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chapter1한참을 정원이가 울고 있을 때 정하가 왔다. 정하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쪽을 보는 녀석들에게 째려보며 위협을 가했다. 나는 그런 정하에게 감사하며 오롯이 정원이에게만 신경을 쓸 수 있었다. 정원이는 손가락 끝이나 겨우 잡고 있던 내 손을 두 손으로 잡고는 히끅거렸다. 나는 손을 빼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 손을 맞잡아주었다. 맞잡은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떨림이 느껴지자 왠지 마지막 잎새가 생각났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마지막 잎새가. 나는 문득 그 잎새를 새로 그려준 늙은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흑, 시발. 어쩔 수 흑, 없는 거, 흑. 아는데에에.”
“어,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래.”
“그래도오 흐끅, 분하자나, 흑.”
“그래, 분하지. 지고 나가는 것 같잖아.”
“맞아아아.”
정원이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려고 하자 정하가 손수건을 꺼내서 정원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소 억센 듯한 손놀림이었다. 정원이에 대한 짜증이 아니라 나에 대한 짜증이 섞여있었다. 나는 정하가 정원이를 챙기자 살그머니 정원이에게서 손을 뗄 수 있었다.
“아니 강휘오빠 진짜 변태야? 왜 겨우 울음 그쳤더니 다시 울게 하려고 그래?”
“어, 음. 미안하다?”
“아니야아, 흐극, 얘가 잘못한 게 아니야아.”
“그래, 그래. 착하다 착해. 오구오구.”
“애 취급 하지마아!”
정하와 정원이가 투닥거린다. 정하 나름의 달래는 방법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정원이는 내가 달래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상태를 회복하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모두의 시선이 이쪽에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췄다. 그러자 다들 슬그머니 눈을 돌린다. 그러나 눈을 돌려봐야 이쪽에 전부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정하와 정원이에게 말했다.
“할 말 많을 텐데. 정하야, 정원이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
“오빠는?”
“술 사들고 갈게.”
“어어, 꼭 사와아.”
정원이가 코가 막힌 듯한 맹맹한 소리를 낸다. 정하가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들이밀자 처음엔 좀 저항하는 듯 하다가 정하가 안 풀면 너 버리고 간다라는 말을 듣고서야 겨우 팽하고 풀어낸다. 하여간에 칠칠맞지 못하기는. 나는 정하가 정원이를 데려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며 통장을 체크했다. 딱히 부유한 상황은 아니었다. 진로에 테라나 좀 사들고 가야겠군. 정원이용으로 호로요이같은 것도 사야하나. 사실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
“야, 시발. 잊어.”
정원이네 집에 오자마자 정원이가 대뜸 한다는 말이 이 모양 이 꼬라지였다. 자신의 수치를 감싸준 사람에게 감사보다 먼저 협박이라, 정말이지 다정원다웠다. 그게 이상하게 웃겨서 나는 피식 웃으며 나는 술을 적당히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뭔 개소리니?”
“시발 내가 쳐 울었던 거 잊으라고 시발!”
“아니 왜요?”
“……사나이가 돼서 남들 보는 앞에서 질질 짠 게 쪽팔리잖아!”
아, 그렇군. 쪽팔리시는군요. 그럼 너 우는 동안 주위 눈치 보면서 너 달래던 나는 얼마나 쪽이 팔렸을까?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이 감정은 분명히 분노일 것이다.
“이런 싸가지 없는 년을 보게.”
“년 아니고 놈이라고 시발!”
“전번엔 년이라고 불러달라며!”
“내가 언제!”
우리가 유치하게 와와거리자 정하는 우리의 꼬라지를 바라 보다가 책상을 손으로 탕 치고는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헛짓거리 그만하고 술자리 깔지?”
“앗, 예.”
“어……, 엉.”
정하는 항상 이렇게 분위기를 잡을 때 굉장히 무섭다. 나도 정원이도 정하의 오오라를 보며 싸움을 멈추고 서둘러서 술자리를 세팅했다. 정하에게 태진아를 말아주고 정원이에겐 호로요이를 던져준다. 정원이는 한숨을 푹 내쉰다.
“정하한테도 소맥을 말아주는데 나는 꼴랑 이거라니.”
“너 그 꼴랑 그거 먹고도 취할 건데.”
“아니 설마 그러겠냐.”
“건배!” “건배!” “건배! 야이…….”
옛날엔 처음처럼에 카스가 최고의 조합인 줄 알았는데 요즘은 테진아가 최고의 조합인 것 같다. 목 넘김이 좋단 말이지. 내가 한잔 원 샷을 하고 새로 말고 있는데 정원이가 내 술 잔을 바라본다.
