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회
chapter1“그래도 3일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겨우 하루 만에 왔냐?”
“그러게. 강휘오빠라면 3주 고민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다음 날 정원이네 집에 왔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이런 반응이 나왔다. 평소에 내 이미지가 어땠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썩 틀린 것도 아니었다. 나는 결국 내가 포기한 것에 대한 가치에서 눈을 돌린 것뿐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미명하에 내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래성을 스스로 무너트리는 것을 주저하며 현실에 굴복하고 마냥 시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생각해보니까 별 거 아니더라고.”
“왜 이게 별 게 아니냐…….”
정원이가 나를 다소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하여간에 태도가 매 번 불량한 녀석이다. 충분한 고민과 그로 인한 선택을 하기 위해 밤을 지새워서 그런지 피로가 찾아왔다. 결국 일단 고민을 미룬 셈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눈을 비비며 정원이에게 말했다.
“야. 내가 2년 동안 공무원 준비를 했잖아.”
“어.”
“근데 넌 내가 정말로 국가에 헌신하며 국민을 위해 일하고 싶어서 공무원 준비를 한 것 같냐?”
“아니.”
정원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예상했던 답변이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렇게 즉답을 하니 조금은 마음이 아팠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지금 직장 구한다고 하는 것도 그거에 연장선이야. 딱히 널 위해서 선택한 것도 아니고, 니가 계기가 돼서 그냥 이렇게 된 김에 직장 구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정원이는 무언가를 말하려 하다가 결국 삼켰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짐작이 갔지만 정원이가 말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에 대해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정원이는 나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나 잠시 화장실.”
“어, 그래.”
“언니, 화장실 갈 때 화장실 간다고 하지 말라고!”
정하가 이상한 부분에서 화를 냈다. 화장실을 갈 때 화장실을 간다고 안하면 뭐라고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원이는 귀찮다는 듯이 한 팔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정원이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정하가 작당이라도 하듯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정말 괜찮아?”
“어. 정말 괜찮아. 진짜 니네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대단한 거 아니야.”
“뭐 오빠가 선택한 문제니까 나야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으음.”
정하는 팔짱을 끼고 잠시 나를 바라보며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오빠 정말 언니 좋아하는구나. 아까도 말했지만 난 오빠가 삼 일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잉?”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당혹스러운 감정이 목구멍을 빠져나와 자기주장을 했다. 또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정원이가 여자가 되고 나서 계속 저런 식으로 반응을 하니 정말이지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남자와 여자와의 우정이야 없다고도 하지만 적어도 정원이는 전 남자였고 나 역시 그것을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나는 어제의 부끄러움과 피로감이 몰려드는 듯 하여 눈쌀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뭔 소리야?”
“그도 그럴 게 오빠 원래 이런 거 고민하면 한참 걸리잖아. 자아, 미래, 재능 뭐 그런 거? 진지충이잖아.”
“아니, 진지충은 또 뭔…….”
“근데 언니 일이니까 하루 만에 결정하니까 당연히 이런 소리가 나오지.”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하고 나는 말을 멈췄다. 확실히 이번 고민은 내 생각보다도 빨리 끝낸 것이긴 했다. 나는 항상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할 일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서 고민을 하곤 했다. 의미 없는 반항을 한 적은 거의 없었으나 내 자신에 대한 것을 고민한 세월만 생각하면 사춘기가 길게도 지속된 셈이었다. 나는 내가 자의식 과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하가 한 말이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말할 순 없었다. 오히려 정원이 덕분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편이 더 편했다. 또한 정말로 내가 정원이의 일이라서 발 벗고 나서고자 이렇게 결정을 속단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런 요소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정원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다 보니 꼬여서 상황에 밀린 점이 분명히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욱 크게 차지하고 있던 요소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떠올리고 납득했다. 그래, 내가 생각하기엔 이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 이유가 없었다면 사실 나는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덮어놓을 수도 없었을 것이며 좀 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 그래. 그게 아니라 일단 그래. 충분히 고민을 하고 내린 결론이야.”
