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회
chapter1오늘 하루를 전부 이력서를 넣고 자소서를 쓰는 것은 굉장히 큰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대학교를 들어갈 때 이후로 자소서 같은 것은 써본 적이 없었다. 이력서야 가끔 알바 할 때 넣었다지만 기업에선 알바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에 이 역시 쉽지 않았다. 반나절정도가 지나자 나는 정말로 초췌해져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쯤에는 내 시야가 흔들리고 있었다.
“으이구, 이 화상아.”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거린다. 팔을 당기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모든 것이 귀찮아져서 아예 몸에 힘을 풀어버렸다. 그러자 아이고! 하는 소리가 들리며 팔에서 느껴지던 힘이 사라졌다. 아이고라는 말이 이렇게 귀여운 단어인지 알았다는 점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야 정하야, 너도 좀 도와주라. 나 혼자는 무리야.”
“그냥 저러고 졸게 내버려둬. 혼자 머리 박다가 일어나겠지.”
“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얘가 요새 자꾸 나 꼴고나면 침대로 옮겨줘서 이대로 내버려두기가 뭔가 좀 그래.”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것이 퍽이나 귀찮아서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중심을 못 잡고 결국 뒤로 누워버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누울 것을 괜히 버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따뜻하고 편한 것을 왜 굳이 머리를 까딱거리며 버티고 있었던 걸까.
“흐익!”
“오.”
갑자기 어깨를 두들기는 느낌이 들었다. 아프면 눈이 떠질텐데 적당한 힘으로 어깨를 두들기니 오히려 피로가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 쳐주면 잠이 확실하게 들 것 같았다.
“야, 나! 와! 나오! 라! 고! 시발!”
두들기는 거야 상관없었지만서도 계속 시끄럽게 왱왱거리는 소리가 귀찮아져 나는 어깨를 두들기는 손을 잡았다. 아마 이 녀석이 시끄럽게 하는 녀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녀석을 잡자 소리가 순간적으로 멈췄다. 나는 그렇게 두 손을 잡고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지껄였다.
“닥쳐봐. 진짜 존나 피곤하니까.”
이 이상으로 뭘 하기엔 귓가에 앵앵대던 말들도 이제는 더 이상 신경이 쓰이지 않을 만큼 피곤했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겼다.
**
“으음”
몸이 찌뿌둥하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곰곰이 떠올려보니 앉아서 졸다가 결국 골아 떨어진 것 같았다. 보통 낮에 졸진 않는데 어제 고민을 하느라 늦게까지 자지 못한 게 생각보다 큰 피로로 찾아온 것 같았다.
머리께에 폭신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졸고 있으니 배게라도 던져준 모양이었다. 그런 것 치곤 좀 따뜻한 것이 배게 같은 느낌이 안 드는데 라며 만져봤더니 역시나 배게는 아니었다. 묘하게 딱딱한 심지 같은 것도 느껴지고, 느껴지는 질감이나 이런 게 배게라고 하기엔 자연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이 베고 자기에 부적합하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일어났냐.”
“어. 일어났는데, 엉?”
정원이의 목소리가 머리 뒤편에서 들려서 눈을 비비고 일어났더니 이게 웬 걸. 내가 베고 자고 있었던 것은 정원이의 다리였다. 당황스러운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와서 얼마 남지 않은 잠기운을 폭력적으로 날려버렸다.
“어……. 어, 그게…….”
“이야, 우리 강휘 참 잘났네. 여자 다리도 베고 자고. 뒤져라 깨우는데 입 닥치라고나 하고. 진짜 여자 후리는데 선수야 선수?”
정원이가 빈정거리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다리를 주물거리는 것이 다리가 꽤나 저린 것 같았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둑해지고 있었다. 완전히 밤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정하를 바라보니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저 얼굴을 보아하니 내가 자고 있는 모습을 찍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정원이가 더욱 빡쳐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이런 분석은 전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얌전히 자세를 바로 잡고는 무릎을 단정하게 모아서는 두 손을 모아서 정원이에게 대가리를 박았다. 다른 말로 어르신께 새해에 하는 것처럼 큰절을 박았다.
“죄송합니다, 마마.”
“어쭈. 마마?”
“죄송합니다! 하늘보다 높으신 다정원 형님!”
고개를 들지 않아서 못보고 있었지만 띵동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정하가 다시 동영상을 찍는 것 같았다. 하여간에 옆에서 남의 흑역사만 계속 만들어 대는 것이 나중에 꼭 한소리를 하리라고 다짐하게 만들었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제대로 정신도 못 차린 채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보이진 않았지만 정원이가 뚫어져라 째려보고 있는 시선이 뒷통수에 사납게 쏘이고 있었다. 내가 추가적으로 더 비굴한 굴종의 표시를 보여야하나 고민이 들 때쯤에 정원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10분간 더 그러고 있어! 내 다리가 얼마나 저렸는데, 이 개자식아!
