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chapter1“그러니까 정하년 남자 소개 때문에 우리도 따라가야 된다?”
“네.”
“우리도 데이트 하듯이 더블데이트 하는 게 조건이다?”
“네.”
“하아, 개시발.”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었던 때가. 그 와중에 정하가 옆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게 더욱 좆같다. 아니 저 년도 공범인데 왜 나만 이렇게 혼자서 혼나고 있어야 하는가. 정하는 사진을 찍으면서 신나게 웃고 있었다.
“아 어때 언니. 나 돕는다 생각하고 데이트 한 번만 하자.”
“아 오빠라고 부르라고 좀.”
“다정원이라고 부를까? 언니라고 부를까?”
“아 쫌 진짜.”
슬슬 팔을 내려도 되나 싶었는데 귀신같이 정원이가 노려봤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천장을 바라봤다. 아직 팔을 내리지 않았으니 세이프다. 그러자 정원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그래 내려라 내려. 니가 뭔 잘못이 있겠냐.”
“네.”
나는 팔을 내리고 일어섰다. 팔은 괜찮은 데 다리가 저려서 휘청할 뻔 했다.
“근데 나 간단 소린 안했다.”
“아 왜 언니이!”
“아, 이 미친년 진짜. 차라리 다정원이라고 불러 개년아.”
나는 정원이에게 가서 저린 다리로 다시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야, 이거 정하랑 성규 둘 다 이미 하기로 된 거라 어쩔 수 없어. 어차피 너 나랑 자주 놀러 다니고 그랬잖냐. 말만 더블데이트야 말만. 실제로 정하랑 성규 이어줄라는 거고. 우린 그냥 들러리야, 들러리!”
“하아, 지랄 염병.”
“아 제발! 형님! 부탁합니다! 가운데 낀 제가 뭐가 됩니까! 제발!”
“하아…….”
정원이가 고민하는 게 보인다. 정원이는 내가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말하면 그래도 거의 다 들어주곤 했다. 곧 죽어도 자존심에 뒤질 남자다움의 일면이었다. 그러한 면이 아직도 남아있다면 정원이가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 비겁한 내 자신이 있었다. 곧 정원이가 눈을 뜨면서 선언했다.
“야. 다정하. 이걸로 이번에 아버지한테 야부리 털어준 빚 제외다.”
“아 물론이지!”
“그리고 한강휘 넌 시발, 빚 하나 추가다.”
“예! 형님!”
정원이는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자 못 이긴 척을 하면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자신이 형님이라고 불린 게 마지막이 언젠지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정원이를 못 본 척하며 말했다.
“근데 시간 언제 되냐? 얘도 일 다녀서 시간 맞춰야 될 거 같은데.”
“어~, 나는 이번 주는 대충 다 되긴 하는데.”
“나는 주말이면 돼.”
“주말이라.”
정하는 아마 오늘만 휴가를 낸 모양이었다. 하긴 정원이야 아프다고 장기휴가를 낸 거지만 정하는 그렇게까지 휴가를 낼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럼 주말에 본다고 생각해. 정확한 날짜나 시간은 카톡으로 찍을게.”
“엉.”
***
[어. 나도 주말은 언제든지 되. 언제 볼래?]
“어 그러냐? 그럼 어, 토요일 12시?”
[알았어. 장소는 어디로?]
“홍대 정도면 되지 싶다.”
성규 역시 주말이 편하다고 했다. 역시 직장인들이라 주중은 시간을 잡기가 힘든 거겠지. 나는 카톡으로 토요일 홍대를 적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긴 했다. 아마 정하가 없었다면 나나 정원이나 크게 싸웠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물론 오늘 일부러 묻어둔 감정은 나중에 태풍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었다. 의도적으로 나는 억지로 정원이에게 그가 여성이 된 것을 납득 시킨 셈이었다. 본인이 스스로 천천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형님이라고 불렀을 때 웃음을 참지 못하던 정원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나중에 술이나 한 잔 하면서 그 때 그 자식들에 대한 감정도 정원이에게 토해내게 하자. 그리고 그 녀석들과의 일도 잘 일단락 시키도록 하자. 나중에. 언젠가는. 뒤로 미루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에. 정원이가 너무 큰 상처를 입을 지도 모르기에. 그저 나는 망설이면서, 그런 생각들을 하며 눈을 감았다.
