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chapter1이사를 도와준 이후 나는 하릴없이 공무원 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하릴없이라고 하는 표현도 요상도 한 것이 원래 하고 있었고 원래도 해야 했던 일을 하는 것이었다.
요즘 정원이 일로 술 마실 일도 많았고 나다닐 일도 많았는 데다 감정도 싱숭생숭했었지만 결국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이 일상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하면 요즘 일어난 일들은 퍽이나 일상답지 않았다.
일상답지 않았다고 하니 오늘 작지만 크고 개 같은 일이 있었다. 바로 독서실 에어컨이 망가진 일이었다. 차라리 열지나 않았으면 다른 독서실이나 갈 것을 하필이면 꾸역꾸역 돈독이 오른 돼지가 독서실 문을 열어버렸다. 한 달씩 예약을 하는 내 입장에선 뭔가 아까워서라도 괜히 앉아서 공부를 하게 된다. 정작 요즘 이런저런 일이 있을 때 마다 빼먹었었지만.
그래도 요즘 못하던 공부가 모처럼 잘 되고 있었는데, ‘에어컨이 망가져서 공부가 안 된다.’라는 사실은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기분이라서 오히려 신경에 거슬렸다. 그런 점에서 정원이가 전화를 건 것은 꽤나 반가운 일이었다. 적어도 공부를 하면서 공부를 못하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은 들지 않을 테니까.
나는 독서실을 나서며 전화를 받았다. 아니 근데 독서실 안보다 그늘이라곤 해도 바깥이 더 시원한 건 진짜로 선을 넘은 게 아닌가싶었다. 좋아. 나는 단호하게 오늘 치 환불을 요구할 것이다.
“어 왜?”
[야 시발 좆 됐어!]
“넌 좆도 없는 게 맨날 좆 된다냐.”
[뭠마?]
“아니 뭐, 아니다. 그래서 뭐?”
평소 같으면 꼬투리를 잡았을 정원이였지만 자기 입장에선 퍽이나 큰일이 난 것인지 신경도 쓰지 않고 급박하게 말을 이었다.
[부모님 서울 올라오신데!]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솔직히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랑은 이번에 본가 내려가서 알아서 이렇게 저렇게 잘 푼 게 아니었던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 안고 울고불고 했다고 술 마시면서 들었던 것이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결국 뭐가 문젠지 혼자 생각해봐야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뭐가 문젠데?”
[아니, 그게. 아씨 설명하기가 힘드네. 오늘 만날 수 있냐?]
나는 ‘내가 네 봉이냐? 네가 부르면 꼬리 흔들면서 가게?’라며 한번 비꼬려다가 그러기에는 전화기에서 들리는 소리가 뭔가 다급하고 간절한 느낌이 들어 그냥 얌전히 정원이를 만나기로 했다. 절대 독서실 에어컨이 망가진 김에 에어컨 빵빵한 정원이네를 가자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보자고. 니네 집으로 가랴?”
[그럼 땡큐하고.]
“네네, 그래요. 그럼 이따 보자고.”
[엉~.]
나는 전화를 끊고 기쁜 마음으로 짐을 챙겼다. 드디어 이 찜통에서 해방이다. 독서실 총무한테 한 소리 꼭 하고 가자. 오늘 치를 반드시 환불받자. 내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 뿐 이었다
***
나는 자주 판단을 하는 데 있어 오산이 생긴다는 것을 실감한다. 오늘 역시 그랬다. 독서실 총무가 내가 이미 2시간을 사용했기 때문에 환불이 불가하다고 지껄인 사실이 그러했고, 사실 별로 큰 걱정을 안 하고 왔었는데, 정원이의 상태가 굉장히 혼란스러워 보였다는 사실이 그러했다. 독서실이야 다음 달부터 독서실을 끊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끝을 맺었지만, 정원이는 그야말로 보고 있는 나한테 느껴질 정도로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진짜 좆 됐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뭐가 문젠지 모르겠으니까 천천히 설명 좀 해주라.”
“으으으음.”
정원이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신음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자기도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정원이가 충분히 말을 정리할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기다리는 것 말곤 딱히 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여기는 에어컨이라도 빵빵하게 틀어져있어 썩 기다려줄만 했다.
잠시간의 생각 후 정원이가 나름대로 정리를 한 듯 했다. 그래도 역시나 차근차근 말하기는 힘든 것인지 정원이는 띄엄띄엄 말문을 이어갔다.
