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chapter1술을 어디서 먹을까하다가 기분이 꿀꿀하면 안주라도 좋아야 된다는 논리에 따라 동네로 돌아와서 익숙한 주점을 들어간다. 어지간하면 맛있는 곳은 주변에 알리는 편이지만 그것조차 아까워서 숨기고 숨긴 비장의 맛집이다. 나는 익숙하게 주문을 넣고는 나온 술을 따른다.
“첫 잔은 원 샷?”
“이건 니 꺼 아니야, 이 자식아.”
나는 정원이가 내민 잔을 뺏었다. 정원이는 입술이 조금 튀어나왔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며 레몬사와를 한 잔 시켰다.
“레몬사와는 무슨. 그거 술 아닌데.”
“오냐, 진로 5잔 넉 다운이신 분이 하실 말~.”
정원이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그래도 어쩌겠냐? 이제 네 술은 모두다 도수 낮은 녀석으로다가 줄 거다. 정원이가 겨우 5잔에 쓰러지면 챙겨야할 것은 나였다. 술자리가 그 시간부로 파하는 것은 덤이다. 이 즐거운 술자리를 위해서 제발 그러지 말아줬으면 한다.
곧 레몬사와가 나오고 나서야 짠하곤 술을 털어 넣는다. 정원이는 레몬사와를 방금 나를 바라보듯이 못마땅하게 쳐다봤지만 한 입 먹어보더니 놀란 듯이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짓는다.
“뭐지? 왜 맛있는 것이지?”
“글쎄다. 너 단 거 좋아하잖아.”
내가 그 말을 하자 정원이가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눈을 팍 뜨며 말했다.
“진짜네?”
“그걸 이제 알았냐…….”
“아니, 진짜로 몰랐지. 원랜 안 그랬으니까.”
“그래, 원랜 안 그랬지.”
우리는 술잔을 기울인다. 원랜 안 그랬지. 지금은 그랬다. 사소한, 굉장히 사소한 변화였다. 초콜렛 케이크, 화이트 초콜렛 프라푸치노 자바칩 추가해서. 레몬사와. 머릿속에서 그런 단어의 멜로디라도 울리는 기분이 든다. 나는 일부러 그 멜로디를 털어내듯이 술을 입에 털어놓고는 밝게 말했다.
“뭐 어때. 몸이 가성비가 좋은가보지.”
“뭐?”
“옛날에는 취하려면 술 값 오지게 깨졌잖냐. 이젠 가성비 좋은 몸이 된 거지.”
“단건 뭐든지 보통 비싼데.”
“니 누렁이 같은 입맛이 호전된 거에 감사하자 그럼.”
“뭐 이 개 자식아?”
나는 두 손을 들고 항복표시를 했다. 그 때 시켰던 안주가 나왔다. 닭 꼬치, 베이컨토마토말이 꼬치 등이 모인 꼬치 모듬에 매콤한 양념이 일품인 스지볶음, 그리고 술 먹기 좋은 안주인 여러 종류의 오뎅이 담긴 오뎅탕이다. 아 여기 메뉴 이름은 오뎅 나베였던가? 아, 오뎅탕이아니라 어묵탕이라고 해야 하나? 별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나는 우선 오뎅 나베를 정원이의 몫과 내 몫을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는 꼬치들 중 닭 연골을 골라 입에 넣는다. 오도독오도독한 식감이 좋다. 씹고 있는 연골을 목에 채 넘기기 전에 다시 술을 따라 들이킨다. 행복이 혈관을 흘러 온 몸을 감싼다. 행복이란 것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너 여기 진짜 좋아하네.”
정원이가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 문제 있냐?”
“아니, 요근래 중에 제일 행복해 보이길래.”
요즘 내가 행복할 일이 별로 없긴 했지. 요즘이 아니라 고시준비를 하면서는 늘 그렇다. 오늘은 특히나 더 한 날이긴 하다. 오늘만 해도 몸에 안 맞는 차림을 하고 싫다는 애 억지로 데이트 끌고 나와서 서로 싸우려는 녀석들 중재하다가 되도 않는 해명을 하며 여자한테 경멸이나 당했다.
