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chapter1그저께 밤을 새서 그런지 어제는 기절하듯이 골아 떨어졌다. 하지만 사람의 피로라는 게 꼭 많이 자고 많이 쉰다고 풀리는 게 아니라 그냥 생활리듬만 깨져도 닥쳐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굉장히 피곤했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몸이 피곤한 편이 나았다.
아마 피곤하지 않았으면 나는 다시 새벽동안 사색에 잠겨 나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을 것이다. 갉아먹는다고 나비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갉아먹는 행위 자체에만 몰두한 유충마냥 몰두했겠지.
나비가 될 수 없는 게 끝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비가 아니라 나방이 될 수도 있었고, 매미가 될 수도 있었으며, 하물며 아무것도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게 제일 합당했다. 건설적이지 않은 사색, 무의미한 고뇌, 그저 자기혐오에 빠져 그 자체에만 심취한 모습, 그것만이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씻어내려 화장실로 가서 찬물을 켠다. 따뜻한 물은 내 피로를 풀어줄 것이다. 하지만 김이 피어오르듯이 내 생각을 뭉게구름 끼게 만들 것이었다. 찬물은 차라리 그래서 좋았다. 몸을 탄탄하게 잡아준다. 시린 몸에 집중하게 만들어 생각의 수도꼭지를 잠궈 버린다. 나는 수도꼭지를 돌렸다. 흐르던 물이 멈춘다. 거울을 바라본다. 언제나의 나 자신이 서있다. 언제나의 나 자신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아 춥다.
“아, 술 배 올랐다. 시발.”
거울을 바라보니 늘어지려고 하는 술 배가 보였다. 요새 술을 너무 많이 마신데다 생각해보니 헬스도 기간 끝났다고 끝낸 지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 정원이 정원이 이 개자식. 생각해보니 정원이가 날 부른 날이 마지막으로 운동을 한 날이었다. 저 혼자만 멋대로 살을 빼고 반대로 내 살은 찌우고 있는 셈이었다. 간악한 녀석 같으니라고. 간악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녀석 같으니라고.
나는 느껴지는 추위에 부르르 떨며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냈다. 오늘부터 다시 헬스를 시작할까 하다가 취직이 되고 나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한 달은 구직을 하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기에도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짐을 챙겨서 나왔다. 오늘은 부모님도 누나도 모두 아침 일찍 나간 후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가족들에게 또 하나의 비밀이 생긴 셈 이었다. 내가 2년간 준비하던 공무원을 때려 치고 아무회사나 들어간다는 사실을 나는 숨기고 있었다. 차라리 그날 밤 아버지에게 털어놓았으면 편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미술시간에 준비물을 챙겨오지 못한 초등학생이 차라리 더 희망적일 정도였다.
비밀이라고 하니 누나에게 정원이에 대해서도 둘러대야 했다. 누나는 그 이후로 나를 볼 때 마다 그 여자애 소개 언제 해 줄 거야라는 듯이 노려본다. 솔직히 무서웠다. 경찰관인 누나는 평소엔 순해 보이지만 화를 낼 땐 누구보다 무서웠다. 정의감이 투철한 것은 덤이었다.
나는 집을 나서며 집을 돌아봤다. 내가 사는 집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변해야했다. 나는 그러한 다짐을 하며 집을 나섰다.
***
요즘은 출근을 정원이네 집으로 했다. 요즘이라고 해봐야 어제부터 그러기로 했다. 어제뿐만 아니라 요즘 꽤나 자주오지 않았던가 싶기도 하지만 출근이라기보단 놀러온 거였으니 출근으로 치면 첫 날이었다. 엠생백수인 내가 출근이라. 사실 독서실로 나가는 게 엠생백수의 출근인 셈이었으니 지금 이렇게 구인구직을 하기 위해 정원이네를 오는 것도 출근이라고 쳐줄 법 했다.
“왔냐?”
“어 왔다.”
벨을 누르자 정원이가 익숙하게 문을 열어줬다. 정하는 없었다. 정하야 진짜로 출근을 했으니 없는 게 당연했다. 정원이는 어제 내가 남는 반죽으로 해놨던 전을 데우고 있었다. 짜투리 반죽 남은거로 해놓은 삼색전을 부치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하여간에 욕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냐?”
“밥 먹는다.”
“이제 와서?”
