉하다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의 생각이 맞았다. 나는 그러고 잠수를 탄 거였다. 정말로 떼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서 간신히 말을 전했다.

“얘랑 좀 심하게 싸우고 내가 잠수 탔어. 그게 책임지기로 해놓고 잠수 탔다고 한 거야.”

“이 개새끼! 아, 엄마 아빠가 개라는 게 아니라.”

누나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가 다시 어머니랑 아버지를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부모님 앞에서 남매끼리 패드립을 치는 걸 보니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누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정원이에게 물었다.

“강휘가 한 말이 모두 맞니?”

“네.”

아버지는 정원이의 말까지 모두 듣고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치다가 멈추고는 내게 물었다. 생각의 정리가 끝나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셈이냐? 기한은 언제까지고?”

“그, 게. 오늘까지에요.”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셨다. 그리고 내 앞으로 와서 내 뺨을 세게 후려치셨다.

어머니도 누나도 정원이도 모두 놀래서 새된 소리를 냈다. 나 역시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아버지가 직접적으로 이렇게 손찌검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

“남자가 책임도 못 질 말을 쉽게 하는 거 아니다.”

“……네.”

“사후처리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얘 부모님 뵙고 고개를 숙여서 사과할 생각입니다.”

아버지는 눈을 잠시 감고 다시 팔을 손가락으로 툭툭치셨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뜨시고는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말씀하셨다.

“회사에 들어와라.”

“예?”

“우리 회사에 들어오라고. 둘 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아버지는 공동투자자의 위치였다. 큰 회사는 아니었으나 아버지는 이른바 부사장이라고 불리는 위치에 있었으며 나 역시 그것을 이용하면 쉽게 취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나의 자존심의 문제였다. 내가 싫은 표정을 짓자 아버지는 엄한 얼굴로 나를 다그치셨다.

“네가 지금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냐? 네가 이 친구에 대해서 매기는 가치도 알 법하구나.”

“아닙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답하고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나를 시험하고 계셨다. 아버지를 등에 업고 직장을 들어갈 것이냐, 혹은 내 책임을 무시하고 정원이를 돌려보낼 것이냐.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꼴사나운 건 같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그 어떤 결과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문득 정원이가 신경 쓰여 정원이를 바라봤다. 정원이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들으며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좀 웃긴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내 집안 사정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해준 적이 없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가 말을 나눌 때 마다 흠칫거리는 모습을 보니 왠지 지금 해야 하는 선택이 정말로 별 것 아닌 거처럼 느껴졌다. 다짐이 섰다. 나는 아버지를 다시 마주보고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제가 한 말을 주워 담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니, 책임 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오냐.”

아버지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시고 다시 일어나셔서 소파에 앉으셨다. 정원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퍽이나 웃겨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니가 도움이 되는 날도 오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곤란한 얼굴로 물어보셨다.

“그래서 너희들 결심은 언제할거냐?”

“예?”

“아니, 결혼은 언제 마음 먹을 거냐고.”

“그런 사이 아닙니다. 남자 친구인 척만 한 겁니다.”

“그런 사이도 아닌데 네가 책임진다는 소리가 왜 나와?”

그러자 누나가 아버지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핀잔을 줬다. 형언할 수 없는 가벼운 몸짓이었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무겁게 불안감을 지피는 몸짓이었다.

“아니 아빠. 쟤네 척 봐도 이제 썸타고 있는 거잖아. 오랜 세월동안 친구인 줄 알았는데 이제 점점 묘한 감정이 생기는 거. 눈치 없게 끼어들고 그러지마.”

“그러냐? 요즘 애들 생각은 잘 모르겠네.”

“그러게 말이에요.”

어머니가 맞장구치는 모습까지 보자 정신이 아득해진다. 정원이를 바라봤더니 정원이도 완전히 굳어서는 정신이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고개를 까딱거리자 정원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뜻이 이러한데 정원이의 뜻도 이러한 모양이었다. 일단 이 곤란한 자리를 뜨자는 마음이 이어졌다.

“잠시 얘랑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래라. 너희들끼리도 할 말이 더 있겠지.”

“아 콘돔 가져갈래?”

“아, 필요 없다고!”

나는 주책없는 누나에게 소리 지르고 집을 나왔다. 정원이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니 내 얼굴도 어떤지 썩 알법했다.

[작품후기]무거운 글을 쓰다가 가벼운 글을 쓰니 확실히 만족도는 떨어지고 쓰긴 쉽게 써지고 그런 기분이 듭니다. 원래 끄적거리던건 이런 분위기에 더 가까운 것들이 많았는데 말이죠.

십이사자님 후원 항상 감사드립니다 :)

부족한 작품 항상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달아주시는 독자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코멘트는 매일매일 아침마다 확인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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