“일단은 부모님이 올라오는데, 그게, 나를 데려갈 것 같아. 안 그래도 부모님이 나 이번에 내려갔을 때 걱정 많이 했었거든. 뭐라고 해야 하나, 물가에 버려둔 어린애 같다고 했나? 여자애가 돼서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고 그랬는데?
뭐 아무튼 간에. 원래도 내가 서울 올라가는 거 별로 안 좋아했는데, 지금까진 직장 때문에라도 내비 두셨거든? 근데 이번에 정하 집으로 이사 온 거 전화했다가 왜 이사했냐고 하는 걸 직장 잘렸다고 실수로 말해가지고. 그러니까 그냥 이참에 본가로 내려오라고 하더라고…….”
“음. 그렇구나.”
정원이는 시골에 있고 싶지 않아했다. 옛날에 던파에서 자기 얘기를 할 때도 이 거지같은 시골에서 빨리 서울로 올라가고 싶다고 얘기하던 녀석이었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나는 별로 느낄 수 없는 욕구였다. 모든 대구 사람이 그런 건 아니겠으나, 적어도 정원이와 정하는 그랬다.
나는 정원이 부모님의 생각도 꽤나 이해가 갔다. 정원이가 말했듯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안 그래도 딸들이 서울 올라가서 자기들끼리 사는 것도 불안한데 그 딸이 원래 아들이어서 여자로써 자각이 부족함에야 당연히 불안할 것이다. 게다가 어디다 물어보기도 힘들 문제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 역시 뭐라고 해답을 주기가 애매했다.
“‘음, 그렇구나.’가 아니라! 나 어떻게 해야 되냐고! 본가 내려가기 싫어! 서울에서 살고 싶어!”
나는 조금 생각을 해봤다. 정원이가 대구로 내려가면 부모님과 함께 살 것이다. 독립을 하고 싶어 하는 정원이야 그게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저런 몸에 익숙해지려면 사실 보호자와 함께 사는 편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나는 부모님의 걱정이 공감이 갔다. 나는 뭐라도 얹힌 듯이 끄응 소리를 내며 의견을 냈다.
“일단 직장 구해보는 건?”
“부모님 당장 내일 올라 오신다는데?”
아예 작정하신 듯 했다. 아직 정하가 퇴근을 하진 않았지만 정하도 딱히 부모님을 설득하긴 힘들 것이다. 특히나 정하는 자기 부모님한테 약했었으니까 오히려 정원이한테 이참에 내려가라고나 안하면 다행이었다.
“너희 부모님들이 니가 서울 사는 걸 인정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까?”
“그걸 모르니까 너를 부른 거잖아!”
솔직히 모르겠는데 나를 불렀다는 말은 반은 반가웠고 반은 곤란했다.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싶으면서도 그래도 힘들 때 나를 의지해준다는 사실이 조금은 즐겁다. 그 즐거운 감정에 실려서 나는 조금 더 힘을 내보기로 했다.
“요컨데 니가 서울에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나 적어도 안심하게만 만들면 되는 거 아니냐?”
“그렇지?”
“그럼 정하랑 같이 사니까 괜찮다고 하는 건 어떠냐?”
정원이는 끄으응하며 누가 어깨라도 꾹 누르는 것 마냥 죽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젓는다.
“뭔가 부족해. 정하는 아무래도 언니도 아니고 동생이니까 말이야. 완전히 의지할만한 대상으로 부모님이 납득해주지 않을 것 같아.”
“꼭 남아야만 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일 뿐이군. 당장 내일까지 준비하긴 힘들겠어.”
우리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그런다고 좋은 방도가 생각날 린 없었다. 정원이는 단순히 서울에 남고 싶어서 떼를 쓰고 있는 것 뿐 이었고, 나는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실시간으로 우리 부모님의 속을 썩이고 있는 엠생 백수였다. 그런 내가 부모님을 안심시키는 방법을 알리가 없었다.
어느덧 정하가 퇴근할 시간이 되어 정하가 돌아왔다. 정하는 정원이의 말을 듣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러다 정하가 말했다.
“그냥 돌아가는 건 어때?”
“너는 내가 돌아갔으면 좋겠냐?”
“엄마 걱정하는 거 보면?”
“그럼 너도 같이 내려가던가.”
“왜 물귀신처럼 나한테까지 그래!”
