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chapter1“야 이거 반은 내가 만든 거다.”
정원이는 눈가가 빨개진 채로 잘 익은 감자전을 가리켰다. 눈가뿐만이 아니라 찔끔 눈물을 흘린 것은 못 본 척해주기로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생 양파 반 개를 강판에 갈았으니 절반이 아니라 전부 다 정원이가 만들었다고 봐도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이지. 박수도 쳐줄까?”
짝짝짝
“에라이, 시발. 차라리 엎드려서 절을 받지.”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박수를 친 건데 정원이는 내 행동을 장난으로 받아들였는지 살짝 삐진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다소 장난을 치기야 했으나 친구끼리 칭찬주고 받기는 솔직히 쪽팔리지 않나 싶다. 나는 머쓱해져서 뒷목을 만지며 말했다.
“진심으로 칭찬한 건데.”
“……됐어. 가서 먹자.”
정원이는 고개를 홱 돌리고는 감자전만 들고 갔다. 나는 부추전과 김치전도 들고 상에 세팅했다. 정하는 족발과 술을 세팅하고 있었다. 아무 말 안 해도 척척 손발이 맞는 것이 사실 모두들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정원이가 아직도 삐져있는 것 같아서 나는 자리에 앉아서 근엄하게 선언했다.
“이 일용한 양식을 만드는 데 절반이나 기여하신 다정원님에게 박수!”
“와~.”
짝짝짝짝짝
정하도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정하 역시 이런 식의 장난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본인쪽에서 신나서 할 정도였다. 그러자 환호를 받던 정원이의 얼굴이 홍시마냥 점점 익어가더니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아, 그만해! 개새끼들아!”
“언니 그거 누워서 침 뱉기야.”
정원이가 짜증을 내자 나와 정하는 낄낄 웃으며 서로의 술잔을 채웠다. 나는 그냥 막걸리로만, 정하에겐 사이다와 막걸리를 대충 섞어서, 정원이에겐 사이다를 많이 넣고 막걸리를 섞어서 타주었다. 사이다를 최대한 많이 부었기에 도수는 꽤나 낮을 것이며 달달한 맛이 꽤나 날 터였다. 정원이는 이제 뭐라고 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술잔을 들고 외쳤다.
“강휘가 노답 엠생을 탈피하기로 한 것을 기념하며 건배!”
“건배!”
하여간에 열심히 밥 해줘봐야 은혜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짐승도 밥 주는 사람은 물지 않던데 정말이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검은 머리 짐승에게 괜히 반응해 줘봐야 다음 놀림감의 대상이 내가 되리라는 확신이 들어 나도 그냥 잔을 높이며 외쳤다.
“건배!”
그리고는 막걸리를 쭉 들이키자 빈속이 요란하게도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바로 잘 익은 감자전을 젓가락으로 주욱 찢어 입에 넣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것이 평소보다도 더 잘 된 것 같았다. 사실 평소엔 귀찮아서 이렇게까지 재료를 곱게 갈지 않는다. 말마따나 정원이의 역할이 큰 셈이었다. 나는 정원이에게 엄지를 척 들며 말했다.
“야, 너 진짜 잘 갈았다. 사각거리는 거 없이 쫄깃쫄깃하네.”
“……그치?”
정원이는 그 말을 듣고 그제 서야 씨익 웃었다. 하여간에 손이 많이 가는 귀찮은 녀석이었다. 묘하게 자기가 한 일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점이었다. 그 때는 그게 짜증났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으니 정말이지 자랑할 만한 쌍판떼기다.
그래도 이왕 술 마시며 맛있는 것을 먹는데 기분 상해봐야 뭐하겠는가. 안 그래도 요즘 술 마실 때 마다 우울함을 안주로 하여 눈물을 담아 넘기는 때가 잦았다. 비 오는 날 전에 족발에 전에 막걸리라는 좋은 안주가 있는 즐거운 날에 오늘까지 축쳐져서 먹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정원이를 띄워주는 편이 나았다는 소리다.
내가 전을 찢어 먹자 정원이도 정하도 감자전, 김치전, 부추전을 주욱 찢어 먹더니 아무 말 없이 젓가락 속도만 높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안주 떨어진다고 경을 치겠지만 재료야 많았고, 전이야 또 부치면 그만이었다.
그것보단 이 녀석들이 저렇게 잘 먹는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뭐 맛있게 먹는 가장 큰 이유는 시장이 반찬이어서 일 것이다. 나 역시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젓가락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정원이가 켁켁거리면서 막걸리를 들이키기에 난 한심한 듯이 정원이를 타박줬다.