”
“예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하하하하! 성은이 망극하대! 성은이, 아하하하하!”
정하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10분이라니 내가 얼마나 정원이 다리를 깔고 자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퍽이나 자비로운 판결이었다. 정원이에겐 미안했지만 나는 여자를 화나게 했을 때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정원이가 여자인가에 대해선 아직 더 고민해볼 애매한 문제였으나, 예전과 같은 반응이라고 해봐야 ‘아 뭐 시발 어쩌라고. 미안하게 됐수다?’ 정도였다. 나는 뻗대면서 그런 말을 하는 내 자신을 떠올려봤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정원이에게 할 자신이 없었다.
“……좋아. 머리를 올리는 것을 허가하마.”
“다시 한 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한 시간 같은 10분이 지나자 정원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얼른 들고는 벌떡 일어나려다가 다리가 저려서 휘청거렸다.
“아이고야.”
그러다 겨우 중심을 잡았더니 정원이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정원이는 다리를 계속 주무르고 있는 채였다.
“야 니가 내 다리 베고 잔 시간이 10배 보다 더 많아요. 이 등신아.”
“아 뭐, 그건 미안하게 됐고. 야, 다정하 진짜 영상 지워라.”
“싫은데? 뺏어보던가.”
나는 정하를 째려봤지만 정하는 내 시선을 피하고 제 바지 주머니 속에다가 핸드폰을 넣어버렸다. 내가 절대로 여자한테 손을 댈 수 없다고 확신하기에 하는 행위였다. 정말이지 한숨이 나왔다. 저기에 아마 수 없이 많은 흑역사가 잠들고 있으리라. 그리고 정하는 제가 불리하면 한 번씩 그것을 언급하겠지. 물론 그렇다고 그걸 어디다 뿌릴 녀석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나마 정하가 자신의 양심, 아니 최후의 요단강은 건너지 않으리라고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한 번 봐줄테니까 정원이 다리라도 주물러줘.
“내가 왜?”
“남의 흑역사 맘대로 찍고 나서 돌아올 여파는 생각 안하나보지?”
“싫은데? 오빠가 하든가.”
“뒤진다, 진짜.”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나랑 정원이가 동시에 째려보자 그제 서야 정하는 툴툴거리며 정원이의 다리를 주물렀다. 하라면 그냥 할 것이지 하여간에 한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은 정원이나 정하나 똑같았다. 정원이는 정하에게 마사지 받는 것이 익숙해보이진 않았지만 다리가 저린 고통이 더 큰 모양인지 비교적 순순히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아으, 어. 야 좀만 약하게. 아흐으.”
“아니, 충분히 살살 하고 있다고.”
“아아니, 이 년아! 쥐났다고! 뒤질 거 같다고! 햐악!”
“좀 참으라고! 뭉친 거 푸니까 당연히 힘 좀 줘서 해야지!”
순순히 받는 게 아니라 순순히 받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쥐났을 때 남이 주물러주면 시원하기보단 오히려 미친 듯이 아픈 법이었다. 생각해보니 진짜로 쥐가 세게 들 땐 손가락만 대도 죽을 것 같지.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 정원이의 신음소리만 들려서 오히려 더 민망했다. 결국 나는 이 공간에서 잠시 피해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 나가면서 말했다.
“나는 뭐라도 먹을 거 좀 사올게.”
“야! 한강휘! 도망가지 마! 정하 좀 떼 주고가! 야! 아흑!”
“가만히 좀 있어! 풀어줘도 지랄이네.”
“야! 한강휘! 야!”
호의에서 비롯된 일이 모두 좋은 방향으로 흐르진 않는 법이었다. 미안하다 정원아. 정하에게 손도 못 대는 못난 나를 용서해다오. 너도 우리 누나한테는 손도 못 댈 거 잖냐. 나는 그렇게 정원이에게 마음속으로만 사과를 하며 문을 닫았다. 적어도 정원이가 좋아하는 걸 사오도록 하자. 내가 머리로 다리를 베고 잔 것도 겸사겸사 해결할 겸. 문이 닫히기 전에 '한강휘 너 돌아오면 뒤졌어!' 라는 목소리가 들리길래 나는 얼른 문을 닫아버렸다.
