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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2화 (12/138)

12회

chapter1한참을 문 앞에서 서있었다. 늘어진 시간 끈은 돌아올 기색이 없었고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무력감과 자책감이 내 양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그저 현실이라는 파도에 떠밀려 세상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나 역시 그들에게 관심가지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나는 현실에게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었다.

문이 열렸다.

“들어와.”

정하가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 나는 홀리듯이 문고리를 잡았다가 전기라도 통한냥 소스라치며 굳었다. 내가 이 공간에 들어가도 되는 것인가. 나는 공간에게서 거절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정하는 그런 나를 보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뒤처리 다했어. 다정원 안 보고 갈 거야?”

“어, 아니.”

나는 고장 난 로봇마냥 문을 열고는 들어갔다. 발을 딛으려고 했는데 양말을 신은 채로 나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양말을 벗고 방을 들어갔다. 정원이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핏기가 없는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좋지 않은 버릇이라 고치려고 하던 것이었다. 정하가 내 손을 때렸다.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어?”

“아, 어, 미안.”

나는 손가락을 내리고는 꼼지락거렸다. 잠시라도 가만히 서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알아선 안 되는 것을 접한 것 같았다. 이 공간에서 내 자리는 어느 곳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정원이의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만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깨끗한 수건 하나를 빨았다. 수건을 짜려고 했는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조금 고생했다. 나는 그 수건으로 정원이의 얼굴에 있는 식은땀을 닦아주고는 이마에 올렸다.

정원이가 으음하고 신음소리를 내자 나는 흠칫하며 정원이에게서 떨어졌다. 이청준이 나를 봤다면 병신에 머저리라고 불렀을 것이다.

“미안.”

“뭐가.”

“정원이가 쓰러진 건 내 탓이야.”

말을 하는데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아까부터 내 주위를 맴도는 무기력증이 나를 삼키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무기력에게 실려 떠다니고 있었다. 불안이 나를 좀먹고 있었다. 내 입이 나의 의지가 아닌 누군가에게 강제로 열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내 판단이 틀렸던 거야.”

정하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정원이 머리 위에 올려둔 수건을 내 얼굴에 던졌다.

“이 빙구야, 다시 짜와! 축축하잖아!”

짜내려고 쥐어보니 그 짧은 사이에 수건에 체온이 남았음이 느껴진다. 나는 수건을 다시 빨고는 짜냈다. 방금 물이 덜 짜였다는 말을 들었기에 조금은 힘을 내야겠다고 생각하자 방금보다는 더욱 물기가 사라졌다. 내가 수건을 다시 들고 오자 정하가 말했다.

“그걸로 오빠 얼굴 좀 닦아!”

“뭐?”

정하는 짜증이 난다는 듯한 얼굴로 손거울을 가져와서 한 대 때릴 것처럼 난폭하게 내 얼굴을 비쳤다. 그곳엔 내가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내가 그저 무기력하게 있었다. 내가 표정을 바닥까지 떠낸 채로 있었다. 정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정원 안 뒤졌어. 근데 오빠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있으면 어떻게 해. 나보고 둘이나 챙기라는 거야?”

“아니, 아니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으론 부족했다. 주먹을 든다. 뺨을 갈긴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하얘졌지만 동시에 뺨이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정하를 바라봤다. 정하는 눈이 동그래진 채로 있었다. 정하에겐 미안하지만 한 번도 못 본 표정이라 그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래, 웃음이 나올 수 있게 됐다.

“웃냐? 웃어?”

“미안. 내가 미안하다.”

정하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노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원이 그 날인거야. 지도 놀래서 기절한 거고. 아 혹시 못 알아들어?”

“알아.”

“근데 왜 그렇게 사색이 되서 정신을 못 차려! 뒤질 병 걸린 거 아니잖아!”

“그래, 그렇지.”

