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chapter1정원이가 완전히 곯아떨어지고 나서 나는 정원이를 안아들었다. 침대에 조심히 내려놓고는 이불을 덮어주며 정하에게 말했다.
“옷은 니가 나중에 갈아입혀.”
“오빠가 끝까지 하지 그래?”
“그건 무리지…….”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내가 난처한 얼굴로 술을 들이키자 정하는 깔깔대며 웃는다. 나도 정하가 그냥 해본 말인 것을 알기에 대충 넘기며 오히려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성규랑은 잘 됐어?”
“에이, 그것도 무리지.”
정하가 무릎을 치며 시원하게 웃는다. 우려했던 결과였고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래도 정하의 반응을 보니 연인 관계가 될 정도로 잘 풀리진 않았지만, 끝이 썩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언니랑 싸우고 나갔는데 마냥 좋게 보기가 좀 힘들더라고. 그래도 뭐 끝까지 얘기 나눠보니까 그냥 친구처럼 지내긴 나쁘지 않은 사람 같고 그래서 번호만 나눴어.”
“그럼 잘 된 거 아닌가?”
“에이, 번호 나누면 다 사귀나? 사귀긴 진짜 좀 그렇다니까.”
정하는 술을 들이키며 말했다. 그러고도 나는 이래저래 떠봤지만 정하는 정말로 성규에게 연인으로써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제가 먼저 소개시켜달라고 해서 안 하던 짓까지 한 결과가 이거라니.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성규오빠랑 언니랑 화해시킬 거야?”
“내가 왜?”
“아니 나중에 또 만나면 중간에 낀 강휘오빠가 귀찮아지지 않아?”
나는 성규와 정원이가 서로를 노려보며 내가 그 사이에 있는 장면을 상상해봤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기분이다. 거기에 위장이 쓰려왔다. 딱히 둘을 만나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곤란해지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건 내 사정이잖아. 정원이 사정이 아니지.”
“흐응?”
“아니 정원이 안 그래도 요새 힘든데 쓸데없는 걸로 스트레스 더 주기 싫다.”
“와. 강휘오빠 지극 정성이네~.”
“아니 뭘 이런 걸로 정성이고 자시고 할 게 있나.”
정하는 술을 들이킨다. 기본적으로 정하도 술이 참 센 편이었다. 그럼 왜 정원이는 약한 걸까? 원래 정원이도 술이 꽤 셌었으니 원래 정원이의 주량이나 유전적인 걸로 따져도 술이 센 편이 맞을텐데 말이야. 물론 정원이네 부모님들이 술이 센지 약한지는 못 들었지만 말이다. 역시 정원이가 술이 셌다면 내 걱정도 좀 덜 했을 것이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게 변한 셈이었다.
“뭐, 그래도 나중에 성규한테 만나자고는 했어.”
“그래? 나도 같이 가서 말 거들어 줄까?”
“니가 와서 뭘 돕겠냐. 내가 성규한테 왜 그랬는지 좀 물어보고 납득 안가면 뭐라 하고 그런 거지.”
“그런가? 흐음.”
“그래.”
나는 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남에게 쓴 소리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썬 성규를 만나서 쓴 소리를 하기가 껄끄러웠다. 하지만 성규가 무슨 의도로 정원이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정도는 듣고 싶었다. 차라리 내가 납득 가는 이유를 댔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나쁜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성규의 미묘한 웃음이 자꾸 떠올랐다.
“뭐, 나는 성규 오빠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것 같긴 한데.”
“어? 뭔데?”
정하는 내가 반색하자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실실 웃었다. 방금전까지 떠올리던 성규의 얼굴이 겹쳐지는 얼굴이었다.
“오빠가 내 도움 필요 없다메. 알아서 찾아보세요~.”
“하여간에 짠순이 같으니라고.”
나는 술을 들이켰다. 술을 마실 일이 참으로 많다. 정하가 도와준다는 것을 거절한 것도 나였으니 정하에게 마냥 매달리기도 뭐했다. 게다가 성규와의 일은 내 사정인데 정원이는 내버려두고 정하를 부르는 것도 영 내키지가 않았다. 생각난 김에 일단 성규에게 소식을 남겨 놓기로 했다. 나는 성규에게 [해명을 요구함. 언제 볼 것?] 이라고 카톡을 남겼다.
“아 맞다. 이사는 언제 할 거야?”