“아니 뭘 그렇게 걸신들린 것처럼 먹냐.”
“강휘 오빠가 전을 세 판씩 구우면서 먹지 말라고 그러니까 그렇지.”
“리얼로다가 냄새로 고문 하냐?”
괜히 한 마디 했다가 정하까지 끼어들어 집중포화를 맞았다. 그래도 음식이 줄어드는 속도를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한 판만 부쳐서 먹었으면 1분만에 안주가 다 사라졌을 것이었다. 나는 괜히 고개를 돌려서 막걸리나 홀짝대고는 부추전과 족발을 입에 넣었다. 괜히 둘을 족발집에서 밑밭찬으로 종종 같이 내는 것이 아니었다. 막걸리와 함께라면 가히 족발의 삼합이라고 할 법했다.
어느새 정신없이 먹다보니 생각보다 빨리 음식이 줄어드는 속도가 느려졌다. 옛날 같으면 한 번 더 전을 부쳐야 했겠지만 역시 정원이의 양이 줄어 버린 영향이 컸다. 정원이는 막걸리를 들이키며 짜증을 냈다.
“분하다. 나는 분명히 더 많이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진심이 서려있는 한탄이었다. 진심으로 한탄을 하는 꼬라지를 보자하니 한바퀴 돌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누가 쫓아와서 뺐어먹는 것도 아닌데 뭘 아까워 한단 말인가.
“반죽 좀 남았으니 가기 전에 몇 장 더 구워줄게. 뭘 그리 아까워해?”
“그래도 맛있는 걸 조금밖에 못 먹는 건 아깝잖아. 하여간에 몸 바뀌고 나서 도움이 되는 게 없다니까.”
“좋게 생각해라 좋게. 연비가 좋아진 거 잖냐. 돈도 덜 들고 좋지.”
“연비 안 좋아도 되니까 많이 먹고 싶다!”
“언니 그러다 살쪄.”
“살쪄도 좋으니까 더 먹고 싶다!”
정하가 정원이한테 나직하게 타박을 줬다. 정하도 정원이 못지않게 전을 많이 먹었던 것 같지만 아마 지적했다가는 아웃일거였다.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그러고 보니 나는 궁금증이 몰려왔다. 과연 정원이는 살이 찌는 걸까? 이런 류의 창작물을 볼 때 살이 안찌는 경우도 있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당장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한 달쯤 지나서 체중을 재보면 되겠지.
이런 저런 망상을 하는 동안 정원이가 막걸리를 쥐고 따르려 길래 잔을 빼앗아왔다. 적당히 사이다랑 막걸리를 타서 주니 정원이가 입을 쭉 내밀고는 툴툴거렸다.
“진짜 내가 애냐. 내 술도 내가 맘대로 못 마시게 하게.”
“야. 내가 타주는 게 맛이 없길 하냐, 아님 내가 널 일부러 죽일 라고 주길 하냐.”
“그래도 내가 한 두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정원이가 칭얼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술을 타고 있으려니 정말로 한 두살 먹은 애새끼를 상대하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한 두살 먹은 애한테 술을 먹이진 않지.
그렇게 생각해보면 정원이는 잘 쳐줘봐야 여고생으로 보여 술을 들이키는 모습이 아직도 꽤 어색했다. 저번에 같이 주점을 갔을 때도 민증이 나왔으니 마실 수 있었지 아직도 민증을 재발급 받지 못했다면 바로 커트 당했을 터였다. 아직도 알바생이 얼빠진 얼굴로 몇 번이나 정원이 얼굴과 민증을 번갈아가며 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 맞다.”
“왜, 뭔데?”
그 때를 떠올리다 보니 성규 생각이 같이 났다. 주점에 간 그 날은 정원이와 성규가 신경전을 벌이다가 정원이가 화를 못 참고 나간 것을 쫓아간 날이었다. 나는 여러 일이 겹쳐 성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뒤늦게 카톡을 확인해봤지만 성규의 [너 편할 때 만나자] 이후로 난 대꾸하지 않고 있었다. 곤란함과 난처함이 손을 잡고 폴카댄스를 춘다. 내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정원이가 물었다.
“씹냐? 진짜로 뭔데?”
“아니 그 왜 성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정원이에게 성규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터무니없는 실수였다. 폴카댄스를 추던 곤란함과 난처함도 어느새 나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정원이를 바라봤지만 정원이는 의외로 태연한 기색이었다. 오히려 정원이가 내게 실실 웃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까지 놀래고 그래?”