***
장을 보고 정원이네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여니 정원이가 문 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엔 술이 가득했다. 정원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나를 노려봤다. 나는 술이 가득한 봉투를 조심히 내려놓고 반대쪽 비닐봉투를 열었다. 그 안엔 밀가루와 부추, 감자, 양파와 족발이 들어있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추 전, 감자 전, 김치 전, 족발.”
“통과.”
정원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비켜줬다. 나는 들키지 않게 마음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마침 비가 와서 전을 해먹자고 생각한 게 정답이었다. 내가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고 있자니 그 모습을 보며 정하가 소리쳤다.
“둘이서 꽁냥꽁냥하지 말고 강휘 오빠 빨리 밥이나 해줘! 배고파!”
“꽁냥은 시발.” "꽁냥은 지랄."
이럴 때만 정원이랑 호흡이 맞아서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진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정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들어와서 요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전은 금방 만들어지니 여러모로 좋은 선택을 한 셈이었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정원이가 저번에 들고 왔던 김치통을 꺼냈다. 양이 꽤 되진 않았기에 혹시나 다 먹었나 싶었는데 반절정도가 남아있었다. 다행히 김치전도 할 만 했다.
나는 손부터 대충 씻고는 바로 밀가루와 소금을 물에 개어내면서 우선 부추를 씻어 넣었다. 그리곤 프라이팬에 기름을 달구며 감자를 깎다가 국자로 부추전이 될 것을 떠내서 프라이팬에 올렸다. 치익 하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리면서 부추전이 프라이팬에서 서서히 퍼져갔다.
나는 그걸 대충 국자로 꾹꾹 눌러 얇게 펴고는 남은 감자를 깎아냈다. 그러고는 옆에서 사료를 기다리는 개처럼 눈을 빛내고 있는 정원이에게 강판과 감자를 던져줬다.
“뭐야?”
“그거 감자 갈아라. 밥 빨리 먹고 싶으면.”
“아니 씹, 너 이거 반성하는 의미에서 하는 밥 아니었어?”
“그렇다면 오늘 감자전은 없다.”
“이씨!”
정원이는 툴툴거리면서도 감자를 강판에 갈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입으론 툴툴거리면서 해줄 건 다 해주는 친구였다.
나는 그릇을 하나 더 꺼내 밀가루를 풀고 김치를 대충 섞어 넣었다. 그리고는 프라이팬을 하나 더 꺼내 기름을 두르고는 부추전을 뒤집었다. 끝부분이 자글자글하게 기름이 끓으면서 색깔도 딱 좋게 갈색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칼로 양파 껍데기를 벗겨내곤 정원이에게 던져줬다.
“이것도 같이 갈아라. 감자랑 섞여도 상관없으니까 대충 갈아.”
“으씨. 야 이거 갈면 눈 아픈데. 정하 시킴 안 되냐?”
“어 알고 시키는 거야. 정하한테 부탁은 니가 해보던가.”
정하쪽을 바라보니 정원이를 무서운 기세로 째려보고 있었다. 자기에게 시키기만 해보라는 뜻이었다. 저거한테 부탁하는 건 무리지. 그리고 사실 정하는 요리를 아예 할 줄 몰라서 믿고 맡기기엔 너무 불안하기도 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혼자 사는 여자애가 밥도 안 지어 먹고 살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닌가? 혼자 살아서 안 해먹고 살았던 게 오히려 맞는 건가?
“아, 진짜 양아치냐.”
“오냐. 밥 해주는 양아치 한강휘입니다.”
“주방에만 서면 사람이 바뀌네, 개새끼 진짜.”
나는 곧 정원이가 양파로 인해 울먹일 것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져서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다른 쪽 프라이팬에 김치전 반죽을 넣었다. 요리를 하니 기분이 좋고 정원이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했더니 두 배로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먹을 생각을 하니 세 배로 기분이 좋아진다.
쓸 데 없이 부정적인 생각이 파고 들 틈이 없이 기분이 좋아지니 요리는 정말 최고의 노동이 아닐까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취미니까 즐길 수 있는 거겠지만. 나는 이후에 전과 족발에 술 한 잔을 걸칠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전을 부쳤다. [작품후기]화수가 좀 쌓이고 나고 보니 생각이 든 건데 얘네 정말 술 많이 쳐먹네요. 이러고 몇 화 뒤에 또 술 쳐먹겠지. 그렇다고 정원이랑 강휘가 오홍홍 하면서 디저트 순회를 하는 것도 영 이상해서... 사실 작가의 역량 부족이네요.
선작이 어느새 100을 넘어섰네요. 첫 장편 소설 연재라 그런지 새콤달콤하니 기분이 좋네요. 항상 선작 추천 코멘트 날려주시고 부족한 작품 좋게 봐주시는 독자분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