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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22화 (22/138)

22회

chapter1아버님이 자리에 다시 앉으셨다. 다만 그건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정하가 아버님께 달라붙어서 억지로 앉혔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머님을 슬쩍 바라봤다. 어머님께서는 내게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으나 딱 그 수준이었다. 그래도 방금 전에 비하면 썩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이른바 2차전이었다. 나는 아버님 쪽을 바라보며 말을 시작했다.

“저는 정원이가 남자였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의 정원이에게 반했습니다. 이유가 필요하시다면야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니 원래 머스마 좋아하나?”

“아닙니다. 전 평범한 이성애자입니다.”

“야는 평범한 아가 아인데?”

나는 이성적인 이유를 들어야 할지 감성적인 이유를 들어야 할지 고민했다. 이유를 들라면야 몇 가지라도 들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면서 알게 된 정원이의 성격이 저와 맞습니다. 정원이의 겉모습이 이제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 예쁘지 않습니까? 외모조차 제 취향입니다. 정원이를 신경 써주다 보니 어느덧 관심이 가서 사귀게 됐습니다.

그 어떤 이유도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내 자신의 배역에 점점 빠져든다. 나는 정원이를 사랑한다. 내가 정원이에게 사랑에 빠지는 데에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뭘까.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페르소나가 답했다. 이미 정답은 정해져있어.

“평범한 이성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전 정원이니까 사귀는 겁니다.”

아버님께서 방금 전과 같이 내 두 눈을 바라봤다. 짧은 시간이었다. 기나긴 시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옳았다. 모든 시간은 상대적이었다. 1초조차 길 수 있었고 1년조차 짧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지금이 가장 긴 시간이었다. 나는 그동안 초조함을 감추거나 자신감을 가지려고 하는 등의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단지 무대 위의 서 있는 내 모습에 심취했다. 가면이 내 얼굴이 되어간다. 내가 뱉은 거짓된 진실이 나를 바라본다. 무대 위의 내 자신이 나를 내려다본다.

“그래서.”

“네?”

“사겨서 우야라고?”

순간적으로 나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생각하지 못한 이상한 부분에서 긴장감이 풀린 까닭이었다. 두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있었는데 허리가 풀려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생각하지도 못한 보급선이 끊겨버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버님이 우리가 사귀는 것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사귀는 사이임을 납득 시키면, 나머지 일이 술술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겨서 우야라고?

“그…….”

“대답 몬 하겐나?”

“야랑 사귀니까 내려가기 싫다고!”

“가스나 니는 끼어들지 마라!”

내가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자 정원이가 나를 돕듯이 아버님께 소리쳤지만 아버님께서 정원이를 바로 배제했다. 아버님이 생각하는 상대는 오롯이 나였다. 하지만 정원이가 끼어든 덕분에 잠시 머리를 정리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원이가 당초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렇다. 우리의 목적은 사귀는 사이임을 인정받는 게 아니라 그래서 내가 정원이를 지킬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원이가 서울에서 떠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오늘의 결론점이었다. 그 과정이 뭔가 썩 구체적이고 명확한 지침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당황을 했었지만 다시 머리 속이 깨끗해졌다. 그래, 결국 그 결론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되는 것 이었다.

“방금 정원이가 말한 게 맞습니다. 저는 정원이가 서울을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원이는 서울을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라는 건 그게 답니다.”

아버님께서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굉장히 중요한 순간임에도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정원이를 떠올렸다. 아버님의 모습은 정원이가 고민하는 모습과 판박이였다.

“그래서 니 다니는 데는 있고?”

“예?”

순간적으로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준비를 너무 안한 걸까? 오늘따라 허를 찔려 당황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대답을 최대한 준비한다고 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문제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이것은 굉장히 치명적인 문제였다.

“니 직장이 있냐 이 말이다.”

“……아직은 없습니다.”

“근데 짤리 뿌린 아를 데리고 여서 산다고?”

“……예.”

“염병을 한다, 염병을.”

아버님께서 혀를 찼다. 혀 차는 소리가 주박처럼 나를 묶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선 죄인이었다. 이곳에서도 심지어 한강휘의 집안에서도 죄인이었다. 아, 이십대의 나의 부끄러운 주박이 나를 옥죄고 있었다.

“내가 니를 뭘 보고 믿어야 겐노?”

아버님께서 쇠사슬을 한 번, 두 번, 계속 묶어 내듯이 말을 뱉으셨다.

“니가 야가 머스마라는 걸 알면서도 좋아한다고 하는 것도 의심스럽제.”

“야가 짤렸는데 니까지 직업도 없다카고.”

“니가 야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제.”

“니 야를 진짜 진지하게 생각하는 거 맞나?”

“내가 니를 뭘 보고 믿어야 겐노?”

그 말이 탄환처럼 나를 꿰뚫었다. 어느새 어머님께서도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정하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정원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 어린아이처럼 결과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것 뿐 이었다. 악에 받친 아이가 소리 지르는 것과 같았다.

“그럼 믿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머라꼬?”