“아니 뭐, 그게. 너, 괜찮냐?”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저번에 술 마시면서 말하지 않았었나? 나도 대충 이해한다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꼽준 게 짜증이 안 나는 건 아니지만.”
“술 먹고 말한 걸 용케도 기억하는구나.”
“그럼 필름 끊기고 다 까먹었을까봐?”
솔직히 다 기억하진 못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정원이가 술 쳐 먹고 나서 자기가 애교를 부리면서 주정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면 혀를 깨물던지 아니면 그 광경을 본 모든 사람을 혀를 깨물게 했을 것이었다. 그래도 그 때는 덜 취했었는지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원이는 술을 반쯤 마시고는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나 청명한 소리가 나긴 커녕 아예 소리가 나지 않자 몇 번이나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를 내려고 하다가 결국 얼굴을 찌푸렸다.
“야 그래. 내친김에 성균가 뭔가 걔나 같이 보러가자.”
“뭐? 갑자기 왜?”
“내 일이잖아.”
정원이와 눈이 마주쳤다. 정원이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기색이었다.
“굳이?”
“입 아프게 다시 말해야 되냐? 내 일이야.”
나는 정원이와 성규가 만나는 게 과연 좋은 결과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좋게 치든 나쁘게 치든 반반이었다. 좋게 해결 될 수도 오히려 일이 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괜한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 일이야.”
“그래, 니 일이겠지. 그럼 난 아예 나가리냐?”
정원이가 고집을 부렸다. 절대 밀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이 녀석을 떼놓고 갈지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정하가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말했다.
“뭐 어때. 같이 가면 되지. 아 강휘 오빠 나 한 잔 더.”
나는 정하의 잔을 받아서 사이다와 막걸리를 섞어서 넘겨주었다. 정원이는 여전히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사실 정원이와 성규 사이의 다툼이기는 했다. 단지 내가 성규에게 왜 그랬는지 정도나 물어보고 단순히 묻어두려고 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골치가 아파올 뿐이었다. 이전에 정하와 했던 말이 묻어둔 기억 속에서 발아했다.
‘근데 성규오빠랑 언니랑 화해시킬 거야?’
‘그건 내 사정이잖아. 정원이 사정이 아니지.’
‘뭐, 나는 성규 오빠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것 같긴 한데.’
그리고 그 때 정하가 지은 표정, 정하의 표정과 비슷하던 성규의 표정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때 느꼈던 불안한 감정도 살그머니 고개를 빼꼼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나를 마주보고 있는 것은 정원이였다. 나는 정원이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이건 나만의 사정은 아니었다. 정원이의 사정이기도 했다. 정원이가 그렇게 느낀다면 더더욱 그랬다. 나는 패배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냐, 그래. 같이 가자.”
“진작 그럴 것이지.”
정원이가 의기양양해져서는 활짝 웃었다. 가서 싸울게 될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 모습이 왠지 배알이 꼴려 정원이 잔에 사이다보다 막걸리를 조금만 더 타서 넘겨줬다. 먹고 뒈져버리라지.
어차피 여유가 충분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카톡을 켜고는 성규에게 [내일 저녁에 한 번 보자] 라는 메세지를 남겨 놨다. 취직을 해야 할 때 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규를 한 달이나 방치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자신에게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성규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띠링
[ok. 그럼 저번에 봤었던 거기로]
시간을 보니 당연히 퇴근을 했을 터였지만 역시나 성규는 답장이 빨랐다. 카톡을 보고 답장이 항상 늦는 나와는 역시나 여러모로 다른 친구였다. 나는 추가적으로 메세지를 더했다.
[정원이도 같이 가겠대]
[ok~]
성규는 ok팻말을 들고 있는 뚱뚱한 토끼 이모티콘을 날렸다. 본인한테도 불편할 수도 있었는데 바로 묘하게 애교 넘치는 이모티콘이 나오자 가라앉는 기분과는 반대로 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아무렴 어떠냐, 그 때가서 닥치고 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그리고는 잔을 들었다. 오늘 만큼은 기분 좋게 술자리를 보내고 싶었다.
“다시 한 번 더 건배!”
아, 정원이는 이 잔을 마지막으로 뻗어버렸다. 아직도 제 주량도 모르는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작품후기]이번 챕터는 쉬는 챕터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글속도나 내용 진도가 영 안나가네요. 애들 괴롭히고 싶다 정원이랑 강휘 멘탈 날아가게 하고 싶다...
항상 선작 추천 코멘트 달아주시고 부족한 글 좋게 봐주시는 분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