사실 이 정도는 오늘 하루 힘낸 나를 위한 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고생을 한 것에 비해서 썩이나 푸짐한 상이었다. 나는 오뎅을 하나 집어 입에 넣고는 술을 들이켰다.
“뭐 너도 먹어봐라. 진짜 괜히 내가 이러는 게 아니다.”
“아니 나도 여기 맛있는 거 알아.”
“내가 데려왔다.”
“누가 뭐라냐.”
정원이가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이곳은 나의 맛 집이다. 내가 찾은 맛 집이다. 일종의 신념과도 같았다. 정원이 역시 오뎅 나베의 국물을 먹으며 풀어진 표정이 된다. 여기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비실비실 풀린다.
“그래서 대체 오늘 왜 이렇게 화가 난거야?”
“어?”
그래서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행복이 너무 긴장을 풀어서일까? 정원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질문에 나는 당황해버리고 말았다. 정원이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물어봤고, 나 역시 별 것 아닌 것처럼 대답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집이 불타고 있는 심정이었다. 그러자 정원이의 눈이 쌜죽해졌다. 무언가를 읽은 듯 한 눈이었다. 나는 당황을 숨기고 쓸 떼 없는 말을 삼키기 위해 술은 들이켰다.
한 잔
“아니, 화 안 났다니까.”
두 잔. 일단은 부정한다.
“아니, 오늘 나 화낸 적 없지 않냐? 진짜?”
세 잔. 납득시키려한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네 잔. 질문한다.
“아니. 그래 니가 요새 힘들어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
다섯 잔. 네 기분에 공감하는 척을 한다.
“…….”
여섯 잔. 비로소 나는 침묵한다.
정원이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닥치고 있자 천천히 입을 뗀다. 묘하게 풀이 죽어 있는 모습으로, 미안한 듯이, 조금은 음울하게.
“나 때문에 그러냐?”
“아니야.”
반사적으로 대답한다. 의식적이 아닌 무의식적인 대답이었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되자 나는 재차 곱씹어본다. 곱씹으면서 더욱 확신한다.
“어, 그것만큼은 아니야.”
“그럼?”
글쎄 왜 일까. 나는 적어도 오늘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 허들을 낮추어볼까? 화가 나지 않았으면 짜증났던 부분이 있었나? 짜증이 나지 않았다면 거슬리는 부분은 있었나? 거슬리지 않았다면, 아니 거슬리기야 했지.
“응, 정말로 화가 난 건 아니야.”
“얌마. 너, 정말…….”
“아니, 들어봐.”
정원이가 하려는 말을 끊는다. 나도 아직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무언가 언어를 의미를 대답을 빈 공간에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냥 그렇게 느껴진다.
“일단, 화나지 않았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어. 그리고 절대 니 탓이 아니야. 너 때문에 스트레스도 좀 받는 건 사실인데, 그거 때문은 절대 아니야.”
말을 고른다.
“오늘 일단 나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잠이 좀 모자랐지.”
단어를 만든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대학교 때 미팅에 나갔을 때나 했던 머리를 해서 영 불편하기도 했네.”
언어를 내뱉는다.
“그 와중에 내가 주선을 한 데이트 자리가 박살이 났잖냐. 아, 이건 좀 니 탓도 맞아.”
의미를 정제한다.
“그래도 그게 다 니 탓이라는 건 아니야. 성규도 좀 널 긁고 그랬지. 성규가 눈치는 빠른 편인데 니 사정을 알 질 못하니까 자꾸 개소리를 하더라고.”
변명을 한다.
“그런데 하필 니 후배랍시고 온 이연아씨가 자꾸 짜증을 내잖아. 그래서 내가 좀 꼬왔는 지도 모르겠다.”
변명을 한다? 그래, 나는 변명을 하고 있었구나. 누가? 내가. 언제? 지금. 어디서? 내가 좋아하는 술집에서. 무엇을? 변명을. 어떻게? 쓸 떼 없는 말을 꺼내서. 왜? ……왜?