무기력의 늪에서 발을 빼낸다. 얽매이던 사고가 돌아온다. 생각을 한다. 내 판단의 미스였나? 결과적으로 그랬다. 정원이는 자신이 여성이 된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 곳에서 정원이는 자신이 자각하지 못했을 때 여성으로써 위협을 당했다.

정하는 그것을 숨기고 천천히 정원이에게 여성성을 불어넣고 싶어 했고, 나는 정원이에게 정면으로 제시했다. 여성성을 꼭 긍정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다정원으로써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극복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현실이 정원이에게 폭거와도 같이 선언한 것이다. 너는 여자다. 홍수와도 같이 정원이를 때린 것이다. 정원이가 정신을 잃은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 현실의 폭거에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정원이를 잡아주지 못하고 나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문제는 나도 내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원이는 자신을 남자로써 여기기를 바란다. 현실은 정원이를 여자라고 부른다. 의사를 돌팔이라 소리치던 정원이가 한 쪽에서 웃는다. 하혈을 하며 하얀 얼굴로 쓰러지던 정원이가 한 쪽에서 운다. 나는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멍청하게 서있기만 할 건가? 나는 친구로써 정원이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내가 일단 태도를 확실히 해야 했다. 정하지 못한다면 정한 척이라도 해야 했다.

“뭐, 일단 별 걸 해줄게 없긴 하네.”

“그렇긴 하지…….”

“얘 깨고 나면 평소처럼 대해주고, 또……아!”

생각을 하니 천천히 여유가 돌아온다. 나는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올렸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문을 나섰다. 머리에 활력이 돌다보니 어느덧 깨달았다. 정원이에게 현실이 잔인하게 선언한 것을 조금 무게를 덜어주자. 너무도 단순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오늘 저녁은 팥밥이다.”

***

정원이가 일어난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나는 팥밥을 짓고 소고기 국을 끓였다. 반찬은 시금치를 무치고 연어를 굽는다. 요리는 예전에 잠깐 혼자 살 때 들인 취미였다. 나름대로 맛은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원이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이 돌아왔는지 나를 불렀다.

“뭐하냐.”

“보면 모르냐. 밥한다.”

“그러냐.”

그게 다였다. 정원이는 그 말을 끝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요리의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맛소금이랑 미원을 팍팍 뿌릴 텐데 나름대로 보양식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딱히 msg가 몸에 안 좋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지만 왠지 꺼려져서 넣지 않았다. 그래도 맛을 보니 썩 괜찮았다. msg를 안 넣어서 걱정한 것 치곤 괜찮은 맛이었다. 다만 정원이는 좀 더 짜게 먹는 걸 좋아하곤 했다. 소금을 조금 더 친다. 완성이다.

“밥 먹어라.”

정하가 정원이를 끌고 와서 앉혔다. 정원이는 멍한 눈으로 상을 바라보다가 이를 까득 깨문다.

“야, 한강휘.”

“어.”

“미친 새끼야, 선 넘냐?”

“뭐가.”

정원이는 상을 걷어차려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라 상을 잡았다. 다행히 음식은 튀지 않았다.

“야, 다정원 미쳤냐!”

“아 괜찮아. 릴렉스, 릴렉스. 일단 얘기 좀 하자. 앉아라, 아니 앉아주십시오, 다정원 형님.”

“하, 이 십새끼가. 하.”

정원이는 나를 노려보며 상에 앉았다.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리곤 숟가락으로 국을 떠서 마셔봤다. 응, 역시 괜찮네. 열심히 만든 것을 걷어차려고 하다니 정말이지 괘씸하다.

“안 어지럽냐?”

“뭔 개소리야 십새끼야.”

“첫 생리하면 어지러울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정원이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정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원이의 옆에 앉았다. 아까 상을 찼을 때 음식이 안 튄 건 운이 좋아서였다고 생각했다. 내가 옆자리로 가면 화가 나도 상 대신 나를 차겠지.

“야, 정원아. 이게 꼭 나쁜 일이냐?”