“백수가 아침 챙겨 먹으면 됐지. 뭘 더 하라고.”
“음, 맞는 말이군.”
나는 문을 닫고 들어가며 신발을 벗었다. 그 때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이 위화감의 머리를 찾으려고 했다. 딱히 어렵지 않았다. 이 녀석 방금 내 목소리 듣기 전에 문 연거 맞나?
“야 너 나 인거 확인은 하고 문 연거 맞냐?”
“어, 아니?”
역시나 왠지 빨리 열렸다 했다. 차라리 눈치를 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점이 자꾸 걱정을 하게 만드는 요소라는 걸 빨리 자각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마음을 담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심 좀 해라. 심지어 지금은 혼자잖아.”
“조심할게 뭐 있냐. 어차피 이 시간에 올 거 너밖에 없는데.”
“내가 아니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자 정원이는 가스레인지를 끄고 나를 돌아봤다. 눈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요즘 들어 자주 보는 감정이었다. 정원이는 여느 때처럼 자신을 여자취급 하는 것에 화가 난 듯했다.
“뭐, 시발. 뭔 일이라도 날까봐?”
“어. 뭔 일이라도 날까봐 그런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정원이를 배려하며 물러섰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안전에 대한 문제였으며 범죄에 대한 문제였다. 정원이는 옛날에 비해 호전성이 높아졌다. 자신에 대한 불합리한 현실에 반항을 하기 때문일 것이리라. 그에 반해 육체적인 능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오히려 한국 여자 평균을 줄 지어 놨을 때 반에반에반이나 되면 다행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위험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선 정원이를 반드시 납득 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정원이도 끓는점이 이전보단 높아졌는지 옆구리에 팔을 끼고는 화를 내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화를 내지만 않았다.
“너, 나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지 않냐?”
“알지.”
“그런데도 아침부터 밥 먹기도 전에 이런 개소리나 지껄일래?”
“그래도 위험하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화로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는 법이었다. 나는 정원이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강하게 당겼다. 그러자 정원이가 속절없이 끌려왔다. 정원이는 짜증을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왜 이래!”
정원이는 내 팔을 풀려는 듯 세게 휘둘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원이의 ‘세게’였다. 이미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한 나에겐 약하디 약하기 그지없었다. 정원이는 자신이 내 손을 풀 수 없자 주먹으로 내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이건 썩 아팠다. 그래, 썩 아픈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나는 정원이를 다시 밀어내고는 잡고 있던 손목을 놔줬다. 사실 효과적으로 정원이에게 각인시키려면 더 정원이를 무너트려야 할 것이다. 정원이를 밀어 넣고, 굳은 얼굴로, 절대 움직일 수 없게 하면 정원이도 알아서 납득할 터였다. 어렵지 않게 그런 풍경이 압화처럼 머릿속에서 자욱자욱 재생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내가 정원이에게 있어 세상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더 이상 휘두르는 건 필요 이상의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놓아줬다. 내가 놓아주자 정원이는 바로 손을 휘둘렀다. 이 역시 예상한 바였다
짝
정원이는 자기가 때려놓고도 제가 놀란 듯이 뒷걸음질 쳤다. 마치 내가 자신의 뺨을 때린 것 마냥 충격을 받아서는 제 스스로 벽에 몰렸다. 나는 굳이 쫓아가지 않았다. 우리는 다 큰 성인이었다. 사람을 치고 나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책임을 질 수 있는 성인임을 나는 믿었다.
정원이는 잠시 그렇게 벽에 기대고 있다가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노기가 사라져있었다. 노기가 사라지고 난 호수에 남은 것은 당황과 곤란이 만들고 남은 파문이 흔들리며 퍼지고 있었다.
“……왜 쳐 맞고 지랄이야.”
“방귀 낀 놈이 성낸다더니? 왜 쳐놓고 지랄이야?”
“막을 수 있었잖아!”
“넌 내 손 뿌리칠 수 없었잖아.”
정원이는 그 말을 듣고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정원이가 생각을 정리할 때 까지 기다려줬다. 정원이는 고개를 다시 들었다. 불쾌한 표정, 앙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고맙다곤 안한다.”
“고마우라고 한 거 아니다. 조심하라고 한 거지.”
“에휴 시발. 과하다고.”