“하루가?”
“아니, 정확히는 비슷한 주제에 대해 내가 평소에도 계속 고민을 했으니까 결론이 금방 나온 거겠지.”
정하는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 역시 내 말이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냥 내가 말을 잘못했다. 이상하게 돌려서 말을 하려고 하니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냥 좀 더 직설적으로 수박 겉핥기를 할 필요성을 느껴졌다.
“그냥 내가 공무원이 하기 싫었어.”
“뭐?”
“그러니까 내가 그냥 의미 없이 사는 게 싫었다고. 사실 정원이를 위해서니 뭐니 이런 거도 다 핑계일지도 모르고, 그냥 내가 내 갈 길 찾은 거야.”
“정말로 그래?”
대답이 뒤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정원이가 화장실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난 정원이가 나온 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원이가 있는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해야 할 말이었다.
“그래, 넌 그냥 계기야. 내가 하기 싫었던 공부 때려 치고 계란 한 판 되기 전에 집에서 식충이 안 될라고 마음먹게 해준 계기.”
정원이는 자리에서 멈춰 서서 나를 바라봤다. 인상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바라보자 인상이 풀리진 않았으나 나름대로 납득을 한 모양이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납득을 한 것이 아니라 납득을 해주겠다는 표정에 더 가까웠다. 내가 어떻게든 숨기려고 했지만 정원이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 같았다. 역시 정원이는 예나 지금이나 이상할 정도로 감이 좋은 친구였다. 이런 점은 꽤나 귀찮았다.
“응. 일단은 그걸로 좋아.”
“뭐가 좋아?”
“그게……아니야. 됐어 시발. 좆까.”
“아니 미친년이 갑자기 지랄이야.”
“년 아니고 놈이라고 아 진짜 대가리 참새냐 진짜.”
“짹쨱쨲쨲ㅉ꺠쨰꺠ㅉ꺢”
“뭐래 진짜.”
“아하하하하!”
정하가 우릴 보며 빵 터졌는지 박장대소했다. 정원이는 짹짹거리는 나를 보며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내가 멈추지 않고 한참을 짹짹거리면서 정원이를 약 올리자 결국 참지 못했는지 씩씩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때리려고 했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짹짹거리다가 결국 잡혀서 한 대 맞고 나서야 입을 닥쳤다.
***
한참을 짹짹거리다가 한대 맞고 나서야 현자타임이 찾아왔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도 정원이가 씩씩거리는 걸 보니 유의미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옛날부터 정원이는 놀려야 제 맛이었다.
현자타임이 찾아오고 나자 취업이라는 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한밤중에 한 가족회의에서조차 니가 취업을 하고 싶다니 고시공부를 때려 치는 거야 좋으나 뭘 하고 싶냐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어제 증명한 건 진지하게 취업 전선에 뛰어들겠다는 의지뿐이었고 부모님이나 누나조차 내가 금방 취업이 되리라고 여기진 않았다. 아마 가족들은 내가 이제부터 취업 준비를 위해 여러 가지를 알아보고 자격증을 따리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물론 나도 그게 옳다고 여겼지만 한 달은 그러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근데 우리 취직 어떻게 하지?”
“진짜 별 생각 없었구나, 너.”
“오빠, 진짜 생각 없었구나.”
정원이와 정하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평소 같으면 억울했겠지만 이번엔 나도 내뱉다 걸린 것이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원이는 한숨을 내쉬고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짚으며 말했다.
“첫 번째 공고를 확인해봅니다. 너는 자격증 좆도 없으니까, 어지간하면 다 걸러지겠네.”
탁
“두 번째 기업에 맞는 자소서와 이력서를 씁니다. 해당 기업의 비전이나 목표 같은 걸 잘 확인하면 도움이 되겠지?”
탁
“세 번째 면접 준비를 합니다. 니가 넣은 자소서가 합격될 지 안 될지는 둘째로 치고 말이야.”
