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회
chapter1저녁이 되기 전에 나와 정원이는 집을 나섰다. 준비를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나야 어차피 준비를 하고 나온 셈이었고, 정원이는 화장을 하지 않고 대충 편한 옷을 입고 나왔다. 평소 입는 흰 티에 스키니진이었다. 평소에 입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시감이 드는 복장이었다. 저번 데이트 때의 복장이었다. 두통이 일 것 같아서 정원이에게 물었다.
“저번에 성규가 그러고 나왔다고 꼽주지 않았나?”
“뭐 어쩌라고. 알 바야?”
정원이가 사납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표정을 보자 내 안에선 불안이라는 감정의 불씨가 움트고 있었다.
“내가 걔를 이해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걔가 너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거지, 내가 걔한테 맞춰주겠다는 소리는 아니잖아.”
나는 그 말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 척 하더니 이미 정원이의 기분은 상해있었던 것이다. 둘이 싸우지 않기를 바랐던 내 작은 소망이 부셔지는 순간이었다. 벌써부터 얼굴 맞대자마자 둘이서 으르렁거리는 광경이 그려졌다. 아마 오늘은 위액이 넘쳐서 위장이 녹아내릴 지도 모르겠다.
왕십리에 도착하고 나니 성규가 보였다. 핸드폰을 켜보니 18:58분, 이쪽이 지각한 것은 아니었다. 성규가 조금 일찍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성규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성규가 곧 우리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하이.”
“엉, 하이.”
“안녕하세요.”
정원이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정원이 성격에 저번에 말을 까자고 했다고 한들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성규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 내비치던 짜증과 분노가 교묘하게 몸을 낮추고 숨어있었다.
반면 성규는 저번과는 달리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능숙하게 정원이를 대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이 재전을 준비 중인 전쟁터를 보는 것 같았다. 이번만큼은 이런 불안한 예감이 맞지 않기를 바랐다.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그래.”
오늘은 셋 다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뭘 먹을까 하다가 성규가 저번에 차려입고 있느라 먹지 못했던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셋 다 좋아하는 메뉴기도 했고, 술 한 잔을 걸치며 할 만한 얘기이기도 했다. 어디가 맛있고 맛없고 고르기도 귀찮아 눈에 익은 아저씨가 붙어있는 프렌차이즈 고기집에 들어갔다.
“일단 삼겹살 3인분이랑 진로 두 병 주세요. 테라는 일단 한 병 주시고.”
“네~ 알겠습니다~.”
점원이 주문을 받고 바로 술부터 가져다줬다. 나는 정원이를 바라보며 소주를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그런데 정원이는 흔들거리는 소주마냥 고개를 저었다.
“연짱 마시긴 좀 힘들어.”
“천하의 다정원이 이런 약한 소릴 하다니…….”
정원이는 내 말을 듣자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빼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을 살살 긁어 정원이가 술을 마시게 해서 오늘의 싸움의 도화선을 잘라버리려는 의도가 들어간 행위였다. 그러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아~, 거. 안 마신다고, 시발.”
“으잉?”
내 안에서 진심이 섞인 의문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나는 정원이의 반응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정원이라면 이런 상황에 술잔을 빼는 친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어디에나 있을 법한 진돗개가 야옹야옹 거리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얼이 빠져있자 성규가 내 어깨를 툭툭치며 말했다.
“야 강휘야, 여성분한테 억지로 술 강요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라, 어.”
“그래 강휘야. 너 임마 그러는 거 아니야.”
어느새 졸지에 나만 나쁜 놈이 되어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진로를 까서 두 잔만 채웠다. 정원이는 물 컵에 물을 따르고 있었다. 시작부터 일이 배배꼬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점원을 불렀다.
“네!”
“혹시 제로콜라 있나요?”
“아뇨, 그냥 콜라는 있는데.”
냉장고를 얼핏 보자 그래도 코카콜라였다. 정원이는 절대로 펩시는 마시지 않았다. 그건 나도 그랬다.
“그럼 콜라 한 캔 주세요.”
“네~.”
점원이 콜라를 가져다주자 난 그걸 정원이에게 넘겨줬다. 정원이는 콜라를 잔에 따랐다. 정원이는 방금 전에 나를 물고 뜯을 땐 언제고 어느새 성규를 어색해하고 있었다. 성규는 그걸 눈치 빠르게 캐치했는지 정원이에게 살갑게 대화를 걸었다. 나를 까는 방향으로 흐르는 방향만 아니었으면 박수를 치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강휘가 안 그런 친군데 정원씨한텐 술을 먹이나 봐요?”
“같이 먹고 뻗었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서…….”
“강휘가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면이 있었군요.”