그러고는 서로 한동안 투닥거린다.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내가 그 사이에 괜히 끼어들기도 애매해서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와, 캔맥주. 아시는구나? 빈속에 마시기는 좀 그렇다 싶긴 했지만 어차피 뻘쭘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이거라도 마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캔맥주를 따고 바닥에 앉아서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 모금 마시고 나도 모르게 크으하는 소리를 냈더니 둘 다 싸움을 멈춰서는 약속이라도 한듯이 나를 째려본다. 아니 대체 왜 갑자기?
“막 캔인데.”
아. 그건 좀 많이 미안한 일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유리잔을 하나 들고 와서 반 정도를 채워서는 정하에게 넘겼다. 정하는 반만 채워진 유리잔과 정원이의 얼굴과 내 얼굴을 두어번 와리가리하며 바라보더니 결국 들이켰다. 정원이가 그걸 보더니 투덜거렸다.
“내 몫은?”
“자.”
나는 결국 마시던 캔을 넘겼다. 나도 한 모금 밖에 못 마셨지만 이 집 주인이 저들 둘인 걸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한 모금이 남긴 입맛만 다실뿐이었다. 둘은 맥주를 마시면서 다시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맥주도 못 마시면서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언니 여기에 있어도 된다고 여길만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으으음…….”
“흐음…….”
“아!”
정하가 손뼉을 치며 뭔가 깨달은 얼굴이 됬다. 나와 정원이의 고개가 그런 정하를 향해 동시에 돌아갔다. 정하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팔짱을 끼고 당당한 얼굴로 선언했다.
“그러니까 강휘오빠가 언니 남자친구가 되면 되잖아!”
“엉?”
“뭐?”
나도 정원이도 얼빠진 소리를 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 저런 결론에 다다르는 거지? 정하의 알고리즘을 따라 가보려고 해도 나는 출발점과 결론점 외에 아무런 과정도 도출해낼 수가 없었다. 역산을 해보려 해도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쟤네 부모님들이 데려가지 않는 방법이 뭘까? 내가 정원이 남자친구가 된다. 대체 두 가지 사실에 무슨 연관성이 존재하는 거지? 정원이를 바라보자 정원이도 정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정하는 우리가 이해를 못하자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결국 엄마 아빠가 데려가려는 건 여기에 언니 보호자 역할이 없어서 걱정 돼서 그렇잖아.”
“그런가? 뭐 그런 이유도 있지.”
“그럼 언니가 서울에 믿을 만한 보호자가 하나 있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정원이도 나도 그 설명으로는 모자랐다. 그러자 정하가 답답한 듯이 발을 구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강휘 오빠가 언니 무조건 지켜준다고 그러고 언니가 강휘 오빠가 너무 좋아서 떨어지기 싫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아닌 거 같은데.”
“에반 거 같은데.”
나도 정원이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었다. 쟤네 부모님이 그걸로 납득할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최고의 방법은 정원이가 직장을 붙어버리는 건데 취직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될 리가 없었다. 됐으면 이미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겠지.
그래도 지금까지 의견이라고 나온 게 정하의 의견밖에 없으니 우리는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당연히 납득은 안 되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와 같은 생각이었다. 정하는 우리가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자 입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언니가 서울에서 지내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거 아니야. 미래를 약속한 남자친구면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고. 옛날에 아빠가 딸내미는 출가외인이라고 그러기도 했고.”
“근데 엄마 아빠야 당연히 내가 원래 남자였다는 거 알잖아. 근데 무슨 내가 벌써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믿으시겠냐?”
“그래. 솔직히 내가 정원이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도 정원이가 나 좋아한다고 하는 것도 믿기 힘드시겠지.”
“아니, 그럼 뭐 어쩌게! 다른 방법 있어?”
정하가 갑자기 빽하고 소리 질렀다. 사실 저 뭐 어쩌게에 대해서 대답할 만한 대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기는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 말이 안 된다. 뭐 백번 양보해서 저 의견을 채택하더라도 더 견고한 근거가 필요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가 된지 얼마나 됐다고 남자친구 생겼으니까 본가로 내려가기 싫다는 건 좀 그렇지.
