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chapter1집에 돌아와서 누나가 자고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제발 자고 있어라. 얼음 샤워 각이다. 진짜로 등에다가 얼음 한 사발 부어버린다.
“응, 왜? 데이트 잘 됐어?”
“아니, 시발. 데이트 아니었거든.”
아쉽게도 누나가 자고 있지 않았다. 내일이 일요일이라서 역시 안자고 있을까 예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고 있기를 바랐는데 참 아쉬운 일이었다. 누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이 시간에 들어온 거 보면 쓰진 못했나봐?”
“아니, 시발! 그래! 그거!”
감히 그 말을 누나가 먼저 꺼내?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그거 때문에 개쪽 당했잖아 시발!”
“아하, 아하하하하하!”
누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지러대게 웃어댄다. 그 웃는 모습이 묘하게 정원이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더욱 열불이 났다. 나는 괜히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방 밖으로 도망쳤다.
“진짜 다음에 두고 보자. 누나 새끼 너 뒤졌다 진짜.”
“응~ 니 여친 옷 벗기고 콘돔 안 썼다고 엄마아빠한테 불어버림~.”
“아니 시발년아! 아니라고!”
괜히 건드렸다가 오히려 카운터로 뎀프시롤이라도 맞은 기분이다. 괜히 피곤만 쌓여서 다리 힘이 풀리는 기분이다. 정말이지 괜히 건드렸다. 나는 옷을 벗고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몸이 편해져서인지 오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누나새끼가 넣어놨던 콘돔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만이 기억 날 법도 하건마는 나는 그것보다도 정원이의 반응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정원이는 결코 내가 말한 변명을 납득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 자신의 생리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마음이 풀렸을 것이다. 어느 쪽에 정원이가 초점을 두고 오늘을 기억할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후자를 기억한다면 최고였겠지만, 내가 얼버무리던 전자를 기억하고 있다면 지금의 나처럼 다시 한 번 내 대답을 곱씹으며 너만의 답을 추론해나가겠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퍽이나 서로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의미를 오해하고 내가 내린 결론이 정답일 것이라고 착각하며 그 착각한 의미에 의해 상처 입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그렇게 상처를 입는 과정일 지도 몰랐다. 정작 정원이는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었다. 아니 사실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야 말로 낙관주의적인 생각이었다. 정원이는 오늘 내가 자신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할 것이며, 나에게 도움을 최대한 부탁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나는 대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겨를이 없었다. 방도가 없었다.
***
고시생의 일요일은 주말이 아니다. 오히려 주중에 일하고 있었던 부모님이나 누나가 집에 있기 때문에 주중보다 오히려 집에 있기가 불편하다. 그렇기에 요즘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평소처럼 독서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공부를 하려니 영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온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억지로라도 해야지.
그렇게 5시간정도를 공부하다가 점심을 먹고 이어서 공부를 하던 중 이었다. 전화 진동이 울린다. 나는 주위에 혹시라도 나를 보는 사람이 있는가 싶어서 고개를 숙이면서 독서실을 나섰다. 핸드폰을 보니 다정원이었다. 벌써 연락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삑
“어, 왜.”
[야, 요새 자꾸 너 불러서 미안한데 너 나 좀 도와줘야겠다.]
“뭔 소리야?”
[사장님이 내 말을 아예 안 믿어줘. 그래서 너라도 불러야 할 것 같아.]
“응? 뭔 소린데?”
[아니, 하. 사장님한테 월요일에 바로 이러고 나타나면 서로 불편하니까 미리 불러서 얘기하자고 했는데 하나도 안 믿어주셔.]
아, 그거야 그럴 수 있겠다. 그런데 이게 꼭 내가 필요한 일인가? 정하가 가도 될 일이 아닌가 생각을 하다가 정원이네 회사는 정하보다 내가 더 얼굴을 자주 비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내 말만으로는 증명하기는 영 귀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너 정하한테도 오라 그래. 나도 일단은 갈 테니까.”
[어. 알았어. 고마워.]
“오냐, 끊어.”
전화를 끊으니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하도 나도 안 데려가고 사장님을 납득시키려고 한 거지? 저번에 이연아씨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나 정하가 너무 쉽게 믿어줘서 그럴지도 몰랐다. 사실은 이연아씨나 사장님 같이 정원이를 이전의 다정원이라고 못 믿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나는 짐을 대충 챙기고는 서둘러서 발걸음을 옮겼다.
***
정원이가 보내준 도착점을 보니 회사 근처의 카페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더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이제는 좀 낯이 익기 시작하는 정원이와 정원이네 회사 사장님이었다. 아직 정하는 도착하지 못한 듯 했다. 나는 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 진짜로 한강휘가 왔구만?”
“아니, 진짜라니까요, 사장님.”