내가 씨익 웃자 정원이도 못 이긴 척 웃으려다가 고개를 획 돌렸다. 어지간히 자존심이 센 녀석이다. 정원이가 고개를 돌리자 나는 뺨을 문지르며 정원이에게 말했다.
“야 나도 밥 안 먹었어. 배고파.”
“으, 엠생, 백수, 식충이, 한강휘!”
“마지막 건 욕 아니잖아.”
“마지막 게 제일 욕이거든!”
그리고는 서로 못 참고 웃음을 터트렸다. 딱 좋은 분위기였다. 정원이는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도 그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차피 서로가 알고 있었다. 앞으로 정원이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문을 열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나는 정원이가 상처를 조금만 입었기를 마음속으로 자그마하게 기원했다.
**
“아 술 땡긴다.”
“엠생아, 모집 요강 하나라도 더 봐라. 미친 소리 하지 말고.”
“밥 먹는 중인데 뭐 어때. 너도 전 먹고 있으려니 땡기잖아.”
“야 발등에 불 떨어진 건 나보다 니가 더 심하거든?”
정원이가 황당한 듯이 바라봤다. 아니 뭐, 그냥 땡긴다고 한 거지 마시겠다고 한 적은 없지 않는가. 나는 억울하여 밥을 한 덩이 입에 넣었다. 할 말이 없어서 넣은 것은 아니었다. 정원이는 그런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에휴, 이 노답을 어떻게 할꼬.”
“어쩌긴 뭐 어째. 어쩌지 못하면 니가 내려가고 마는 거지.”
“으하앙. 엄마 아빠 보고 싶다. 엠생 새끼. 걍 돌아갈까 진짜.”
정원이가 우는 소리를 내자 나는 어깨를 까딱하고는 다 먹은 접시를 싱크대에 내려놓고 다시 상에 앉았다. 정원이는 아직 식사를 끝내지 못해서였다. 정원이는 젓가락을 까딱거리며 나를 가리켰다.
“임마, 나는 그래도 눈만 낮추면 광고 회사 좆소는 들어갈 만 하다고. 3년 경력직 신입. 얼마나 듣기 좋겠냐.”
“하, 저는 S.대.입.니.다.만?”
“너 그 소리 면접관 앞에서도 하면 진짜 내가 빠따로 니 머리 후리고 내려간다.”
“설마 하겠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사실 내세울게 그것밖에 없기도 했다. 장난스럽게 대답했지만 정원이의 말이 맞았다. 동반입사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건 내가 구인구직에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대학 졸업하기 전에 따놓은 토익 점수와 대학의 네임 벨류 정도가 내세울 점이었다. 나는 뒷목을 잡고 쓸다가 말을 돌려 버렸다.
“오늘 성규 약속 7시. 왕십리.”
“어? 어 그래. 알았다.”
정원이는 마지막 남은 밥을 입안에 넣고 남은 전 한 조각을 같이 집어 우물거렸다. 처음에 우물거리면서 말을 하려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결국 삼키고 나서 말했다.
“하여간에 그럼 5시까진 공고 뒤져보자.”
“으아, 귀찮다.”
“귀찮으면 뭐 안 할래? 너 취직은 언제 할 거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돈은 얼마나 모으고 있니?”
“으아 엄마~. 죄송한데 입 좀 제발 닥쳐주세요~.”
화제를 돌리는 건 완벽하게 실패한 모양이었다. 나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찾을 생각이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안하고 탱자탱자 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절대로 오늘 정도는 성규 만나기 전에 쉬어도 되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정원이가 알아서 찾아주지 않을까라고 꼼수를 부리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하여간에 아니었다.[작품후기]???
???
조회수 상태가? 투베? 뭐지? 깜짝 몰카? 꿈인가?
어... 많은 관심 감사드립니다. 깜짝 놀랐네요...
오늘로 연재 전에 모아놨던 비축분이 끝이라 다시 비축분을 쌓으려고 빡글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공지가 올라가지 않는 한 12시 7분에 매일 연재될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시행하겠습니다.
아, 다음화는 연참입니다. 비축분은 없는데 다음화는 마땅히 끊을 곳도 없거든요...
코멘트는 항상 읽어보고 있습니다. 십이사자님 후원 정말 감사드립니다.:D
글을 봐주시는 모든 분들 선작 추천 코멘트 등 부족한 작품에 관심 가져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