“글쎄~. 언니 일어나봐야 알 거 같은데. 언니 월세가 언제까진지 모르겠네.”
“미리 옮겨도 되지 않나? 어차피 할 거 미리미리 하자.”
“왜 이렇게 재촉해? 혹시 언니 혼자 사는 거 걱정돼?”
“아니 씨, 뭐든지 다 그런 걸로 엮으려고 하지 좀 마라.”
내가 짜증을 내며 술잔을 내밀자 정하도 얌전히 술잔을 부딪치며 술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예의 웃음 가득한 표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는 연거푸 술을 들이킬 뿐이었다. 술 마실 핑계야 참으로 많았다.
***
정원이의 이삿짐이 썩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미니 냉장고 같은 거나 이삿짐 전반을 모두 정하 차에 몰아넣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이사 전문 업체를 불렀다. 부르고나니 정작 트럭에 실을만한 짐이 적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이미 부른 걸 어쩌겠나 싶다. 이미 불렀으니 최대한 뽕을 뽑으면 되겠지 싶다.
“집 주인한텐 인사드렸냐?”
“아니. 내가 인사해봐야 사정 설명 귀찮아서. 걍 카톡으로 이사 간다고 했지.”
“아 그건 그래.”
정원이는 옷을 가득 담아놓은 상자를 들려고 낑낑대며 힘을 썼지만 상자는 쉽게 들리지 않았다. 이전이랑 비교할 것도 없이 그냥 척봐도 힘이 굉장히 약해진 것 같았다. 정하도 저 정도는 들겠다. 뭐 척봐도 정하보다 정원이가 키도 10센티 이상은 작아 보였으니 신체능력도 더욱 약할 지도 몰랐다. 아니, 확실히 더 약할 터였다. 나는 정원이가 들려던 상자를 뺏어서 들고는 정원이에게 말했다.
“니 지금 상태 생각해서 적당히 가벼운 거 위주로 옮겨라.”
“이씨. 거의 다 들었었는데!”
“아서라. 허리 다친다. 군대서 안 삐어봤냐?”
“하, 씨.”
정원이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투덜대면서도 결국 가벼운 짐을 위주로 들었다. 군대에서 허리를 삔 것은 내가 아닌 정원이었다. 그래서 빠르게 납득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원이가 이것저것 옮기려고 하자 짐을 같이 옮기던 젊은 용역이 정원이가 들던 짐을 뺏으며 말했다.
“어휴, 아가씨. 이런 건 남자들 맡기시고 쉬세요.”
“아니, 하. 이 정돈 저도 옮길 수 있는데요?”
정원이가 용역에게 소리를 높였다. 자존심이 센 정원이는 안 그래도 내가 짐을 뺏은 거에 대해서도 화가 났을 터였다. 그나마 내가 옮긴 건 제 능력이 부족해서기라도 했지 저건 충분히 자기가 옮길 수 있는 정도의 짐이었다. 하지만 용역의 입장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 나는 슬그머니 용역에게 다가가서 귓속말을 했다.
“거, 자기 속옷 옮기는 걸 남자가 뺏었으니 화가 안 나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용역은 깜짝 놀라고 얼굴이 벌게져서는 정원이에게 짐을 돌려줬다.
“죄송합니다!”
“? 뭐 됐어요.”
정원이는 용역이 사과하자 순순히 사과를 받아들이고 짐을 옮겼다. 뭐 저 짐에 있는 게 속옷인지 아닌 진 나도 모르겠지만 일이 잘 풀렸으니 됐지.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었다. 짐을 옮기는 동안 젊은 용역은 계속해서 정원이에게 집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저 용역은 정원이에게 호감을 품은 것이었다. 정원이가 금방 화를 내려나 싶었는데 아까 내가 중재를 해서 그런지 짜증을 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나 역시 한두번이나 핑계를 대지 더 이상 뭐라고 하기도 뭐했다. 그러다 슬슬 정원이가 짜증을 참을 수 없어 보여서 용역에게 한마디 할까 했더니 그 때 정하가 도착했다.
“늦어서 미안~. 짐 다 옮겼어?”
“오냐. 진짜 미안해야지. 더럽게 늦었어.”
나는 한참을 늦게 온 정하에게 배신감 반과 이 상황을 해결해주리라는 막연한 안심을 반 섞어 한숨을 내쉬었다. 정하는 그런 나를 보며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게 누가 평일에 이사하래? 일 끝나자마자 언니랑 오빠 태우러 온 거만으로도 감사하시지.”