“뭐? 시발 그럼 내가 피 싼 걸 어화둥둥하고 즐기리? 와~ 다정원은 여자아이에요! 이제 아이를 임신할 수 있어요! 개 시발놈아!”

정원이의 얼굴에 경멸이 가득 찬다. 나에 대한 경멸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이었다. 동시에 한 구석에 의문이 가득 찬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나는 정원이가 화를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정원이가 씩씩대던 기색이 사라지자 나는 입을 연다.

“아, 일단 너 꽐라 된 거 모텔 데려간 십새끼들은 니가 알아서 처리해. 도와달라면 도와줄 수도 있고, 뭐 솔직히 이제 니가 그 새끼들 하나하나 다 줘 패는 건 무리지.”

“……무리 아니야.”

“무리야. 그 몸으로 어떻게 이겨. 남자 땐 어떻게 1:5이겼냐?”

“……무리 아니라고.“

정원이의 목소리에 울음이 찬다. 울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한 혐오가 가득 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손가락을 튕기며 정원이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뭐, 너 남자였어도 1:5 맞장깐다 그랬으면 쫓아가서 같이 싸웠어. 그건 그렇다 치고.”

“또 뭐.”

“방금 얘기로 돌아가서 너 생리한 건 뭐 꼭 나쁜 건 아니지 않냐?”

“뭐 새끼야?”

“아니, 그러니까 화내지 말고 들어봐라 좀. 반대로 물어볼 건데 너 생리 끝까지 안했으면 어땠을 거 같냐?”

내가 물어보자 정원이는 화를 내려다가 이내 곰곰이 생각했다. 평소라면 정원이가 생각하는 것을 기다려줬겠지만 이번엔 정원이가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다소 서둘러서 말을 이었다.

“너 사람 아닐 수도 있었던 거잖아.”

“……뭐?”

“너 병원 갔을 때 완벽한 여자 몸이랬잖냐.”

“……의사 개 돌팔이 새끼.”

“야 근데 생리 안하면 대체 니 몸은 뭐냐?”

정원이는 화를 내려다가 으음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긴다. 그래, 나는 정원이의 사고를 유도했다. 생리를 한 것은 너의 남성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신체구조의 변화로 인해 생긴 당연한 일이라고.

그리고 또한 믿고 있던 녀석들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할 뻔 했던 일을 스리슬쩍 넘겼다. 물론 그 건에 대해서는 나도 굉장히 화가 났고 정원이가 여유가 생기면 다시 짚어보려고 한다.

“그런가?”

“그런 거야. 적어도 니가 생리를 안했으면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만에 하나라도 인간이 아닌 건 아닌지 고민했어야 했던 문제라고.”

“인간이 아니라니, 무슨 판타지냐.”

“지금 일어난 일은 그럼 판타지 아니냐?”

정원이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성별이 바뀌다니. 현실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판타지다. 정원이는 한동안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니 말이 맞는 거 같다. 내가 좀 초조했었네.”

“어. 나도 좀 놀라긴 했다.”

“아까 나도 니 표정 보고 더 깜짝 놀랐었다고!”

정원이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것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하게 웃었다. 정하는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주다가 말했다.

“모처럼 오빠가 밥했는데 식게 둘 거야?”

“아, 먹자 그래.”

식탁에 앉아서 맛있는 밥을 먹는다. 이것만으로도 지금까지 하던 고민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야, 근데 시발, 팥밥은 진짜. 이 개새끼 이거 진짜.”

“언니라고 해도 할 말 없네. 경사잖아.”

“경사지, 그럼. 적어도 사람새낀데, 으하하하.”

우리는 적어도 이 자리에선 웃으며 행복할 수 있다. 걱정은 내일 일로 미뤄두면서. 아!

“아 맞다. 정원아 너 나랑 데이트해야 된다.”

“아.”

“뭐, 시발?”

고비가 하나 남았었지. 설명 하지 않은 게 하나 더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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