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5화 (15/138)

15회

chapter1정원이의 손을 잡자 정원이가 나를 돌아본다. 순간적으로 손바닥이 날아오나 했는데 뺨 바로 앞에서 멈췄다. 조금 놀라 있었는데 때리려던 손이 슬그머니 내려갔다. 정원이는 당황한 듯 하다가 나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뒤에 함부로 서지 마라. 뒤에서 손까지 잡으니까 후려갈길 뻔 했잖아.”

“니가 무슨 고르고냐…….”

“오냐. 근데 왜 쫓아오고 지랄이야? 거기 있지.”

“야, 그럼 너 혼자 돌아가게 내비 둘까?”

정원이는 아무 말 없이 내 손만 바라보다가 내 손에 잡힌 팔을 빼냈다.

“언제까지 잡고 있을 거야.”

“아니 싸닥션을 날릴라길래 놀라서 그렇지.”

서로 어색하게 바라만 본다. 공기가 묘하게 어색해지는 것을 느꼈다. 별 생각이 든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정원이에게 다시 카페로 돌아가자고 할까? 우문이었다. 당연히 정원이는 싫다고 할 것이었다. 그 정도로 머리가 식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카톡으로 [정원이 찾았음. 알아서 놀아.] 라고 정하에게 쳐놓고선 정원이에게 말했다.

“피시방이나 가자.”

“오, 그러네. 이렇게 되고 나서 이래저래 휘둘리다 보니 피시방을 한 번 못 갔네.”

“그럼 너 손 굳어서 초보된 거 아니냐?”

“어허, 실버놈아. 플레가 한두달 쉰다고 실버가 되겠느냐.”

“지랄.”

우리는 그제서야 서로 킥킥대며 피시방으로 향했다. 긴장감이 완화된다. 평소 우리의 대화였다. 우리의 거리는 이 정도가 딱 좋았다. 생각해보니 요새 정원이와 이렇게 평범하게 놀았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침 잘 됐다고 생각이 들어 피시방으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정원이가 옆에서 걷다가 내 뒤로 숨었다.

“왜? 뭐야?”

“앞에 나 회사 사람.”

정원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저번에 정원이 병가를 내기 위해 회사에 들렀을 때 봤던 여자가 보였다. 이름이, 그러니까……. 그녀가 나를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강휘 씨.”

“네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기억 못하시네요. 이연아에요.”

“아니, 진짜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렇다면 아마도는 빼시는 게 어때요?”

나는 뒤통수를 긁으며 난처한 듯이 웃었다. 난 나와 별로 관계가 깊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영 외우지 못했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이연아씨는 나를 보더니 내 뒤에 숨은 정원이를 보고 물었다.

“뒤에 계신 분은 여자친구분이세요?”

“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원이가 내 등 뒤에서 빼꼼 나왔다. 마음을 다잡았는지 진정이 좀 된 모양이었다. 옆에서 바라 보는 정원이의 얼굴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연아씨. 접니다, 다정원 계장.”

“……네?”

이연아씨가 안 지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연아씨는 눈을 천천히 껌뻑이더니 나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한강휘씨. 정원 선배랑 그렇게 붙어 다니시더니 여자친구 이름도 다정원이에요?”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이연아씨와 데칼코마니처럼 얼굴이 찌푸려진다. 아무리 그래도 평가가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내 평가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이 언쟁이 굉장히 길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국 정원이를 보고 말했다.

“야, 피시방은 텄다. 이연아씨 데리고 해명이나 해야겠는데?”

“미안. 귀찮게 됐네.”

우리 둘이서 숙덕이고 있자 이연아씨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앞에 세워두고 장난이라도 치나 생각하고 있었겠지. 정원이가 천천히 설명해도 됐지만 어차피 이연아씨는 정원이가 자신이 아는 다정원 선배임을 믿지 않고 있었다. 즉 차라리 내가 그녀에게 어디로 가자고 할 만큼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제가 커피 살 테니 카페나 가시죠.”

“딱히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여자친구분도 옆에 있으신데 방해하기 싫어요.”

“아니, 저랑 얘가 하는 설명이라도 듣고 가시죠.”

“그리고 나 얘 여자친구 아니야. 나 니가 아는 그 다정원이라니까?”

이연아씨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이연아씨는 결국 나와 정원이를 한 번씩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약속이 있어서 나온 건 아니었으니까 잠시 장난에 어울려드리죠. 그럼 저쪽 카페로 갈까요?”