하긴 친해지기 가장 좋은 방법은 공통된 관심사를 언급하는 것이었다. 같이 깔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더욱 좋았다. 짜증나는 선임을 까는 건 군대에서 가장 빨리 동기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 역시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정원이를 나름대로 챙겨주는 성규에게 고맙기도 했다. 내가 아는 성규는 이랬다. 그런데 이렇게 잘 하는 걸 왜 그 때는 하지 않았던 걸까. 의구심이 뭉게구름처럼 마음속에서 지펴지고 있었다. 나는 정원이가 콜라를 잔에 따르자 잔을 들었다.
“건배!”
“건배.” “건배.”
나는 진로를 원 샷 하며 답답함을 털어 넘겼다. 정원이와 성규는 계속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를 까느라 신나 있었다. 어느새 나는 호두까기인형 둘에게 둘러 쌓여 열심히 껍질을 까이고 있었다.
“강휘가 저번에만 해도 말이에요,”
“으아, 그건 강휘 잘못이 크네요.
거의 모든 대화가 이런 꼴이었다. 정원이가 불평하고 성규가 받아주는 구도였다. 가끔 성규가 내 험담을 하고 정원이가 동의하기도 했다. 나는 애꿎은 술이나 계속 비우다가 술병이 반 정도 비자 자리를 잠시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 등에 탄 상황에 정신이라도 차리고 있어야 했다.
어차피 정원이도 성규를 점점 편하게 대하고 있는 참이었다. 이 병신이 말이야, 아 이 병신이 말이야. 하긴 이게 차라리 서로 으르렁 거리는 것 보다야 훨씬 나았다. 다만 들어주기가 난처한 것은 마찬가지라 나는 일어서서 잠시 자리를 떴다.
“어디가?”
“잠깐 화장실.”
“저 자식, 도망가네.”
그리고는 둘이서 실실 쪼개고 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화장실을 갔다. 할 일이 마땅찮아 핸드폰이나 뒤적거리고 있다가 손을 씻었다. 그런 와중에 한 쪽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럴 때만큼은 흡연자들이 부러웠다. 딱히 할 것도 없는데 자리를 피하고 싶을 때는 담배만한 핑계가 없었다. 물론 집안에서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한 번도 펴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술 여자 담배 중 하나도 가까이 하지 않는 남자는 피하라는 말이 있었는데, 난 나머지 둘을 목석같이 대하는 대신 술에 쩔어 사는 격이었다. 다정원은 술에 담배까지 하는 녀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몸이 바뀌고 나서 담배를 피웠던가? 맨날 금연 금연 노래를 부르긴 했었으니 몸에서 니코틴이 빈 김에 끊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긴 옛날부터 내 앞에선 딱히 담배를 피우지 않긴 했었다. 내가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욱 친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담배도 피우지 않게 된 정원이가 술까지 마다 한다라.
테이블에 돌아오니 어느새 정원이와 성규는 말을 까고 편하게 떠들고 있었다. 아직도 내용은 나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름대로 오래 자리를 비우고 있었는데도 여전히 나를 까고 있는 것을 보니 사실 내가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놈이 아니었는가하는 생각까지 든다.
“강휘야 고기 왔는데 니가 구울 거지?”
“손은 씻었냐? 이 고기 다 니 거야. 니가 구울 거.”
나는 한숨을 내쉬고 집게를 잡았다. 고기가 왔으면 미리 구워놓을 것이지. 내가 째려보자 둘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내게 따지고 들었다.
“너 내가 고기 잡으면 화내잖아.”
“맞아, 너 맨날 고기 조금만 태워도 화내잖아.”
“아니, 에휴, 시발.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치이익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린다. 이 자리에 앉아서 들었던 것 중 유일하게 기분 좋은 소리였다. 정원이와 성규는 어느새 10년 지기 마냥 편하게 떠들고 있었다. 나에 대한 얘기가 그렇게 할 게 많았나, 나보다 나에 대한 얘기를 더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끼어 들어봐야 집중포화의 대상이나 더 될까 싶어 그냥 고기 굽는 데나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정원씨는 강휘랑 언제부터 친해지셨나요?”
“어, 몇 년 됐지? 아무튼 간에 한 10년은 넘었죠.”
“아~. 학창 시절부터 친구였네요? 강휘한테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는데.”
“아, 강휘가 제 얘기 다른 사람들한텐 안한 모양이죠?”
정원이가 묻자 성규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는 여자 손도 잡아본 적 없는 녀석이라고 하고 다니던데요.”
“아, 저도 알아요. 히키코모리에 아싸라고 자칭하잖아요.”
“아니, 야. 에휴.”
나와 정원이는 서로를 그렇게 부르고는 했다. 이건 정말로 억울한 게 틀린 말은 하나 없었다. 정원이가 여자가 되기 전까지 난 여자 손도 한 번 잡아본 적 없었고, 타인과 대화를 하기 불편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가 선택하여 내향적인 삶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인과 대화를 하기 힘들어서 저런 식으로 된 정원이만큼은 아니었으나, 나 역시 나름대로 히키아싸아다인생을 살고 있었던 셈이었다.
