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회
chapter1겨우 정신을 차리고 안정을 찾는다. 아니 찾으려고 노력한다. 잠에서 깨자마자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에 분위기에 쓸려가고 있었다. 사실 이런 걸 기대했기 때문에 흐름을 막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마냥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원이도 숨기고 있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파헤치기 위해선 다시 어른이 될 시간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됐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정원이에게 일부러 과할정도로 딱딱한 어투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갑자기 정색 빨고 그래.”
정원이는 씨익 웃으며 가볍게 답했다. 내 무거움과 대비되기 위한 발버둥으로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정원이 역시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어색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웃음을 입꼬리에 간신히 건 내게는 너무 익숙하고 네겐 너무 익숙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평소의 내가 잘 모르는 이들에게 향하던 표정이었다.
“딴 소리하지 말고.”
“……너희 누나가 데리고 들어와 줬어.”
나는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10분. 누나가 퇴근하면서 여자애가 현관에 혼자 앉아있는 모습이 처량하여 데려온 모양이었다. 두통이 지릿하게 찾아와 관자놀이를 눌렀다. 누나가 퇴근하는 시간은 아무리 빨라도 9시 이후였다.
“위험하게 거기 혼자 서있으면 어떻게 해?”
“미안해.”
정원이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답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주제에 대해 운을 떼며 많은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준비하던 다음 말들을 모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난 당연히 정원이가 뭐가 위험하냐며 화를 낼 줄 알았다. 적어도 불편하다는 눈치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원이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순순히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내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내 걱정에 대해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정원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원이는 내가 바라보자 얼굴에 홍조를 띄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자신이 내 걱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과한 것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이번엔 정원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하지만, 너.”
“왜 저번에?”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이는 고개를 다시 돌려 나를 바라봤다. 진지한 눈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원이는 그 눈으로 나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부딪혀왔다.
“저번에도 그래. 미안해. 니가 걱정하는데 짜증만 내서 미안해.”
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뭐라도 좋으니 말하고 싶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 할 말을 모두 하기에 내 입은 너무도 작은 통로였다. 작은 통로를 서로 비집고 나가려하여 오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정체된 말들을 정리하고 각각의 순서를 매겨 그들을 차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니가 먼저 미안하다고 하면 내가 뭐가 되냐?”
“응, 그것도 미안해.”
싸우던 상대가 독기를 풀고 헤실헤실 웃고 있으니 나 역시 화낼 수가 없었다. 허탈한 기분이었다. 내가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의미를 바래고 있었다. 그 자리를 또 다른 의미가 빛을 발하며 채우고 있었다.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었다. 박수소리는 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다투기 위한 마주침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려다가 말았다. 지금은 정원이의 감정에, 정원이도 용기를 내서 마주해온 감정에 답할 때였다. 나는 정원이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정원이의 눈동자 안에서도 걱정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 손을 잡고 함께 떨고 있었다. 거울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해.”
“응, 고마워.”
정원이는 웃었다. 나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바보들처럼, 머저리처럼 실실 웃고만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마음에 엉켜있던 응어리가 단숨에 풀어졌다. 고민하던 것들이 모두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쉬운 거였는데.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이번엔 정원이가 먼저 다가왔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기 위해선 누구라도 좋으니 한발자국만 다가가면 되는 거였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정원이가 용기를 냈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그 사실이 너무 고마워서 정원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도저히 얼굴을 마주하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고마워.”
나는 부끄럼이 흘러나와서, 그러나 그 부끄러운 감정에 묻히지 않게 고마운 마음을 한껏 담아 조용히 읊조렸다. 내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정원이는 흠칫하고 몸을 떨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나 역시 정원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정원이에게선 화사한 프레지아 향기가 나고 있었다.
***
부끄러움을 이기고 작은 어깨에서 머리를 떼자 정원이는 온 몸이 새빨개져있었다. 나 역시 저런 얼굴일거라고 생각하니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마음끼리 마주한다는 것은 이렇게도 부끄러운 행위였다. 그래도 내가 너보다는 조금 덜 부끄러웠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온 몸이 빨개진 네 모습을 보며 일부러 웃음을 흘렸다.
“큭.”
“야. 너도 똑같거든?”
“뭐가.”
“너도 얼굴 새빨개져있다고!”