“뭐, 소맥 마렵냐?”
“좀 마려운데.”
“그렇다면야 뭐.”
나는 말아 놓은 소맥을 반 정도 다른 컵에 담아서 정원이에게 넘겨줬다. 정원이는 그것을 시원하게 원 샷하고는 캬아하면서 입맛을 다신다.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눈길이 굉장히 가련했다. 솔직히 저렇게 미소녀가 아래에서 치켜뜬 눈으로 바라보는 건 굉장히 취향이라 곤란했다. 응, 그래도 두 잔은 절대로 안줘.
“아 맞다. 건배 제의 안했네.”
“언젠 했냐?”
“그러게?”
갑자기 장난기가 돌았다. 나는 크흠하고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정원이의 백수 복귀를 환영하며, 건배!”
“풉. 건배애!”
“야이 씹! 미쳤냐, 진짜. 너네!”
역시 정원이는 까야 제 맛이지. 요새 너무 오냐오냐해줬다. 그러니까 오자마자 저렇게 챙겨줘도 헛소리를 하는 거겠지. 나는 낄낄거리며 원 샷을 하고는 안주로 시켜놓은 보쌈을 입에 물었다. 정원이는 부들부들거리다가 틱틱대며 말했다.
“아, 진짜. 취업 활동 다시 시작해야 되네, 진짜.”
“난 아직도 하고 있는데.”
“오빠는 공무원 준비하는 거잖아.”
“그게 더 지옥이야, 에휴.”
우리는 술을 마시며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에 정하가 진로 한잔을 들이키고는 정원이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봤다.
“야 언니야.”
“오빠라고.”
“언니야, 너 괜찮아?”
정원이는 정하가 언니라고 부르는 호칭을 고치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딱히 남자였을 때도 오빠라고 부른 적은 없었을 터였다. 그냥 다정원이라고 불렀지. 정원이는 정하의 질문을 듣고는 언젠가 한 번 들었던 말을 심드렁하게 다시 꺼냈다.
“안 괜찮으면 어쩌겠냐.”
“그런가…….”
“그런 거야.”
정원이는 호로요이를 홀짝이며 고개를 돌린다. 한참을 울어서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가 된 것일까 아니면 상처에서 고개를 돌린 것일까.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말했다.
“뭐 실업급여 다 챙겨주신다고 하시겠다. 계장 경력 3년도 다 인정해주신다고 하시겠다. 천천히 찾아봐. 백수 라이프도 적당히 즐기고. 아 맞아, 돈 있는 백수 라이프잖아?”
“그것도 정도 것이지. 이번 달 월세도 내야 되고, 전기세, 수도세. 으으. 머리 아프다.”
“그럼 언니 나랑 살래?”
“엉?”
정원이가 순간적으로 눈이 동그래진다. 뭐 원래야 서로 성별도 다르고 정원이랑 정하의 회사가 멀어서 같이 살 이유도 없었지만 이제는 정원이네 회사가 없으니 딱히 같이 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둘 다 혼자 사는 여자애들이니 같이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정원이도 적어도 겉모습만큼은 여자아이였으니까. 특히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정원이 자신도 말했듯이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다는 점이었다. 정원이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되냐?”
“얼마든지. 대신 언니라고 부를 때 딴지 안 걸면.”
“아니, 그. 에휴. 그래, 니 알아서 불러라.”
“야호! 드디어 언니가 생긴 기분이야!”
정하가 두 팔을 들고 환호를 했다. 돈이란 게 언제나 강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웃었다. 생각보다 울면서 많이 털어낸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없었고, 지금도 딱히 확신은 없지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야 정원아.”
“왜?”
“……아니다. 잊어.”
“싱겁기는.”
나는 정원이에게 괜찮냐고 하려다가 바보 같은 짓이라며 그 말을 다시 삼킨다. 정원이는 아마 방금 정하에게 말했듯이 괜찮지 않으면 어쩔 거냐고 하겠지. 적당히 괜찮지 않지만 버틸 수는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원래는 얼마나 울었었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일 년에 한 두 번이나 울었던가? 요즘 따라 힘든 일도 유독이 많았지만 더 눈물샘이 약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변화를 긍정적으로 봐야할까 부정적으로 봐야할까 긴가민가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꽤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 간 것 같았다. 차라리 마음속에 안고 끙끙대봐야 빨리 풀어내는 게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참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원이 상태가 별로 안 좋아보였다. 척 보기에도 앉은 상태에서 비틀비틀거리는 모습에 나는 슬그머니 옆으로 가서 물어봤다.
“야, 너 진짜 그거 마시고 취했냐?”
“안 취해셔……. 겨우 요고 마시고 취해껜냐!”
