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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5화 (5/138)

5회

chapter1“어 왔냐?”

“어 왔다.”

정원이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마치 꼬리를 흔드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는 독립문을 당당하게 행진하는 개선장군이었다. 그 정도의 일을 처리하고 왔다고 생각한다. 괜시리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회사 어떻게 됐냐?”

“잘 둘러 댔지.”

“오!”

정원이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걱정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또한 원래 당연히 본인이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유세를 부릴 생각은 없었다. 언젠간 얘도 날 도와주겠지.

나는 웃으며 자세한 사정을 설명했다. 내가 가서 너 아프다고 말했고 부장이 알았다고 하면서 병가를 일단 내주더라, 니 후배 하나가 너 병문안 오고 싶다더라, 설명이 끝나자 정원이가 말했다.

“생각보다 처리 할 일이 많겠네.”

“그렇지 뭐. 구라로 대충 둘러댄 것도 많고.”

“……뭐, 이런 모습이 되었다고 하면야 너무 뭐라고 하시진 않겠지.”

정원이는 꽤나 씁쓸하게 자조했다. 나는 그 모습을 일부러 못 본 척했다. 괜히 달래줘 봐야 정원이가 오히려 자존심을 상해 할 문제였다. 또한 앞으로 계속 감수해야 할 문제기도 했다. 나는 일부러 주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근데 너 가족들은 언제 보게?”

“뭔 가족? 니네 엄마?”

“우리 어머니를 니가 왜 보는데? 회사에 너 다쳤다고 했는데 니네 가족이랑 말 안 맞춰 놓으면 이래저래 귀찮은 거 아냐?”

정원이의 본가는 대구에 있었다. 여동생은 정원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지만 부모님은 모두 대구에 있었다. 정원이네 아버지는 꽤 높은 직위의 공무원이었다. 부모님은 근처에서 직장을 구하거나 최소한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상경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서울에 대한 동경과 어린 날의 독립심 같은 것이 섞인 결과였다.

정원이네 부모님은 그게 꽤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원이에게 부모님 얘기만 하면 꽤나 껄끄러워 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는 나는 이 녀석의 부모님의 입장에서 좋은 친구라 할 수 있었다. 정작 뵌 적은 없어서 내 존재를 알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음, 일단 회사에 휴가 일주일 넣고 생각해봐야겠다.”

“너 내 말 귓구녕으로 들은 거 맞냐?”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방금 내가 사정 설명한 건 어디로 들었는지 궁금해질 수준이었다.

“방금 내가 말했잖아. 너 일주일 병가 받았다고. 설마 진짜로 일주일 병원 신세지려고 했어?”

“아니, 아 그게 아니고. 아 맞네……. 내가 멍청했네.”

정원이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 부끄러웠는지 괜히 팔을 쓸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뭐, 일주일 동안 할 일 이래봐야 내일 병원에서 정밀검사, 부모님 뵙고 설명하기. 니 전산 상 문제 해결하기 정도 되겠네.”

“뭐 그렇지~.”

정원이는 늘어지듯이 말했다. 앞으로의 귀찮은 일을 생각하며 텐션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원이는 부모님으로부터 도망치듯이 집을 나왔었다.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반쯤은 가족과 피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몰랐다. 해결해야 할 일은 단순히 주민번호를 바꾸던가 하는 전산상 업무 뿐만은 아니었다. 나는 뒷목에 손을 대고는 말했다.

“니네 아버지한테 부탁해야 되지 않냐?”

“그렇긴 한데……. 아, 근데 어차피 나 남자일건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을까?”

“회사에도 민증 안 바꾸고 가서 그렇게 말해보던가. 저 여기 팀 계장인 다정원인데요,”

“그건 무리지.”

정원이가 침울한 기색을 보였다.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보이는 정원이에게 국가 행정상으로, 신체상으로 여자임을 인정하라는 것은 다소 가혹한 일일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니 정원이는 아직 자신이 여자라고 인정한 적이 없었다. 나는 정원이의 눈치를 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괜찮냐?”

정원이는 내 말을 듣자 침울한 기색을 던지고 핫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아 오히려 분노가 가득 찬 듯한 표정이었다. 괜한 것을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처음에 생각한 대로 섣부른 위로를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괜찮으면 어쩌게.”

“그건 그렇지.”

“그래 그런 거야.”

그래도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라서 의외로 국가 행정상 닥친 문제를 쉽게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마 주민등록증의 뒤 번호를 1에서 2로 바꾸는 것쯤은 할 수 있겠다고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다소 혼란스러운 과정은 있겠지만 설마 연구소에 데려가져서 해부당하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싶었다.

하여튼 그렇게 여자임을 병원에게, 국가에게 인증 받고나서도 정원이는 앞으로 정원이로 살 수 있을까? 나는 어렴풋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하진 않았다. 적어도 나라면 도망갈 것이다. 한강휘라는 내 이름을 바꾸고, 친척을 만나지 않고, 친구를 버리고, 혼자 살아갈 것이다. 이전까지의 ‘나’를 묻고 분향을 피웠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페르소나를 버리고 새로운 페르소나를 하나 더 만들면 되는 일이라며 자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원이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정원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다고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정원이는 정원이로써 이 땅에 두 다리를 딛고 일어설 것이라고.

그렇기에 지금 흘러나가는 말은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탁류였다. 일종의 실수였다.

“넌 다정원이지?”

정원이는 처음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곧 웃었다. 방금 전과는 다르게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들었다.

“당연히 다정원이지. 그럼 내가 너겠냐?”