“에휴, 내가 뭐라 하겠냐.”
이삿짐 정리는 어차피 거의 돼있었기에 정하가 손을 돕자 일처리는 더욱 빨라졌다. 그와중에도 용역이 정원이에게 집적거리려고 하는 것을 본 정하는 그 이후부턴 솜씨 좋게 그 사이에서 용역을 블로킹하고 있었다. 정하는 빠르게 뒷정리를 끝낸 후에 우리에게 말했다.
“차 타! 가자!”
“오냐.”
“알았어!”
정원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정하를 쫄래쫄래 따라간다. 남자가 치근대는 걸 견디기가 유독히 힘들었을 터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참은 게 장한 수준이었다. 나는 정원이가 쫄래쫄래 쫓아가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정하가 언니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하네 집에 차를 타고 도착하고 생각해보니 나도 정하네 집은 오랜만이었다. 정하네 집도 그다지 넓진 않았다. 정하는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평수는 그래봐야 7,8평 남짓 되어 보였는데 집 안에 들어가자 옷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그나마 속옷이 널부러져 있는 건 아닌 게 다행일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사 오는 날인데 신경 좀 쓰지 그랬냐.”
“음……. 미안.”
“에휴.”
정원이도 한숨을 내쉬며 옷을 대충 옷장에 쑤셔 박아 놨다. 정원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짐까지 옮기자 공간이 가득 차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이의 짐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정하가 원래 냉장고가 없었고, 정원이도 오면서 침대나 옷장은 대부분 처분하고 와서 한 공간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짐을 다 올리고 우리가 용역들에게 인사를 하자 아까 정원이에게 치근거리던 젊은 용역이 정원이에게 다가왔다.
“혹시, 그 쪽 분한테 관심 있는데 연락처 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정원이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정하의 얼굴도 똑같이 썩어있었다. 표정이 같으니 확실히 자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정원이가 씹어내듯이 말했다.
“관심 없어요.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아, 네.”
용역은 그래도 깔끔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돌아갔다. 큰 사건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정원이가 투덜거린다.
“아니, 뭔데 번호를 달래?”
“눈치도 없나. 그렇게 티를 냈는데.”
“에효 시발. 안 그래도 자꾸 여자애 취급해서 빡쳤었는데.”
정하가 열심히 맞장구를 치며 같이 투덜거렸다. 나도 처음엔 괘씸하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듣자하니 괜히 그 용역이 불쌍해져서 같은 남자로써 대변을 했다.
“정원이 니가 겉모습만큼은 예쁘장하잖아. 그래서 그런가 보지.”
“음……. 이 개소리를 좋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러고는 정원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계속 이상한 소리를 냈다. 정말이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정하는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예쁘긴 하지. 어때 언니 화장도 좀 해볼래?”
“아니, 나 남자라고. 화장을 왜 하냐.”
그러자 정하가 짐짓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혼내는 것 같은 태도였다.
“언니. 모르나 본데, 언니 보면 세상 사람들 누구나 다 여자라고 생각할 거고, 여자한테 화장은 무장이야. 기본이라고.”
“대체 누구랑 싸우는 건데…….”
“나 빼고 전부다.”
정하가 강하게 밀어붙이자 정원이는 잠시 흔들리는 듯 했지만 결국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절대 안 해.”
“아깝네……, 그래도 피부 관리는 오늘부터 무조건 해야 돼. 이건 양보 못해.”
“으으으…….”
정원이는 우는 소리를 냈지만 결국 정하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냈다. 아마 오늘부터 정원이는 피부 관리를 시작당할 것이다. 요샌 남자들도 피부 관리를 한다니까 그렇게 죽을 상을 짓지 않아도 되지 않나 싶었다. 물론 나는 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사엔 역시 짜장면이라며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짜장면은 썩 맛있진 않았지만 이사를 끝낸 기분이 들어 썩 나쁘진 않았다. 우리는 이 소리 저 소리 떠들어대다가, 막차시간이 되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돌아오며 왕복 2시간은 올만 한 것 같기도 오기엔 먼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결국 이곳을 자주 들락날락 거리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헛웃음이 자꾸 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집을 돌아오는 동안 이상할 정도로 계속.
[작품후기]선작이 하나 둘 씩 오르는게 꽤 기분이 좋네요. 항상 좋게 봐주시고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