나는 황급히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는 내 부끄러움을 어떻게든 숨기려고 정원이를 마구 놀려댔다.
“온 몸이 새빨개진 꼬라지하고는. 개 쪽팔리지? 에붸붸베”
“아니! 아, 진짜 이 븅신 진짜. 너도 개 쪽팔리면서, 아!”
“난 하나도 안 쪽팔리거든요~.”
“그 얼굴 가린 손부터 치우고 말하시지!”
정원이는 내 손을 치우려고 하고 나는 그 손을 피하고 버텨가며 와와거리며 놀았다. 그러다가 서로 지쳐서 거친 숨을 담뿍 쉬어댔다. 그러자 얼굴이 벌개진 것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됐다. 어차피 몸을 움직이면 얼굴이 빨개지는 거야 당연한 거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쪽팔림을 정당화시켰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아니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너 오늘 대구로 내려가는 날 아니었냐?”
“아, 그거.”
“사실 그거 전혀 해결 안 됐지롱.”
“뭐?”
정원이는 내 눈을 피하려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고 일부러 과장하듯이 혀를 빼꼼 내밀며 연기톤으로 말했다.
“아빠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휴가를 못 내서 오늘 못 올라온 거지, 이번 주 주말에 올라오신다고 했어.”
“……그럼 취직 못한 것도 알고 계셔?”
“아니? 했다고 구라쳤지롱. 너 얼굴 좀 보자셔.”
이런 미친년이?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과 정원이의 어깨를 잡고 탈탈 털었다.
“어쩌려고 구라쳤어? 니가 애야?”
“아아아아니이이이이시이이이바아아아알”
정원이는 내 팔을 간신히 떨쳐내고 그 잠깐 흔들어댄 것이 어지러운지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그럼 얌전히 내려가?”
“구라치면 안 내려가냐?”
정원이가 눈을 치켜뜨고 나를 째려봤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참은 걸 한 번에 돌려준다는 듯이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시끄럽게 소리쳤다.
“니가 책임지기로 했잖아! 그래놓고 잠수 탄 게 누군데!”
“채, 책임?”
“니가 우리 엄마 아빠 앞에서 나 지켜준다고 했잖아!”
“그래도 책임진다고 한 적은 없어!”
그 때가 한참도 전이었던 것 같지만 내게 있어 충분히 고민을 시켰던 사건이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책임은 무슨 책임. 물론 내가 정원이를 지켜준다고 하고 지지대가 된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직접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아니 그리고 책임은 무슨 책임이야. 뭘 위한 책임이야 대체.
“그 때 그렇게 엄마, 아빠한테도 말해놓고, 나 팔아서 약속해놓고!”
“그건 니가 내려가기 싫다고 해서 그런 거지!”
“분위기 타서 한 건 너잖아!”
“그럼 니가 말렸어야지!”
“내 탓이라고, 그럼?”
“어…….”
할 말이 궁해졌다. 원인은 어디까지나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정원이에게 있었으나, 결국 방법을 정하고 그런 주제에 잠수를 탄 건 내가 맞았다. 내 여러 종류의 이성이 판단하기를 잘못의 비율로 따지자면 1:9정도라고 판결을 내렸다. 당연히 내가 9할이었다. 그렇기에 정원이의 눈을 피했다. 그랬더니 정원이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아까 내가 제 어깨를 잡고 흔든 것을 복수하겠다는 듯이 내 멱살을 잡고 탈탈 털어댔다.
“나아쁜놈아! 나보고 울 엄마, 아빠 얼굴은 어떻게 보라고!”
“으어어어.”
“이씨, 잘난 척 하던 얼굴이 자꾸 생각나잖아! 한 대만 치면 안 되냐?”
“아니, 아니.”
나는 정원이를 억지로 떼어내고 다시 달라붙으려는 정원이의 이마를 짚었다. 정원이는 버둥거렸지만 그래도 힘으로 날 이길 순 없었다. 나 역시 필사적이었다. 그러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한탄했다. 한 달도 짧은 기간이었는데 해봐야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동안 취직이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진짜로 어떻게 하지.”
“아, 제발. 부탁이야. 강휘야, 뭐든 좋으니까 좀 해봐.”
정원이가 징징거렸다. 나 역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했고 반성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머리를 짜내서 방법을 생각해봤다. 그러자 산출되는 결과는 단 한가지였다.