아, 저쪽은 방금 우리가 나온 그 카페였다. 다른 모든 카페가 되더라도 저 곳만큼은 안 된다. 나는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뇨. 반대쪽으로 가죠. 제가 홍차를 잘하는 곳을 알아서.”

“뭐 그러세요.”

오랜만에 정원이랑 피시방에서 맘 편하게 놀까했더니 이번엔 직장동료다. 정원이가 몸이 바뀌고 나서는 이상하게 나까지 귀찮은 일에 빠져드는 것 같다. 위가 욱신거린다. 정원이는 이렇게 한 명 한 명씩 모두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인 걸까? 그 때마다 내가 도와야 한다면 이 욱신거리는 위 통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이번 일은 그나마 해명을 정원이가 하겠지 라고 생각이 들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

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10분전에 있었습니다. 이연아씨가 이렇게 정원이의 말을 안 믿고 정원이가 이렇게 말을 못할 줄이야. 사실 정원이가 정말 설명을 잘해봐야 이연아씨가 납득을 하긴 힘들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정원이가 설명을 못하니까 이연아씨의 반응은 합당했다.

“아니 그러니까 연아씨가 알고 있는 다정원 계장이 나 맞아.”

“정원 선배는 남자인데요.”

“그러니까 나도 눈떠보니 갑자기 변해서 문제라고…….”

이연아씨가 정원이를 굉장히 싸늘하게 바라본다. 뭐 저게 당연한 반응이다. 이 세계에선 적어도 공론화된 TS바이러스 같은 것은 없고, 당연히 성별이 바뀐 것도 내가 알기로 정원이가 유일했다. 믿어달라고 말해봐야 별 수가 없겠지. 정원이는 아직 사진이 바뀌지 않은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보여줬지만 이연아씨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아니 한결 같진 않았다. 이번엔 나에게 화를 냈으니까. 위가 쓰려왔다.

“한강휘씨. 이런 재미없는 장난치려고 정원 선배 신분증까지 빼왔어요? 이거 범죄에요.”

하아, 정말이지 나에 대한 평가가 쓸 때 없이 박하다. 그래도 내가 별 말 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정원이의 모습을 보고 정원이를 아는 누구라도 정원이를 떠올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자인데다가 덩치도 크고 성질도 사나워보였던 개돼지 다정원이 지금은 가만히 있으면 보호욕구를 일으킬 만큼 조그마하고 세미롱헤어의 미소녀라. 내가 납득한 게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혹시 둘만 알만한 사실 없습니까?”

“글쎄다. 나 원래 연아씨 생일도 기억 안 나고.”

“그거야 당연히 모르는 게 당연하죠.”

그 정도는 기억해 놔라. 그래도 직속 후배 생일 정도는 챙기기도 하지 않냐?

“그럼 첫 만남에서 말했던 건?”

“그런 걸 어떻게 기억해.”

“……그럼 이연아씨랑 있었던 사적인 일이라던가.”

“완전한 업무관계였는데.”

“……별 거 없었어요.”

딱히 더 이상 떠오르는 게 없다. 나는 말없이 정원이를 째려봤다. 니가 모르면 다냐? 내가 눈쌀을 찌푸리고 있자 정원이는 시선을 피하고 도리어 이연아씨가 나에게 눈쌀을 찌푸린다.

“장난 그만하세요. 안 그래도 정원 선배 병원에 있다고 해서 걱정되는데 병문안도 막으셨잖아요. 그런데 이런 장난까지 하니까 좀 짜증나네요.”

“아니, 그거야 얘가 이 꼴이 됐는데 제가 어떻게 합니까, 그럼.”

“저 슬슬 화나는데요?”

“제가 도리어 화내고 싶습니다만.”

나는 이 풀리지 않는 오해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해나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아니 그런데 굳이 이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월요일 돼서 회사 나가면 어떻게든 되는 게 아닐까? 별로 내 일도 아닌데다가 이연아씨가 친한 사람도 아닌데 납득을 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갑자기 귀찮아진다. 당장 정원이를 보아하니 별 방법이 있어보이지도 않고.

아, 그러고 보니 이연타 카페에 이연타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대체 왜 나는 홍차가 유명한 집에서 커피를 시킨 거지? 커피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연속으로 두 잔이나 마시려니 속이 안 좋아진다. 속이 안 좋은 이유가 아메리카노 두 잔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사실 나는 오늘 답지 않은 일을 너무 많이 했다. 걸치고 있는 옷이 굉장히 고깝게 여겨진다. 이 자리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짜증이나 듣고 있는 사실에 고함을 치고 싶어진다.

