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9화 (9/138)

9회

chapter1성규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벨을 기다리는 동안 성규는 느물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근에 이런 표정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때 정하의 얼굴이 오버랩 되며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 놀림 받겠구나.

“진짜 섭섭할 뻔 했네.”

“섭섭하게 뭐가 있냐.”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성규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성규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고, 나는 이미 성규에게 부탁한 것 때문에 마음의 빚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덫에 걸린 셈이었다.

“아니, 설마 니가 여자랑 썸이 있을 줄이야.”

“그런 거 아니다.”

나는 다소 딱딱하게 답했지만 성규는 그런 나의 반응을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나였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설명을 하지 못해 생긴 답답함이 속을 꽉 메운다.

“걔는 그래서 누군데.”

“너 소개시켜줄 여자 언니고 내 오래된 친구.”

“오래된 친구라~.”

성규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에게 물었다.

“아니, 야 그래. 너 혹시 걔가 남자들 사이에 있는 게 걱정되고 그런거야?”

“……걱정은 되는데.”

“왜?”

성규의 물음에 나는 적당한 대답을 하려다가 조금 놀랐다. 당연히 성규는 이 상황을 모르겠지만 뭔가 성규의 의도와 내 의도는 흡사했다. 나는 왜 정원이가 남자들 사이에서 술을 마시는 게 걱정되는가. 정원이가 그 친구들에게 엄한 일을 당할 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성규는 내가 정원이를 다른 남자가 채갈까봐 걱정한다는 말을 토해내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나는 이 두 견해의 차이를 성규에게 설명하고자 했다.

“그건 그냥 걔가 원래 남자한테 별로 경계심이 없어서 그래.”

“그래?”

“그래. 그래서 괜히 걱정 되는 그냥 손 많이 가는 동생 같은 그런 거야.”

“뭐 하러 걱정하는데? 걔가 경계심이 없으면 어때. 니 여자 친구도 아닌데. 남자친구 한 명 사귀는 거지.”

성규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장난도 장난이지만 성규에게서 무언가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이 상황을 모면할까 진심으로 설명을 해야 할까 고민을 했지만, 성규에게 왠지 겉치레로 넘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성규는 나한테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은 적이 있으니까.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나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게, 아까도 말했지만 오랜 친구라서 그래. 동생 같이 걱정할 수도 있지 뭐.”

성규는 내 말을 듣고 ‘오랜 친구, 동생이라.’ 라며 중얼거렸다. 그 때 벨이 울려서 성규는 잠시 자리를 일어섰다. 그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오려다가 점원과 간단한 얘기를 나누는 듯 하더니 손사래를 치고 돌아왔다.

“여자 소개 받아야 되는데 번호 따일 뻔 했네.”

“우와, 역시 최성규. 기만 피라미드의 최고봉이구만.”

“그게 뭔 소리야.”

그새 번호를 따일뻔 한 모양이었다. 사실 성규에겐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성규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택도 없었다. 성규는 커피를 가지러 가기 전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니가 너무 품 안에 넣고 굴리려는 거 아닌가?”

“뭔 소리야.”

“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니 설명하기가 좀 그런데, 음……. 좋아.”

성규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나도 걔 한 번 봐야겠다.”

“뭐?”

성규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자매라며. 더블데이트 한 번 하자. 내가 나가는 대신 너도 걔 데리고 나와.”

“걔 그런 거 안 좋아하는데.”

“동생이 나 만나는 거 분위기나 맞춰준다 하고 같이 나오면 되지.”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내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탁과 부탁이 손을 잡고 굴레를 맺어서 나를 옥죄고 있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여느 때처럼 도서관에 와서 공부를 한다. 생각해보면 요 며칠간이 이상했던 거지 사실은 이게 더 일상에 가까웠다. 다만 정원이는 이번 주까지 휴가를 냈다고 했으니, 성규와 만날 약속을 잡으려면 지금은 슬슬 연락을 보내야했다. 하지만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는다. 핸드폰에게서 도망가듯이 공부를 하지만 결국 내 신경은 왠종일 핸드폰에 가있었다. 연락을 언제 하지? 어떻게 하지? 그 생각만이 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오빠 잠시 나랑 통화 좀 해]

정하의 메세지가 온 것은 그러고 있을 때였다. 어차피 전할 말도 있었다. 성규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이참에 그것을 전하자며 나는 조용히 독서실을 나와서 정하에게 전화를 건다. 수신음이 조금 가더니 전화가 연결 됐다.

“어 정하야. 왜?”

[오빠, 진정하고 들어.]

정하의 말에서 불안한 느낌이 샘솟는다. 정하의 말투가, 어조가, 내용이 내가 예상하는 바를 고조시킨다. 설마 소설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내 자신을 다독인다. 하지만 그런 설마를 현실이 비웃으며 깨부순다.

[다정원 강간당할 뻔 했어.]

으득

눈앞이 하얘진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입 안에서 비릿한 철분 향이 난다. 나는 문득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지만 억지로 이를 깨문다. 입을 열지 않는다. 놀랄 정도로 머리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낀다. 최저한의 정말 최소한의 조치였다. 정하에게 부탁한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오빠? 오빠!]