***
토요일이다. 첫 데이트다. 왜 내가 일생의 첫 데이트를 다정원이랑 해야 되지? 그래도 떨리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어째서인지 누나가 입혀놓은 흰색 와이셔츠와 베이지 톤의 데님바지가 어색하다. 몸에 안 맞는 것을 걸친 기분이 든다. 이른 아침 나와서 미용실에서 세팅한 머리도 어색함을 더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제대로 안 꾸미고 나오면 얼굴 보자마자 돌아 가버린다고 한 정하의 메세지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무엇보다도 어색한 것은 누나가 내 데님바지 뒷주머니에 평생 쓸 일 없는 고무가 담긴 작은 상자를 넣어놨다는 것이다. 누나는 나름대로 센스를 발휘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돌아가자마자 잔소리를 할 구석이 생겼다. 이걸 누구에게든 들켰다가는 오늘 수치사 해버리고 말 것이다.
“어, 오래 기다렸어?”
“아니 뭐, 아직 약속시간 전인데 뭐.”
얼마 되지 않아 곧 성규가 도착했다. 성규는 의외로 차려입지 않고 맨투맨 티에 청 반바지에를 입고 스니커즈를 신고 왔다. 오히려 평소보다 굉장히 대충 차려 입은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트에 입고 나올 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울리긴 했다. 성규가 말했다.
“오올, 잘 차려입고 다닐 수 있었네.”
“……아니 근데 시발 너는 왜 그러고 나왔냐?”
성규가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제대로 차려 입고 나오면 둘 다 반해버릴 수도 있잖아.”
“아니, 시발 미쳤나 이게.”
“아, 걱정하지 마. 나는 소개 받은 애만 집중할 테니까.”
“아니 시발, 그런 거 아니라고.”
“예~예.”
성규의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너무 답답하다. 정원이가 원래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면 바로 풀 수 있는 문제겠지만, 성규랑 정원이는 오늘 처음 볼 사이기도 하고, 정원이가 먼저 밝힐 리도 없었다. 나 역시 정원이가 밝히지 않는다면 먼저 밝힐 생각이 없다. 그래서 더욱 답답하다.
“아 맞다. 홍대로 부른 거 너니까 데이트 코스도 니가 짰지?”
“……뭐?”
“뭐야, 안 짰어? 난 니가 장소 정하길래 다 짜놓은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낭패였다. 음식점 정도야 몇 개 알지만 데이트 코스따위 생각해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 지금이라도 니가 짜면?”
“하하, 왠지 니가 짜는 편이 재밌을 것 같으니까 안 그럴래.”
“하, 시발.”
핸드폰을 켜보고 ‘홍대 데이트 코스’를 검색한다. 스크롤로 대충 내리면서 빠르게 확인해본다. 카페, 볼링장, 서점, 바, 로드샵, 방탈출 카페, 공연, 어 뭐 마사지? 미친 별 데이트가 다 있네. 아무래도 처음 만나는 거니까 대화를 할 공간이 필요하니 카페는 필수일 것 같고, 어차피 다정원이니까 마지막엔 술이나 마시면 되겠지. 먹기만 하면 좀 그러니까 어, 방탈출 카페라도 갈까? 공연은 별로 보고 싶지 않고.
“야, 도착하면 밥 먹고 방탈출 카페, 카페, 저녁 먹고 바 어떠냐?”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하, 시발 진짜. 하나를 안 도와주네.”
어, 음식점도 어디로 간다. 솔직히 정원이와 둘이었으면 국밥이니 고기니 이런 거나 골랐을 것이다. 그 녀석 서양음식은 니글거린다고 별로 안 좋아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랑 정원이는 어디까지나 들러리고 기본은 정하와 성규의 데이트니까. 아니 그럼 데이트 코스 진짜로 성규가 짜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성규에게 역시 니가 데이트 코스를 짜라고 하려고 할 때 정원이와 정하가 도착했다.
“늦어서 미안~! 언니 세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 안녕하세요! 다정하에요!”