이 후덕하게 보이는 50대 아저씨가 정원이네 회사의 사장님이다. 정원이가 병아리일 때 내가 정원이를 돕겠다고 알지도 못하는 일을 도와줬었는데, 그게 사장님에게 좋은 의미로 어필이 됐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사장님은 계속 내게 러브콜을 날리시곤 했다. 그 때를 생각하니 나도 참 무모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뭣도 모르는 일을 그렇게 나서서 도와준 걸까. 결과가 좋았으니 망정이었다.
“그래, 한강휘, 자네 오랜만이야.”
“예,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자주 못 봬서 죄송합니다.”
“뭘 죄송할 것까지야 있나. 허허허”
사장님은 넉살 좋은 웃음소리로 껄껄 웃음 지었다. 실제로도 저 웃음소리만큼이나 꽤나 성격 좋은 분이지만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의 사람이다. 능력만큼은 대단했고 사람을 분석하는 것도 썩 잘하시는 분이다. 그런 분이 정원이를 못 믿으시는 것을 보니 이 녀석도 저번처럼 퍽이나 설명을 못했지 싶었다.
“자네도 이 아리따운 아가씨가 우리 다정원 계장이라고 말하려고 왔나?”
“뭐, 그렇죠.”
“진심인가…….”
사장님은 내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정원이의 말에서 신뢰성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딱히 내가 사장님에게 있어 정원이보다 더 믿음이 간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정원이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거겠지. 추가로 내가 이제부터 증언하기도 할 것이다.
“어, 일단 이 아리따운 아가씨가 사장님이 아시는 다정원이 맞습니다.”
“아리따운 아가씨는 또 뭐야.”
정원아 설명하는데 제발 닥치고 있어봐라. 나는 정원이를 무시하고 사장님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사장님이 믿지 못하시는 거야 당연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저도 정원이도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정원이는 저에게 자신이 다정원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저랑 곧 올 정원이의 여동생인 다정하, 그리고 정원이의 가족정도는 일단 납득하고 있습니다.”
“흠. 적어도 자네는 이 아가씨가 다정원이라고 생각한다 이거로군.”
“네, 맞습니다.”
사장님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시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로구만. 자네가 이 아가씨에게 속았는지 혹은 정말로 내가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이 아가씨를 다정원이라고 여기고 있군.”
“네, 맞습니다.”
사장님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괴고 있다가 말했다.
“좋아. 나도 일단은 자네가 다정원 계장인 것을 인정하지.”
“그렇다면!”
“하지만 내 판단은 바뀌지 않네.”
판단? 무슨 판단을 말하는 거지? 정원이의 표정이 잠깐 밝아지는 듯 하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을 정원이에게 보냈지만 정원이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서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사장님을 보며 물으려고 했다. 그런데 사장님은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내가 원하는 답을 주셨다.
“아, 다정원이를 해고하겠다는 말일세.”
“네?”
사장님은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엔 다정원이가 회사를 나오기 싫어서 장난을 치는 줄 알았네. 그러다가 이 아가씨가 자기가 다정원이라고 여기는 정신병자고, 이 아가씨로 인해 다정원 계장이 모종의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이 들어서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지.”
역시나 생긴 것과는 달리 철두철미하시다. 게다가 정원이를 걱정했다는 것이 느껴지는 발언이다.
“그렇다면 제가 이제 다정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복직시켜 주셔도 되지 않나요?”
“그것도 안 될 말이야.”
사장님은 이어서 설명을 하려다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강휘. 자네가 설명해보게.”
“네?”
“내가 이 아가씨를 다정원이라고 소개하고 계장 자리에 올려놨을 때 회사에서 어떤 일이 생길 것 같나?”
나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사장님이 해고를 생각하고 있으니 사장님 속에서는 여자가 된 다정원을 계장으로 올리는데 퍽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정보를 토대로 생각을 펼쳐나간다. 다정원이 새로운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계장으로 나타났을 때 회사에 있을 수 있는 부정적인 여파라.
“팀원들이 일단 납득을 못하겠군요.”
“계속 말해보게.”
“어, 일단 팀원들이 납득을 못할 겁니다. 사장님도 제가 나타나기 전에 납득을 못하셨는데, 제가 나타난다고 해도 납득이 안 되는 일반 직원들은 얘를 이 전의 다정원 계장으로 여길 리가 없죠. 그럼, 아. 혹시 생각난 거 말해도 됩니까?”
“말해보게.”
“혹시 사장님이 자기 맘대로 얘를 다정원이라고 속이면서까지 정원이를 자르고 낙하산 태운 게 됩니까?”
정원이가 나를 놀란 듯이 바라본다. 미안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항상 하고 있는 지라 이런 상황을 떠올리기는 쉬웠다. 아마 정원이는 이렇게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자리가 당연히 자신의 자리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하나 최악의 사태는 그게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 또…….”