저런 취했군. 정말로 소맥 반병에 호로요이 하나 깠다고 죽을 진 몰랐다. 난 적어도 호로요이를 세 병은 마실 줄 알고 그만큼 사왔었는데. 오늘 우느라고 진이 빠져서 평소보다 더 못 마시는 건가? 그 때 정원이가 내 팔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안 취해셔. 냔 이 졍도료 쓰러지지 아냐. ……회샤도 쓰려지지 아늘 슈 이쎤는데. 버틸 슈 이션는데에. 괘니 나때무네 사쟝님됴 힘들 거 가타가꼬. 시뱔. 왜 여쟈가 되셔. 왜 냐만……. 시뱔.”
정원이가 코를 훌쩍이길래 다시 우나하고 얼굴을 봤더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물만 글썽거리고 있었다. 나는 정하한테 손짓을 해서 손수건을 받아서 정원이의 코에 손수건을 댄다. 내가 애를 달래는 건지 내 또래의 친구를 달래는 건지 모르겠다. 정원이는 술에 취해서인지 순순히 코를 팽 불고는 다시 넋두리를 이어갔다.
“방금두 봐랴. 내갸 애됴 아니교 코 풀게 동생이 도와 쥬고 니가 도와 쥬고……. 시뱔. 냔 왜 이려케 야캐진 거냐. 응? 야, 강히야. 내가 이번 년에 땩 녜 번 우러따? 너한테 쪼랴쓸 때량 엄마량 아뺘가 아나조쓸 때 크흥, 친구드리 나 따머글 뻔한거 아랴쓸 때, 그리구 오늘…….”
오늘 새로운 사실을 몇 개 알게 된다. 이 녀석 국밥집에서 나한테 쫄았었구나. 지금도 불안정하지만 그때는 더욱 불안해했었지. 미안함과 후회가 섞여 나를 다그쳐왔다. 나는 대항하지 못한 채 내가 그 때 화내면 안됐었는데 라며 자조할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부모님하고 드디어 화해를 한 걸까? 그래, 그래도 부모님이 너를 받아줬구나. 그래서 네가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거구나. 잘 된 일이다. 부모님까지 널 외면했으면 너는 무너져버리고 말았겠지. 다정원이 다정원으로써 이 땅위에 발을 딛고 서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부모님들께서 자신을 다정원이라고 인정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 네 친구들은 미안하지만 나랑은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친구들 보자마자 인사로 하이주먹부터 날릴 것 같거든. 네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때는 물론 네 의지랑 상관없이 꼭 같이 갈 거지만 말이야.
“진쨔로 이러케 되교나셔 쟈꾸 울계 댄댜. 나는 눈무리 만탸. 뚀르르.”
“풉,”
정하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정하쪽을 보니 이미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 아이고 정원아, 오늘 흑역사가 크게 남겠구나. 나는 정원이를 말리고 침대로 데려갈까하다가 언제 또 이 녀석의 진심을 들을까 싶어 그냥 내버려뒀다. 정원이 역시 가오만 살아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자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네 진심을 듣지 않고서는 너무 불안했다. 너무 불안해서 심지어 내가 하는 일이 맞는지, 내 생각이 맞는지 두려울 정도였다.
“그래됴 냐는 아직 다졍워니야. 그치? 맞지, 강히야?”
“그래. 넌 다정원이야.”
“응, 냔 다졍워니야. 가끄믄 아닌 거 가탸셔 부라나지만, 응. 냔 다졍워니야.”
정원이는 씨익 웃으며 말하고는 내 어깨를 베고 색색거리며 잠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너무 눈이 부셔서, 그냥 네가 너무 멋있어서, 단지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넋이 나가서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띵동
“아.” “아.”
핸드폰 영상이 끝나는 소리에 나와 정하가 눈이 마주친다. 서로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내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찍은 거 마지막 10초만 지워주라.”
“싫은데.”
“……후. 그럼 적어도 나도 보내줘.”
“어. 어? 흐응? 호오? 큭. 그래, 그래. 알았어.”
“아, 아니라고.”
“으느르그~”
정하는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냥 나도 단순히 정원이 약점 잡을 쪽팔린 영상 하나 가지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니 약점이라도 절대 이상한 생각 한 거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주라 정하야. 제발.[작품후기]정원이가 1화때 잭콕을 먹고 뒤지지 않았던 건 잭다니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강휘가 약하게 탔기 때문일겁니다... 사실 지금 정원이는 단 걸 좋아해서 음료수 더 탄 걸 먹고 맛있다고 했을 거거든요.
오늘 문득 조회수 천 회가 근처길래 새로고침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선작 코멘트 추천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