“안녕하세요. 최성규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정하와 정원이가 나타났다. 정하는 뭐, 예쁘게 차려입고 나왔는데 정원이가 스키니진에 흰티차림이었다. 아무리 나오기 싫다고 해도 집 안에 있는 그대로 입고 나오기냐. 괜히 차려입고 나온 나만 민망한 꼴이 된 격이다. 내가 불만스럽게 쳐다보고 있자 성규가 옆구리를 쿡 찌른다.
“윽.”
“정하씨 오늘 코디 예쁘네요. 센스가 좋으신데요?”
“그쵸? 제 일생에 역작이에요. 호호. 그리고 정하씨라고 부르지 마세요. 제가 연한데.”
“아 그래? 그럼 정하라고 부를게.”
“네, 오빠~.”
나는 정신을 차리고 정원이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만 차려입고 나온 게 억울해서 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평소처럼 입고 나왔을 터였다. 물론 정원이가 여자 옷을 입는 장면도 별로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 되지만 적어도 미용실이라도 가서 머리라도 하고 오지. 망할 놈.
“아무리 그래도 그러고 오냐.”
“뭐라는 거야, 이 멍청아. 그럼 치마입고 샤라라라하면서 오랴?”
정원이도 내 옆구리를 팔로 찍었다. 성규랑은 달리 꽤나 무게감이 실려 있는 공격이었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참았다.
“윽!”
“옘병 ”
“아니, 비꼰 게 아니라, 정말 그…… 시발 됐다. 오냐! 잘 어울린다고.”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정원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가 잘못한 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나올 거면 그렇게 나온다고 말이라도 하던가. 나라도 좀 덜 차려입고 나오게. 나는 그런 마음으로 정하를 노려봤다. 정하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야, 그러고 보니 이거 어울린다고 한 걸 내가 칭찬이라고 들어야 되는 거 맞냐?”
“어, 안 어울린다는 거 보다야 낫지 않나?”
“음, 그런가.”
정원이는 조금은 기쁜 듯, 조금은 우울한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감정이 모순되었을 지라도 분명 정원이는 그 때 그래 보였다.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원이는 미소녀로 바뀌었다. 미소녀가 무엇을 입든 예뻐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본인도 그것에 대해서 칭찬으로 받아들일지를 고민하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그 때 성규랑 한참 대화를 하던 정하가 나에게 와서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 언니 꾸밀라고 했더니 언니가 그럼 죽어도 안 나가겠다잖아.”
“아니, 그럼 나한테도 말해주던가.”
“에이, 언제 한 번 이렇게 차려입고 나와. 걍 그러려니 해.”
나는 부들부들 댔고 정하는 그런 나를 놀려댔다. 정원이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성규는 그런 우리를 보다가 박수를 한 번 쳤다.
짝
“자 그럼, 여기서 서서 떠들고 있기도 뭐하니 일단은 밥이나 먹으러 가죠. 제가 배가 고파서.”
“아, 그래요. 그럼 우리 어디로 가죠?”
“어디로 가냐, 강휘야?”
그 말을 듣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아까 찾은 곳 중에서 여러 곳이 있었지만, 점심은 다소 가볍게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골라 놓은 곳이 있었다. 평소 자주 다니고 나름대로 맛집인 곳이었다.
“어. 일단 점심은 가볍게 일식 어때?”
“일식?”
“어, 뭐 일식 이래봐야 규동 같은 거긴 한데.”
시선이 아프다. 생각한 게 고작 그 정도냐라는 표정이다. 아니, 이걸 내가 잘못했다고? 이건 무조건 나보고 정하라고 한 너희들이 나빠. 내가 데이트에 데려갈 만한 음식점을 얼마나 알겠냐.
“에휴. 강휘 오빠가 그렇지 뭐.”
“정진해라 강휘야.”
그 와중에 정원이만이 내 옆으로 다가와서 귀에 대고 살짝 속삭인다.
“나는 좋은데. 그렇게 이상한가?”
“아니, 나도 모르겠다. 난 도저히 인싸들 감성을 이해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 킥킥대며 걸어갔다. 역시 정원이랑은 이런 점이 잘 맞아서 편했다. 이런 부분은 우리 모두 변하지 않았다. 그 점을 확인하니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물론 지금은 좀 불편하니까 너무 붙지는 않아줬으면 한다. 나는 오늘 혼자 차려입고 나온 것 때문에 조금 삐졌거든. 하여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한 덕분에 오늘 하루가 너무 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