“응. 깔끔하게 내려가라, 정원아.”
“개새끼야아!”
정원이가 울고불고 내 멱살을 털어댄다. 아, 미안하구만, 어쩌겠냐. 포기하고 돌아가라 정원아. 나도 없는 방법을 만들어낼 수야 없는 거 아니겠냐. 정원이는 내 멱살을 털며 소리쳤다.
“니가 걱정 말라매!”
“엄마, 아빠한테 나 지켜준다고 해놓고!”
“어떻게든 된다고 했잖아!”
“으하아앙! 나쁜 놈아!”
정원이의 화가 풀릴 때까지 이렇게 좀 짤짤이나 당해주자라고 생각하던 차에 내 방문이 열렸다. 그 순간 정원이도 나도 움직임이 멎은 채로 방문을 바라봤다. 그곳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가 서있었다. 방문을 연 것은 누나였다. 누나는 굳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내 침대 앞까지 걸어왔다. 나는 누나가 대체 왜 저런 표정을 짓는가 생각했다가 현재 우리가 무슨 모습인지를 떠올려냈다.
정원이가 내 무릎 위를 올라탄 채로 내 목을 조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서로 장난치느라 적당히 땀도 흘리고 있었고, 정원이를 보니 과격하게 움직인 주제에 옷도 익숙하지 않았는지 치마 끝이 말려 올라가 있는데다 어깨 역시 조금 흘러내리려는 차였다. 살짝 산발이 된 머리는 덤이었다. 무엇보다도 정원이가 울먹거리며 눈물이 맺혀있었다.
나는 정원이를 들어 내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정말로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랬다간 더욱 상황이 꼬일 것 같아 누나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최대한 이지적이고 이성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누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설명할 수 있어. 잘 들어봐.”
누나는 내 말을 듣고 얼굴을 풀었다. 평소의 누나였다. 그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되어 이어서 상황을 설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내 의도와는 달리 누나의 입이 먼저 열렸다.
“강휘야, 너 저번에 준 콘돔은 썼니?”
“아니 이 미친년아! 그걸 지금 왜 쓰는”
뎃?
빙글하고 하늘이 돈다. 천장이 보였다가 다시 바닥이 보이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바닥에 엎어뜨려져있었다.
“억!”
어느새 누나가 내 팔을 잡고 나를 엎어치기한 모양이었다. 숨이 안 쉬어져 괴로워서 켁켁거리고 있자니 정원이가 어느새 내 등을 쳐주고 있었다. 덕분에 겨우 숨이 쉬어지기 시작한다.
“이 미친 새끼, 엄마랑 누나가 좆 간수 잘하라고 분명히 말했지.”
아니 그런 거 아니라고. 나는 숨을 몰아쉬느라 대답을 하지 못하며 억울함을 이산화탄소에 담아 배출할 뿐이었다. 누나가 싸늘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책임지기로 해놓고 잠수탔다는 말. 얘 부모님 봤다는 말. 그리고 부모님들한테 얘 지키겠다고 한 말. 어떻게든 된다고 말한 말. 그래놓고 얘보고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버린 거. 다 해명해야 할 거야.”
하필이면 문 너머에서 이상한 부분부터 들었구나. 그리고 오해할만한 말만 하고 있었구나. 나는 차라리 평생 이렇게 켁켁거리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이기기 힘든 유혹이었다.[작품후기]저번화에 시간 설명이나 이런 걸 보면서 좀 수정을 했긴 했습니다만, 시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건 강휘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표현하고자 였습니다.
추가로 31화 같은 경우 강휘의 상상은 모두 현재형 어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다,이다 등등... 뭐 이렇게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작가의 역량부족이지요.
각설하고 오늘은 좀 라노벨같네요. 써놓고도 맘에 들기도 하고 맘에 안들기도 하고 복잡합니다. 라이트가 대체 뭐냐.
청명한마음님 후원 감사드립니다. 야스...는...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잊혀질때쯤 나오지 싶습니다... 근시일내엔 포기하십시오. 노블딱지 안달려 있습니다 ㅠ 그리고 아직 서로가 남녀로써 인식도 안 된 상태입니다. 감정이 더 무르익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항상 부족한 작품 재미있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날려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덕에 매일 연참하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