“……아무튼 니 탓은 아니야. 화도 나지 않았어. 그냥 좀 거슬린 정도지.”
“그랬구나.”
정원이는 그런 나를 보며 아까와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조금은 음울하고, 조금은 답답하고, 조금은 화가 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구나, 너는 아무것도 납득하지 않았구나. 내 대답을 듣고는 그 어떠한 의문도 해결되지 않았구나.
“……그래, 그런 거구나.”
그랬구나. 나는 닭꼬치를 들어 입에 베어 문다. 닭꼬치는 조금은 식어있었고, 그래서인지 조금은 맛이 덜하게 느껴졌다. 그 때부터 정원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툭툭 던지기 시작했다.
“나 여자속옷 입게 됐어.”
“뭐?”
“저번에 생리했잖아. 근데 꼽아 넣는 생리대는 도저히 못 끼겠더라고.”
“어……. 어.”
너무도 생생한 여성의 대화였다. 나는 이런 대화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될지 몰랐다. 그래서 어색하게 맞장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정원이는 그런 나를 보며 정말 당연한 정보를 전달하듯이 말을 던져댔다.
“처음엔 그래도 안 입겠다고 떼써봤는데, 그랬더니 정하가 기저귀 찰 거면 그래도 된다 하더라고.”
“기저귀?”
“어. 성인용 기저귀. 안 그러면 피 줄줄 흘리면서 다닐 거냐고 그러더라? 그럴 순 없지, 그래. 다 큰 성인이나 돼서 그럴 순 없지.”
내가 마침내 맞장구도 못치고 멍하게 술이나 들이켰지만 정원이의 넋두리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던 말일까? 그렇다면 내가 최적의 상대라는 생각은 어렴풋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술이나 마시면서 들어주기로 했다. 정원이의 태도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정원이는 말하고 나는 듣는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날개형을 쓰려는데 이게 남자용 트렁크로는 무리더라고. 그래서 여자 팬티를 입게 됐지.
그리고 오늘 잠시 자리 뜬 것도 생리 때문이었어. 정하가 뭔가 느낌이 오면 자기한테 눈짓을 주라고 했거든.
이야, 이게 말이야. 생각보다 좆같더라고. 아, 니 친구 성규였나? 걔한테도 좀 미안하네. 이상하게 짜증이 나. 지금 말이야.
성규도 니 생각하고 그런 거 알고 있었으니까 참을 만 했는데 못 참겠더라. 욱하는 게 올라오잖아.
이게 막 아픈 건 아닌데 아랫배 쪽인가? 하여간에 여기쯤에서 자궁이 계속 어필을 해오거든. 너는 아프다. 너는 여자다. 너는 이제 아이를 만들 수 있다. 근데 그게……. 하아 시발……. 그래. 그래. 그냥.“
정원이는 그러고는 넋두리를 한참 해댔다. 생리 주기를 표시하게 되었다는 점. 생리통이 개 좆같다는 점. 괜히 브래지어도 차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점. 그런 말을 한참을 하더니 나를 음울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야, 강휘야. 내가 이래도 다정원이 맞냐?”
“…….”
“그래, 그래도 난 다정원이야.”
내가 대답을 못했음에도 정원이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인다. 정원이는 퍼즐 조각을 찾았다. 자신이 있다고 착각하던 남자라는 퍼즐조각을 여자라는 퍼즐 조각으로 바꾸어서 퍼즐을 완성했다. 올바른 형태였으며, 이전의 다정원과는 다른 형태로 완성 된 퍼즐이었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바라보며 반쯤은 대단하다는 생각과 반쯤은 아쉬운 감정에 빠져들었다.
나는 술을 한잔 더 들이켰다. 그러자 방광에서 신호가 오는 것이 느껴졌다. 오줌이 마려워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다. 하필이면 그 때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이 툭하니 떨어졌다. 정원이가 그것을 주워주려고 고개를 숙였다.
“……야 이거 뭐야?”
“어?”