“제가 직업이 없어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딱 한 달의 유예기간을 주시죠. 직장을 구해서 오겠습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었다. 단순히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을까. 아니면 정원이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을까. 그도 아니라면 도와주겠다고 해놓고 꼴사납게 나가떨어지는 것이 싫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스물 아홉 무직이라는 내 자격지심을 건드려서 꿈틀한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그도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이 감정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홀린 듯이 말을 이어간다. 무엇에 홀렸는가. 내 자신인가. 혹은 내 가면인가. 가면은 과연 내 자신이 아닌가. 혹은 내 자신에게 홀린 것이 아니라 상황에 홀린 것인가. 아니면 내 자아도취감에 취한 것인가. 사명감에 취한 것인가. 그것은 나만이 알 수 있었으나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정원이를 제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다고, 지키지 못하신다고 의심이 가시면 제가 정원이와 같은 직장을 들어가겠습니다. 정원이가 괜찮아질 때 까지 계속 옆에서 지지대가 되겠습니다.”

“정원이가 본가로 내려가겠다고 하면 내려가도 좋습니다. 하지만 정원이가 내려가고 싶지 않다고 하니 지금은 가게 둘 수 없습니다.”

“정원이가 혼자 있는 게 걱정되신다면 저와 정하가 이곳에 있습니다.”

“정원이가 직장이 없는 게 문제라면 정원이와 함께 직장을 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데려가시는 것만큼은 안 됩니다.”

“정원이는 제 발로 집을 나왔으니까요.”

“그리고 이곳에서 혼자서 열심히 살아왔으니까요.”

“제가 아니라 정원이가 그간 해왔던 노력을 봐서라도 여기서 그걸 꺾으시면 안 됩니다.”

목이 말라온다. 나는 무언가를 위해 말을 내뱉고 있었다. 대신 내뱉고 있었다. 내 의지로 정원이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목소리가 갈라진다. 목소리가 떨린다. 지금 이 말들은 내가 준비한 말들이 아니다. 그냥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목소리에 기대어 입을 연다. 모두 말해. 지금 이 순간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란 말이야.

“제게 기회를 주기 싫으시다면 적어도 정원이에게라도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마침내 목이 멘다. 숨이 가빠져 온다. 긴장감? 고양감? 탈력감? 무엇이든 좋다. 어쨌든 내가 해야 할 말은 모두 다했다. 준비했던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좋았다.

아버님이 나를 바라본다.

나도 아버님을 바라본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아버님은 입을 떼려고 하시다가 내가 아닌 무엇을 바라본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간다. 그 곳엔 내 소매가 있다. 내 소매를 손으로 잡고 불안한 듯 떨고 있는 다정원이 있었다. 아버님은 정원이가 부여잡고 있는 내 소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다.”

“예?”

“알았다 안 카나. 니 말마따나 한 달 줄 텡게 함 해 바라.”

아버님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집을 나섰다. 어머님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시다가 우리를 보며 입을 떼셨다.

“니 강휘라 켄나? 잘 들었다. 솔직히 잘 믿진 몬 하겠지마는 정원이 얼굴보라 카니까 어쩔 수 없네? 근데 니 했던 말은 지켜야 되겠제? 정원이 아빠가 한 달 준다 켔으니께 한 달이데이. 한 달 안에 정원이랑 니랑 같은 회사로 들어가믄 서울에 내비두고, 니네 결혼 하는 것도 인정해줄게. 힘내래이~.”

“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마! 니도 나온나. 머하노!”

“알았다! 보채지 마라!”

어머님께서 아버님을 따라서 나가셨다. 나는 어머님께 인사드리고 아버님을 따라가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들은 말이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그 때 정원이와 정하가 어머님과 아버님을 배웅하러 쫓아 나갔다. 나 역시 일단은 서둘러서 따라 나가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나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 머리에 한 단어만이 계속 맴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혼?”

어머님과 아버님이 떠나자 나는 멍청한 소리로 되뇌인다. 뭐라고 결혼?

“어? 결혼?”

“어? 아 맞네?”

내 목소리를 들은 정원이와 정하가 그 말에 반응했다. 정원이와 얼굴이 마주쳤다. 아, 나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하고 깨닫는다. 정하는 활짝 웃고 있었다.

“하긴 강휘 오빠가 이 정도로 힘냈으면 그렇네. 엄마 아빠가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네?”

“어? 아? 엥?”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정원이도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정원이의 얼굴이 천천히 썩어 들어갔다. 그러다 정원이가 내 등을 쎄게 치며 소리쳤다.

“야 이거 어떻게 할 꺼야!”

“어? 앙? 엥?”

“푸하하하! 강휘 오빠 얼굴 진짜 웃겨!”

그렇게 나는 한참이나 정원이에게 맞으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정원이는 나한테 분을 풀고 있었으며, 정하는 그런 우리를 보며 자지러지고 있었다. 오늘의 전쟁이 이렇게 엉망징창으로 끝이 나고 있었다.

[작품후기]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휘야... 한국인은 삼세판 아니겠니?

이 작품도 어느덧 300kb를 넘어서고, 조회수도 2천이 되었네요. 뿌듯합니다. 항상 봐주시는 독자분들께 힘을 얻으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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