탁. 정원이의 손가락이 결국 탁자의 가장 오른쪽에 닿았다. 정원이는 다시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에 한 달은 너무 짧아. 나야 둘 째 치더라도 너는 특히나 더.”
“너는 왜 그렇다 치는데?”
정원이는 갑자기 탁자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 보면서 팔짱을 끼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치켜세웠다. 키도 쪼그만 한 게 저러니까 같잖아 보이긴 했으나 내버려두기로 했다.
“난 경력직 신입이시다. 하찮은 문과와 다르게 자격증도 있지.”
“아.”
그랬다. 정원이는 해고당했지만 적어도 경력이 있는 신입이었다. 3년간 일한 정원이와 아무런 자격증도 없이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나와의 간극은 당연히 벌어져 있을 터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고시생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지 않고 끝까지 고시에 매달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알겠냐, 엠생아. 이 형님과 너의 격의 차이를.”
“예, 누님.”
“아, 씨. 진짜!”
나는 장난스럽게 넘겼지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문제가 닥쳐오자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문제는 그냥 직장을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니고 정원이와 함께 동반입사를 해야 된다는 점이었다. 결국 얼굴을 찡그리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기세등등하던 정원이가 오히려 허둥거리더니 어설프게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자소서랑 이력서부터 쓰고 여기저기 공고 뜬 곳에 같이 넣어보자. 지금 할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나는 정원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이 말마따나 이력서를 넣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원이는 컴퓨터를 키며 말했다.
“일단 공고는 내가 찾아볼 테니까 너는 니 자소서나 써봐.”
“어.”
컴퓨터는 한 대 뿐이라 내가 들고 다니던 공책과 펜을 꺼냈다. 그런데 꺼내고 보니 자소서와 이력서에 뭐라고 적어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펜을 손에서 굴리며 고민했다. 시작은 뭐라고 시작해야하지? 스토리는 어떻게 짜야하지? 내가 끙끙거리고 있자 정원이가 그 모습을 어떻게 봤는지 컴퓨터에서 내려와서 탁자에 마주앉았다.
“일단 막히면 니 학교 어디 졸업했는지부터 적고, 니가 뭐 잘하는지 좀 생각해봐. 아니 등신아, 그런 거 말고. 그리고 양심도 없냐? 니가 게임을 뭘 잘해 허접아. 아니, 그리고 전번에 우리 회사에서 일 처리한 것 좀 적고. 니가 자랑할 게 그거밖에 더 있냐?”
“아니 나 그래도 학교는 잘 나왔는데…….”
“그럼 그거라도 적던가! 게임얘긴 왜 적냐?”
괜히 꺼낸 말 덕분에 한 소리를 더 듣고 나선 나는 입을 닥치고 정원이가 하는 말을 꼬박꼬박 수용했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정원이에게 닦달당하며 자소서를 써내려갔다. 정원이는 아까 내가 놀린 것을 톡톡히 갚아주기로 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더럽게 글을 못 써서 인지는 몰라도 정말 후임을 털어대듯이 나를 털어댔다. 나는 찍소리도 하지 않고 정원이에게 맞춰주며 갈굼을 당했다. 왜냐하면 네가 내 자소서에 집중하는 게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내게서 느끼는 미묘한 이질감과 본질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이 묻어 나온 쓴 맛을 느끼는 것 보다야 차라리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작품후기]강휘는 진지충입니다. 저번 화에서 결론이 날 법 했지만 결혼과 그것에서 연상되는 중2병의 기억으로 인한 압도적 부끄러움이 강휘의 고민조차 날려버렸죠. 결국 둘 다 해결은 안났군요.
전화가 생각보다 코믹하게 끝나서 고민을 해봤는데 일단은 연참입니다. 비축분은 아직 좀 남았으니 괜찮을거야...
항상 좋게 봐주시는 여러분들 감사드립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역시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