싸늘한 목소리에 등을 돌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본다. 익숙하지 않은 손바닥만한 박스가 보인……아니잠깐만이건내가그게아니라아니그게누나가넣은건데그게내가사용할라고한게아니라진짜아니그럴생각하나도없었어진짜아닌데선생님제가그럴의도가아니라아니진짜아으아아아아아니야아니야일단아니야일단아니니까니가생각하는그런거아니니까그런눈으로보지마아니그냥이쪽보지마제발잠시만혼자내버려둬제발제가이렇게간절하게부탁드립니다제발
나는 허둥대며 정원이의 손에 든 그것을 뺏으려고 한다. 하지만 정원이가 팔을 땡겨서 잡을 수 없었다. 정원이는 그 박스를 천천히 열어본다. 오 마이 갓. 제발 차라리 나를 여기서 죽여줘.
“흠흠. 나도 옛날에 해볼 기회가 없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생겼구나.”
정원이가 고무를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가지고 논다. 나는 다시 자리에 쪼그려 앉아가지고는 고개를 숙인다. 돌아버리겠다. 세상이 밉다. 누나가 밉다. 아 그래, 정말로 누나가 밉다. 정원이는 그렇게 그것을 가지고 놀더니 상에 내려놓고는 내 고개를 두 손으로 들어올린다.
“우리 강휘가 왜 이걸 들고 왔을까?”
“아……아니, 그, 그게 아니라, 아니 진짜. 진짜 아닌데. 아니 그게.”
“풉.”
정원이가 웃는다. 그리고는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한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다시 숙이고는 누님을 하늘에 계시게 걸고 올린다. 개 같은, 정말이지 개 같은 경우! 정원이는 나를 유혹하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비음을 냈다.
“강휘야~. 아니지. 강휘오빠~. 오늘 무슨 생각 하고 온 고에용?”
“그른그으느르그…….”
“무순 기대를 한껏 안고 온 고에용?”
“스블…….”
그러자 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던 정원이가 다시 박장대소를 한다. 나는 제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고개를 숙이고 부들거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누나를 죽이리라.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죽일 것이다. 누나 개새끼. 인생에 도움 안 되는 년!
“아, 맘껏 웃었으니 용서해준다.”
“감사합니다.”
“근데 이거 콘돔 잠깐만 좀 들고 있음 안 돼?”
“왜요?”
“사진 좀 찍게.”
“뒤진다. 진짜 시발련아.”
“크흐흐흐흑.”
정원이는 쳐 쪼개다가 참다가를 반복했다. 다행인 것은 저 녀석도 딱히 내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들고 온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는 점이겠지. 단순하게 나를 놀려먹는 데만 사용했다. 아마도 자신이 남자고, 그것을 아는 나는 전혀 자신에게 그럴 거라는 생각을 안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뭐 정답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정원이가 갑자기 톤을 낮추어 목소리를 깔고는 물었다.
“야 한강휘. 너는 나한테 반하지 않을 거지?”
“시발. 오늘 누나새끼 하나 때문에 별 개 같은 소릴 다 듣네. 자의식 과잉이냐?”
정원이는 그 말을 듣고서야 겨우 다시 후련하게 웃었다. 나는 한참을 떠드느라 식어버린 오뎅 나베의 불을 다시 붙인다. 그 사이에 원수라도 된 마냥 베이컨말이를 씹는다. 토마토의 과육과 베이컨의 기름이 섞여 입안에 풍부하게 맴돈다. 그래도 나는 그 와중에 웃을 수가 없었다. 그저 술을 한 잔씩 넘길 뿐이었다.
정원이도 나도 그 이후로는 두런두런 떠들기나 할 뿐이었다. 이 새끼 저 새끼하며, 쓸 때 없이 웃고는 별 의미도 없는 말을 나누고 있었다. 분하지만 누나새끼를 돌아가서 죽여 버리려던 생각을 조금은 완화해서 자고 있는 누나 등에 얼음을 한 주먹 집어넣는 걸로 용서해주도록 하자. 그 정도로는 고마웠다.[작품후기]부족한 글 좋게 봐주시고 선작, 추천, 코멘트 남겨주시는 분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