정원이가 넋이 나간 듯이 말을 뱉는다. 나는 사장님이 이어서 말할 것을 예상하다가 순간적으로 정원이의 상태를 캐치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사장님의 말을 추가적으로 듣기에 정원이는 다소 상태가 좋지 않아보였다. 나는 일단 사장님의 말을 끊으려 했다.
“저기 사장님.”
“최악의 사태엔 다정원이 자네가 나한테 몸을 팔아서 자리를 샀다는 소리도 날 수 있겠지.”
“……사장님.”
내가 조금 화가 난 투로 부르자 사장님은 지금까지의 진지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당황하며 허둥거렸다.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놀라버린 것 같았다.
“아니, 자네를 성희롱 하려는 것은 아니야. 물론 내가 그렇게 여긴다는 것도 아닐세. 물론 난 다정원이 자네의 성실함을 믿네. 자넨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만 다른 사원들이 그렇게 여길 수도 있다는 거지.”
“…….”
정원이의 표정이 메말라간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손을 잡아주는 등의 스킨쉽을 하면 정원이는 오히려 이럴 때 자신을 여자취급을 했다며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았고, 말로 달래자니 사장님이 말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사장님은 이왕 말을 꺼낸 김에 마치자고 생각한 모양인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자네를 해고하는 데에는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여하간 가장 큰 이유는 자네가 자리에 돌아오면 전체적으로 회사 분위기가 좋지 않아질 것 같다는 걸세. 물론 내가 지금까지 자네의 경력은 모두 인정하는 기록도 줄 수 있고, 자네에게 실업급여 신청도 다 처리하도록 하지. 퇴직금도 충분히 지급하겠네.”
정원이는 그 말을 모두 듣고만 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듣고만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 목소리는 마치 누가 살짝이라도 밀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만큼 가녀리게 떨리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문제가 된다면 회사를……나오겠…….”
“사장님.”
그 목소리를 듣자 나는 결국 그 말을 끝까지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끼어들 순간도 이유도 명분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정원이가 이렇게 떠밀리듯이 내쳐지는 것은 화가 났다. 지금까지 그래도 회사를 위해 헌신하던 친구가 아닌가.
문득 예전의 기억이 났다. 별로 대단한 기억은 아니다. 다만 옛날에 정원이가 고졸인데다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자기를 믿고 뽑아준 회사가 있다며, 몇 번의 잦은 실패 끝에 들어갔다며, 기뻐하고, 술에 쩔어서, 쓰러지고, 그렇게 울지 않던 정원이가 술을 마시며, 기뻐서 울었던, 그 때를 기억한다. 나는 그렇기에 화가 났다. 그래, 나는 단지 이 사태에 대해 화가 났을 뿐이었다.
“회사 사정은 알겠는데, 얘는 뭐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직원 아닙니까?”
“내 회사의 직원이 맞으니 사후 처리를 모두 해주겠다는 것이 아니겠나.”
“……사장님. 얘 표정 좀 보십쇼.”
정원이는 밀랍인형처럼 굳은 얼굴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님은 그제서야 정원이의 표정을 확인한 것 같았다. 사장님은 퍽이나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장님이 호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냥 끝까지 밀어붙여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사장님은 정원이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렇군. 내가 너무 회사의 사정만 밀어 붙였어. 미안하네. 우리 회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자네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군. 내 태도에 대해서 사과하겠네.”
정원이는 잘 참고 있다가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눈물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정말이지 보는 사람이 힘들 정도로 겨우겨우 눈물을 참고 있었다. 정원이는 고개를 젓고는 힘겹게 말을 해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끄, 끝까지 신경 써주셔서어. 그, 그리고 회사는 정말로 나가겠습니다.”
“……고맙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연락하게.”
사장님은 내게도 명함을 건냈다. 그리고는 결국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페를 나섰다. 카페를 나서며 내게 눈짓을 보내는 것을 나는 캐치해냈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였다. 한숨이 나올 것 같지만 나는 그 한숨을 억지로 눌러 담고 정원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정원이의 표정을 보자 나는 결국 한숨을 참지 못하고 내쉬고야 말았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제발.
“야. 남자라도 이럴 땐 울어도 돼.”
“윽, 흐윽. 시발. 흐흑.”
정원이는 처음엔 감정을 눌러 담듯이 흐느끼다가 결국 한참을 울고야 말았다. 이 자리에 나쁜 사람은 없었다. 나쁜 상황과 나쁜 현실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다가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손가락 끝을 조심히 잡고 있었다. 마치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듯이 그냥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조심히. 아주 조심히.[작품후기]코멘트는 항상 읽고 있습니다.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