“어? 어……. 왜?

[일단 본인은 눈치 못 챈 건지 안 채는 건지 괜찮다고 하는데, 내가 그냥 착각하는 거 일수도 있고, 그러니까, 아 전화로 말하기 힘드네.]

“말해. 천천히, 라도 좋으니까.”

내가 무슨 목소리로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말하려고 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그런 목소리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정하가 숨을 짧게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기에서 정하가 조금 고민하는 듯한 으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로 다정원은 눈치 못 챈 것 같고, 미수로 끝났으니까 일단 진정해.]

“……어.”

[아 진짜로 걱정하지 마. 내가 좀 혼내고 있어.]

“어. 그래.”

그러고 나서 정하는 어젯밤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정원은 고향친구 5명과 술을 마시러 나갔고, 술을 진탕 마시고 있었다. 정하는 9시부터 정원이한테 카톡을 보냈는데 정원이가 그게 귀찮았는지 휴대폰을 껐다고 했다.

정하가 혹시나 해서 술자리를 갔다가 정원이와 일행들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정하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정원이를 찾은 것은 모텔 앞이었다. 정원이는 정신을 잃은 채 남자들에게 업혀서 모텔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정원이의 친구라던 녀석들 중 세 명이었다.

정하는 그들에게 정원이를 보내달라고 했고 그들도 생각보다 순순히 정원이를 넘겨줬다고 한다. 물론 정하는 자신이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정원이를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하다가 우연히 그 앞을 지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원이가 뻗었으니 모텔에 데려가서 잠만 재우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정원이의 오랜 친구들이 설마 정원이를 여자로 봤겠느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원이에게 자신이 여자인 것을 인지하라고 혼을 내고 있다. 여자애가 남자들 사이에서 술을 먹고 뻗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하지만 그 모텔 앞에서 정원이를 발견했다는 것은 정원이에게 알리지 않았다. 정원이를 나름대로 배려한 조치였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냐. 정하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나는 그 모든 말을 들으면서 내가 무슨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정원이를 손대려고 했던 녀석들을 모두 매달아 놓고 패고 싶었다.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런 감정들이 의아했다. 성규의 말이 떠올랐다.

‘뭐 하러 걱정하는데? 걔가 경계심이 없으면 어때. 니 여자 친구도 아닌데. 남자친구 한 명 사귀는 거지.’

이 모든 사태가 오해일 수도 있었다. 그네들도 정원이의 친구들이 아닌가. 정원이가 뻗었으니 집까지 데려다주기 뭐해서 모텔에 데려간 것일 수도 있다. 근데 왜 세 명이나 같이 갔지? 가기에 너무 이른 시간 아니었나? 해봐야 10시정도 였을텐데, 그 때 차가 끊겼을 리도 없지 않은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난 정원이의 친구지 남자친구가 아니었다. 정원이에 대해 독점욕을 가질 필요도 없었으며, 정원이의 순결 역시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꼭 남자친구여야 걱정할 문젠가? 그냥 친구로서 덜렁거리는 친구를 뒤통수치려는 녀석들에게 화가 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화가 났다?

“엄머머머! 학생! 입술에서 피나!”

“아, 아. 네.”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보고 호들갑을 부리자 나는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내 입의 한쪽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감사한다고 전했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손수건을 나에게 주며 닦으라고 했다. 내가 닦고 있자 아주머니가 말했다.

“무슨 나쁜 일 있어?”

“예?”

“아니, 학생 지금…… 이런 말 하긴 뭐한데 일 낼 것 같은 표정 짓고 있어~.”

나는 내 감정을 깨달았다. 그래 나는 화가 났다. 나는 이미 화가 났고, 그 이유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화가 난 이유가 아닌, 화를 내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자 나는 피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 때까지 말이 없었던 정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화났어?]

“어, 아니야. 아니 진짜 아니야. 알았어. 내가 도와줄 건 없고?”

[다정원한테 이걸 말할지 말지 고민 중인데 어쩌면 좋을까?]

어려운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잠시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일단은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얘기하자. 성규 건으로 말할 것도 있고.”

[음, 알았어. 아빠가 행정상으로 처리하는 것도 내일이면 끝난댔으니까 내일 올라갈게.]

“어, 그래. 그때 보자.”

[어, 그때 봐. 다정원 걱정 심하게 하지 말고. 내가 착각한 거 일수도 있어.]

“어.”

전화를 끊고 나는 서있던 아주머니에게 손수건을 돌려드리며 정말 감사드린다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혹시 빨아서 드려야 하냐고 했더니 신경 쓰지 말라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학생!”

나는 다시 독서실로 올라오다가 화장실에 들어왔다. 거울을 바라보자 내 얼굴을 바라 볼 수 있었다. 내 얼굴은 내가 봐도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로 얼굴을 씻는다. 아직 채 사그러들지 않은 불꽃을 재우기 위해서였다. 이성의 완전한 재림이 일어난 순간부터 나는 다시 고뇌할 것이다. 나는 왜 화가 났는가. 정원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하는가. 둘이 돌아오고 나서 나는 어떻게 성규에 대한 것을 설명할 것인가…….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감정을 통해서 정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성의 완전한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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