“……지랄은.”

나는 안도감이 들었다. 너는 그런 편이 좋았다. 그런 점이 내게는 눈이 부셨다. 너는 그것으로 좋았다. 너가 그렇기에 성립하는 우리의 관계는 이런 것으로 족했다. 그것이 너의 나의 차이였다. 너만의 본질이었다. 나는 인정했다.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것은 나로서 충분했다.

***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리스트화했다. 순서는 자동적으로 정해졌다. 병원이 예약 잡혀있으니 병원을 우선 가야했고, 정원이네 아버지가 전산처리를 할 수 있었으니 정원이가 본가로 내려가서 부모님을 납득시켜야 했으며, 그 후에 정원이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전산처리를 하면 됐다.

그런데 첫 단추부터 잘못 꿴 느낌이었다. 정원이는 병원에 가려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병원에 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안 입어.”

정원이가 다소 밋밋하게 보이는 흰색 브래지어를 검지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더러운 것을 만지듯이 집어 올리면서 말했다. 불만 가득한 표정에 납득이 도저히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안 입어도 되는데 검사할 때 노팬티 노브라 변태로 불리게?”

“차라리 그게 낫지.”

정원이는 절대 양보는 없다는 듯이 강경하게 말했다. 나는 겨우 이런 거로 고집을 부리는 정원이에게 짜증이 날 것 같았지만 정원이에게 여자 속옷을 입는다는 것은 ‘겨우 이런 것’ 이 아닐지도 몰랐다.

이것이 자신의 남성성을 져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분명히 큰일이 맞았다. 나 역시 그것을 존중해주고 싶었으나 정밀검사를 하면서 옷을 벗었다가 입어야하는 정원이가 속옷을 입지 않고 가는 것은 누구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앞으로를 위해서 적어도 팬티는 입어줬으면 했다. 브래지어야 요새 노브라로 다니는 게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니 뭐니 하면서 안 입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참작의 여지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걸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으나 노팬티만큼은 안 됐다.

“그래. 브래지어는 입지 마. 너 존나 큰 것도 아니니까 그럴 수 있어.”

“뭐, 임마? 니가 만져봤어?”

그러면서 자신의 가슴을 두 팔로 감싸 안는다. 대체 시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자기 자신도 인정하지 않는 몸으로 무슨 자존심을 부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아마 저 녀석은 유치한 자존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아마 내가 그렇게 빵빵하면 브래지어 입던가하고 소리치면 처음 했던 대화 양상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둘 중 하나는 양보를 해야 했다.

“그래도 팬티는 좀 입어야 할 거 아니냐…….”

“시발, 그러니까 그냥 남자 팬티 입으면 되지 않냐고!”

“그게 무슨 변태새끼냐, 정말…….”

나는 정원이를 설득하려다가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야 말았다. 나는 포기와 분노와 부끄러움이 혼재되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그럼 속옷 입지 말고 병원가.”

“정말?”

“너 혼자.”

“야, 시발 이러기냐?”

“좆까. 내가 속옷도 안 입는 변태의 동행인이 되는 건 참을 수가 없다.”

“그래도 이건 여자애 속옷이잖아!”

나를 결국 고개를 홱 돌리며 정원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정원이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얼굴에 정면으로 시선을 맞춰가면서 어떻게든 같이 갈 것을 촉구했으나 나 역시 이것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속옷도 입지 않은 여자애를 데리고 정밀검사를 시키는 동안 간호사나 의사가 나를 보는 시선을 감수해 내는 것은 나에겐 너무도 허들이 높은 일이었다.

웃기게도 정원이가 나를 역으로 설득을 하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나는 완고했다. 내가 지금 정원이의 사정이 딱하다고 생각하여 친구로써 모든 것을 도와주자고 생각했지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정원이는 한참을 나를 설득했지만 내가 저를 포기했듯 저도 나를 포기했다. 결국 정원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 혼자는 죽어도 못가.”

“야, 니 일이야 이거.”

“내 일이니까 내가 정해. 안가.”

갑작스런 편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그래, 생각해보니 어린아이들은 나를 잘 따르지 않고는 했다. 내가 편하게 대해도, 엄하게 대해도, 아이들의 말을 들어줘도, 아이들에게 상냥한 말투로 말해도 그랬다. 정원이도 마치 그런 어린아이들 같았다. 떼를 쓰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랬다. 이건 원래도 그랬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냥 대학교 때 새내기 축제한다고 생각하고 이번만 좀 입어줘. 제발. 부탁이야.”

정원이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나는 제발이라는 말도 부탁이라는 말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정원이는 내가 ‘제발’ ‘부탁’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이 최후의 통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민이라도 하는 것이리라.

“……알았어. 그럼 이번에만 여자애 팬티 입어준다. 이번 한번만이다?”

“어 그래. 앞으론 너 알아서 해라, 시발. ……브래지어는?”

나는 일말의 기대를 섞어서 물어봤다. 내 꼰대스러운 부분이 제발 부탁이니 그것도 입어줬으면 하는 갈망을 하고 있었다. 야한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르신들마냥 떽떽거리는 계통의 의미였다. 허나 정원이는 가차 없이 선언했다.

“니가 입혀줄 거면 입는다. 아다동정새끼야.”

“그래, 시발. 그냥 브라는 입지 말고 가자.”

노브라 정도는 정밀검사를 할 때 벗기 귀찮으니까 안 끼고 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자에 대해선 눈꼽만치도 모르는 남자였지만, 아무튼 간에 여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반복하여 되뇌었다. 제발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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