아닌가? 의외로 말이 되나? 어차피 정원이는 이제 여자애라고 생각하시면 남자인 내가 지탱해준다고 하는 것도 말이 되는 게 아닐까? 이젠 나도 슬슬 헷갈렸다. 내가 정말로 헷갈리는 건지 대안을 못 찾아서 그냥 포기하고 정하의 주장을 납득해주려고 하는지도 슬슬 헷갈렸다. 정하는 그런 나를 보며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봐봐. 일단 엄마 아빠한테 나랑 언니랑 사는 게 서로한테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일단 언니가 떠나면 나도 혼자가 되는 거니까? 뭐 지금까진 혼자 살 긴 했지만 엄마 아빠도 나 혼자 사는 거 불안해 하실 거 아냐.
그리고 언니가 심리적으로 불안한 거나 이런 건 나한테만 맡기긴 뭐하잖아? 그래서 엄마 아빠가 나한테 언니가 마냥 기댈 수도 없다고 생각할 것 같으니까, 언니가 기댈만한 믿음직한 남자친구가 있어서 서울에 있는 편이 더 낫다. 이러면 엄마랑 아빠도 납득할 거 아니야!”
슬슬 정하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정원이가 내려가면 정하도 혼자 사는 게 되니까 정원이가 정하에게도 필요하다는 점을 제시하고, 정하가 정원이에게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의 미숙한 점은 내가 채운다고 설득하라는 소린가? 그걸로 부모님이 납득하실 지는 잘 모르겠다만, 계속 정하의 말을 듣자하니 적어도 시도 해 볼 만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어느새 정하에게 설득당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민하다가 정원이에게 말했다.
“너도 더 생각나는 거 없으면 일단 저렇게 할까?”
“……넌 괜찮아?”
정원이가 내 눈을 바라보며 묻는다. 뭐가 괜찮냐는 것일까. 내가 너의 남자친구인 척을 하는 것이? 아니면 너희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 그도 아니면 너를 위해서 내 시간을 추가로 써야 된다는 점이? 그 중 하나를 괜챦나고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었고, 전부가 괜찮냐고 묻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괜찮냐는 요소가 있었을 지도 몰랐다. 나는 대충 생각나는 요소를 하나 골라서 대답했다.
“뭐 남자친구인 ‘척’ 하는 거니까. 부모님 맨날 뵈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너도 본가로 내려가기 싫어하고. 나도 니가 내려가면 같이 놀 녀석이 한 놈 사라지는 거니까 좀 쓸쓸할 것 같기도 하고.”
"하, 에반 거 같긴 한데."
정원이는 그 말을 듣고도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아마 나를 척이라고는 해도 남자친구로 삼는 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들 것이었다. 게다가 부모님한테 거짓말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후자는 크면서 몇 번이나 했을 터였지만 남자친구를 생긴다는 거부감과 합쳐져서 부담감을 더할 것이었다. 나는 정원이의 부담감을 덜어주기 위해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했다.
“뭐 어차피 너 직장 구하고 나면 그 핑계 대서라도 안 내려갈 수 있잖아. 그 때까지 시간벌이라고 생각하든가.”
“시간벌이라. 시간벌이……, 좋아. 단순한 시간벌이라면야.”
정원이는 시간벌이로 임시로 한다는 점에서 겨우 마음의 위안을 얻은 것 같았다. 그렇게 싫다면 그냥 본가로 내려가도 될 텐데 말이다.
정원이는 시간벌이라는 말을 하면서 내 얼굴을 바라봤다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생긴 여자친구인 셈이었다. 괜히 척이라도 한다고 하는 게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속에서 무언가 꾸물렁 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라 무엇이라 확실하게 정할 수는 없었다. 그저 그 느낌이 썩 싫지 만은 않았다는 점이 더욱 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내 기분이야 어떻든 간에 나 역시 정원이를 본가로 내려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정원이네 부모님의 심정을 공감이야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도 정원이만큼 딱 맞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절친과 떨어지는 걸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또 개인적으로도 정원이에 대해 걱정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번과도 같은 사태가 또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몇 가지, 정원이를 홀로 내려보내기 싫은 요소야 얼마든지 많았다. 나는 그 요소들을 속으로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정원이와 사귀는 척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헤아려보며 나 자신을 납득시키고 있었다.[작품후기]이 소설도 이제 20화가 됐네요. 부족한 글을 봐주시면서 선작 추천 코멘트를 통해 응원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 소설은 비축분이 있어서 매일 연재가 되고 있는 건데, 비축분이 점점 떨어져가네요. 이 비축분으로 연참을 하려고 했던 건데 연참을 하려면 좀 더 비축분을 쌓아야겠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일일 연재가 깨지지 않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