“하긴 정원이 너 같은 애가 있으면 숨기고 싶긴 하겠지. 아 말 까도 되지?”
“어, 어.”
정원이는 성규가 갑자기 대화의 거리감을 좁히자 당황한 듯 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더니 겨우 말 깐 거로 얼어버리는 것을 보니 정말이지 다정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부터 성규가 말을 깠었는데, 정원이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원이는 성규와의 좁혀진 거리감에 집중하기보다 성규가 방금 말한 의미를 곱씹으며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게 뭔 소리야?”
“뭔 소리일까?”
성규가 웃으며 되물었다. 성규의 얼굴엔 어느새 저번의 그 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한숨이 나온다. 아무리 나라도 저렇게까지 말하면 저 표정의 의미를 알 수밖에 없었다. 그래, 성규는 나와 정원이의 오작교가 되어 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눈치 채자 지금까지 의뭉스럽던 성규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됐다. 나는 이해가 됐다. 문제는 저번처럼 도화선에 동일한 형태로 불이 붙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정원이의 대응은 의외로 침착하고 어른스러웠다.
“에이, 강휘랑은 그런 사이 아니야.”
“그래?”
“그래. 강휘가 날 좀 챙겨줄 뿐이지. 그런 거 아니야.”
오늘 내 예상이 자꾸 빗나가고 있었는데, 이번엔 다행히도 기분 좋은 엇나감이었다. 나는 속으로 굉장히 안심하고 있었다. 정원아 사람이 됐구나, 아니 어른이 됐구나. 하지만 성규는 포기하지 않고 납득하는 척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강휘가 챙겨준다면 뭐 어떤 걸 챙겨주고 그래?”
“뭐, 여러 가지 있긴 한데, 일단 세심하게 신경을 많이 써주긴 하지.”
성규의 묘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부끄러움과 짜증이 아우성치며 제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정원이를 챙겨주는 것은 물론 옛날부터 그랬었던 일이었다. 대표적으로 정원이가 신입 때 개 헛짓거리 해놓은 걸 회사사람도 아닌 내가 같이 가서 도와줬던 일이었다. 사회초년생이 겪는 경험부족과 모자란 의사소통능력이 절망적인 시너지를 내서,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성규가 듣기엔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곤란해 하면 병원도 같이 가주고, 속옷도 같이 사주고…….”
“야 다정원!”
나는 내가 되레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술 한 잔도 안 마신 애가 대체 무슨 소리까지 하려는 거야? 그러자 정원이는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듯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를 째려봤다. 왜 째려보는지 모르겠다. 정원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성규는 나를 음흉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마치 봐줬다는 듯이 술을 들이켰다.
“그 정도면 역시 거의 사귀는 거 아닌가?”
“아니야. 강휘랑은 절대 그런 거 아니야.”
정원이가 손 사레 치며 웃었다. 퍽이나 여상한 태도였다. 아니, 평소보단 조금 더 여성스러운 태도였다. 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정원이 이 녀석은 평소에 그렇게 여자 취급을 하는 것을 싫어하더니 나를 깔 때만큼은 자신이 여자라는 시점에서 모호하게 사건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녀석이 과거에 남자였다고 먼저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나만 답답해질 뿐이었다. 나는 성규에게 술잔을 넘기고 술잔을 들었다.
“그래. 얘랑은 그런 거 아니야. 아~, 너 그래서 전번에 그런 말 했던 거야?”
“어. 강휘가 ‘그런 식으로’ 챙겨주는 여자애는 처음 이었으니까.”
“뭔 소리야? 그거 자세히 좀 말해봐.”
“야.”
나는 둘에게 경고하듯이 목소리를 깔았지만 둘은 뭐 어쩌라는 듯이 약속이나 한 듯 나를 무시하고 서로 떠들기 시작했다. 성규는 정원이에게 나를 어필하기 위해, 정원이는 나를 놀리기 위해, 서로의 입장이 맞아떨어졌다.
“강휘가 여자애들한테 매너 좋은 거야, 동기들도 다 알고 있었지만. 여자 애들 전부다 얘 아빠라 그랬거든.”
“아빠라니?”
“오는 여자 가는 여자 모르는 여자 아는 여자 전부 적당히 거리 두고 다 잘해준다고. 여자가 아니라 딸내미가 된 기분이라고 그러더라.”
“아니 시발, 그건 그런 게 아니고.”
“야, 한강휘, 닥쳐봐. 무시 까고 계속 말해봐.”
그건 내가 여성을 대하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정원이는 자신이 모르는 내 모습을 들어서인지 흥미가 넘쳐보였다.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이 이 주제로 한참이나 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성규는 난처한 듯이 나에게 작게 미안이라고 말하더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혀 미안해 보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작품후기]끊기가 애매해서 연참합니다
오타 지적 감사드립니다. 성휘->강휘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