물론 나는 정원이처럼 대인능력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얼마든지 사람들에게 맞춰줄 수 있는 가면을 쓸 수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하다는 영역이지 결코 쉽다거나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뭐 어차피 안 믿어주실 거면 그러십쇼.”

“네?”

“어? 야. 왜 그래 너.”

이연아씨에게서 짜증이 느껴진다. 정원이에게선 당황한 기색이 느껴진다. 나는 그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나 역시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나는 검지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며 말했다.

“제가 이 계집애가 정원이라는 걸 이연아씨한테 어떻게 납득시키겠습니까? 정원이가 할 수 있나 도와도 줘보고 기다려도 줘봤지만 납득 못하시는 것 같고. 어차피 이연아씨도 그냥 믿고 싶지 않은 것 같고. 그리고 또…….”

이연아씨와 정원이의 시선이 내게 모인다. 나는 기계적으로 짜증과 짜증을 꿰고 잇는다.

“정원이가 여자가 된 게 대체 이연아씨랑 무슨 상관입니까?”

이연아씨의 눈에서 짜증을 넘어선 분노가 느껴진다. 아 그래, 사실 나는 네가 정원이를 짝사랑하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예전에 정원이가 네 신호를 눈치 못 채고 헛짓 할 때마다 만나러 가라고 도와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옛 말 아니겠는가? 어차피 이연아씨는 여자인 다정원에게 연애감정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고, 정원이도 그럴 수 있을지 몰랐다.

사실 네가 믿고 싶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 그런 거 아니겠는가? 정원이를 짝사랑하던 이연아에게 있어서 갑자기 다정원이 여자가 됐다고 어떻게 납득을 시키겠는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결국 월요일에 정원이가 사장을 납득 시키고, 이연아씨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남지 않았겠지. 왜 이런 간단한 일을 괜히 해명하겠다고 고생을 한 걸까? 나는 정원이에게 물었다.

“야. 떠드느라 시간도 적당히 된 거 같은데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갈래?”

“아니, 야, 너…….”

“이봐요, 한강휘씨!”

의도적으로 이연아씨를 무시한다. 소리를 지른다고 대답을 할 것 같았으면 애시당초 무시를 하지 않았겠지.

“아니 좀 이른가? 그래도 뭐 저녁도 안주로 때울 겸 가자. 아님 피시방에서 꼭 하고 싶은 게임 있냐?”

“한강휘씨!”

“에이, 좀 어울려주라. 나도 이렇게까지 세팅하고 그냥 집에 바로 들어가기는 싫어서 그래.”

“야, 강휘야. 강휘야?”

“왜?”

“강휘야, 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난거야?”

정원이가 내 손을 살며시 잡고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친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화가 났겠어? 화 안 났어. 술 마시러 가는데 즐겁지.”

정원이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참는다. 요즘 따라 이런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다. 원래는 이렇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참는 친구가 아니었는데. 그 때 이연아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한강휘씨. 오늘 장난은 정말 기분 나빴어요. 나중에 사과하세요.”

“예? 제가 왜요?”

“……후우.”

이연아씨는 그 한숨을 마지막으로 카페를 나갔다. 그 한숨엔 온갖 쌍욕들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연아씨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다정원이 여자가 된 사실을 납득했는지 안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사랑이냐. 네 눈앞에 있는 진실에서 고개를 돌리면서 무슨 새로운 관계성을 정립하려 하느냐.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진실이라고 해도 그것을 외면하고서야 단순한 기만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이연아씨, 이연아씨. 딱히 당신이 보인 반응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이렇게 가녀린 여자아이가 된 다정원을 보고 이전의 다정원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본인이 설명하는데도 떠올리지 못하는 시점에서 다정원과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사실 이연아씨의 반응이 당연했다. 누가 덩치 큰 남자가 이렇게 작은 여자애가 됐다고 하면 믿겠는가. 내가 다정원에게 느꼈던 거리감, 다정원에게 느꼈던 익숙함, 그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 여자애를 다정원이라고 여기는 내가 이상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연아씨, 당신이 진정으로 다정원을 좋아했다면 당신만큼은 알아 챘어야 했다.

그래, 나는 딱히 화가 난 게 아니다. 그저 이연아씨 당신에게 조금은 아쉽고 조금은 실망했을 뿐이다. 아 물론 마지막까지 내 뺨을 후려갈기지 않은 인내심만큼은 높게 평가할 의향이 있다.

“응, 전혀 화난 게 아니야.”

나는 아무 말 없는 정원이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정원이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정원이는 이번에도 말을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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