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chapter1초콜렛 케이크를 한 스푼 떴다. 달콤함이 입 안을 맴돈다. 내가 지금부터 할 말도 이런 달콤한 말이었다. 나는 단지 네가 원하는 말을 해줄 뿐이었다. 왜냐하면 네가 아니라,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었다.
“맛있네.”
정원이도 크게 한 스푼을 떠서 먹었다.
“응, 맛있네.”
정원이는 스러지듯 웃었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음울하게 바라본다. 사실 음울한 것은 나뿐일지도 몰랐다. 정원이는 나에게 진심을 뱉었다. 나는 날 것을 들었다. 정원이는 자신을 그냥 인간 다정원으로 여겨주길 바랐다.
사실 이렇게 정원이가 주도하는 수동적 관계성의 정립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바라는 바였다. 우리의 관계를 정원이 쪽에서 정해주길 바랐다. 그걸 바탕으로 네가 원하는 스탠스를 취할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다. 우리의 관계를 너에게만 맡겼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단지 그런 의미였다.
“나는”
“응.”
“나는……몰라 시발. 그래도 너는 다정원이야. 나는 너를 다정원이라고 할 거야.”
“응.”
“십새끼야.”
“그래 이 십새끼야.”
그제서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이 순간 진정한 우리의 관계를 정립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무언가를 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는 단지 정원이와의 관계를 부수고 싶지 않았다. 정원이는 이전과 같은 나와 다정원의 관계를 원했다.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의 관계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떤 형태의 미래가 스멀스멀 나를 잠식해왔다.
하지만 네가 원했다.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너와 무슨 형태로든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나’로부터 ‘너’를 정의하는 것을 외면했다.
너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내 생각을 들은 너는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숨겼다. 의도적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긍정했다고 여겼다. 네가 바라는 대로 내가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지금은 그것으로 족했다.
“쳐 울고 있다가 쪼개고 있어. 병신 같은 게.”
“뭐래 시발놈아. 단 거 먹어서 기분 좋아져서 그래. 시발.”
“원래 단 거 싫어했잖아.”
“몰라 시발, 초콜렛은 원래 좋아했잖아.”
“원래, 원래. 그렇지. 원래.”
나는 원래라는 단어를 혀에 넣고 굴렸다. 여전히 달콤함이 입 안에서 구르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러한 달콤한 관계를 이어나가야겠지. 그렇게 납득하는 내 자신을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
정원이를 데려다주고 들고 왔던 짐을 한 구석에 내려놨다.
“하, 존나 피곤하네.”
“엉? 아 어제 안 잤다고 했냐.”
“어 밤새서 술 쳐 마셨다.”
정원이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짓궂은 장난을 할 때 표정이다. 남자새끼일 때 존나 역겨운 표정이었는데. 그래서 저 표정 짓지 말라고 지을 때마다 뒤통수를 때리곤 했었다. 하지만 이전과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정말이지 자랑할 만한 쌍판떼기였다.
“이 새끼 나보고 꼴려서 못 잤지? 바른대로 말해 새끼야.”
“하아……. 선생님 지랄하지 마십쇼, 진짜. 개 빡칠라 그러네.”
진짜로 너보고 안 섰다. 십새끼야. 오늘 하루 들었던 망발들 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말이었다.
“아니 근데 나 존나 꼴리게 생겼는데, 진짜로. 아까 옷 살 때 탈의실에서 거울 봤는데 개쌔끈하던디.”
“그래서 섰냐?”
“이제 설 게 없는데요, 시발새끼야.”
억울함이 조금 풀렸다. 사실 내 것도 서지 않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의 문제였다. 당장도 다른 야한 것만 보면 설 것이었다. 하여튼 간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아 몰라. 어제 술 쳐 먹었는데도 너보고 안 섰어. 시발.”
“날 보긴 봤나 보네.”
정원이는 방금 전과 똑같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한 손으로 내 좆을 가리켰다. 지랄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랄은 이제 충분히 안 짠데. 간은 충분히 된 거 같은데.
“고자새끼.”
“하, 나, 시발. 내 아다 떼 줄 거 아니면 닥쳐라 진짜.”
“너 어차피 평생 못 딸 거 개 불쌍하니까 이 형님이 떼 줘야 되나?”
정원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정원이도 나를 바라본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박고 웃었다.
“에미 시발. 진짜 선 넘네.”
“에효~. 시발 치킨새끼. 얘들아 텄다 텄어!”
“뭐래, 병신이 큭큭.”
“킥킥킥.”
우리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한참을 웃었다. 정원이는 웃고 있었다. 내 페르소나는 웃고 있었다. 내 리비도도 웃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흐흐하윽하악흐흐흑.
***
집에 돌아왔다. 머리가 멍했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면서 침대에 눕자마자 골아 떨어 질 줄 알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오늘을 회상한다. 나는 생각한다.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관계한다. 대체 왜? 나는 내 생각을 관조했다.
부정한 감정들이 침전물처럼 쌓여갔다 철썩 처얼썩. 감정들이, 추억들이 내 마음을 후려치고 서로 비산한다. 비산한 감정들이 서로 뒤섞인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졌다. 침전물이 내 몸을 감싸온다. 이 침전물을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 답을 갈구하기에 나는 너무도 겁쟁이였다
“강휘야!”
“아 누나! 노크하라고! 새대가리야?”
누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발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고 말했지만 별로 먹히질 않아서 포기하는 중이다. 진짜 날 잡고 한 번 문보고 딸딸이라도 치던가 해야지 시발. 시간을 보니 아직 누나가 돌아올 시간이 아니었다. 옷도 아직 경찰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오늘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어. 순찰은?”
“순찰하다가 너 집 들어왔다 길래 범죄자 죽일라고 돌아왔다. 아니면 혹시 여자친구
생겼니?”
“뭔 개소리야 미친년아.”
“아니 너 나한테 보낸 사진에 헐벗은 애 뭔데. 제발 여자친구 생겼다고 해. 내 동생 내가 수갑 채우기 싫어.”
아. 그러고보니 정원이 사진을 보냈었다. 뭐라고 해야 되지? 뭐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이 후에 결정되는 사항에 따라 거짓말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이미 많은 거짓된 것을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별 거 아니야 시발.”
“아니 제발……. 엄마, 아빠한테 말할까? 아님 쇠고랑 찰래?”
나는 누나를 째려봤다가 누나가 눈을 맞추고 노려보자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더욱더 누나를 이길 명분도 힘도 없었다. 사실 그 사진을 보내줬을 때 나는 누나에게 뭐라고 말할지 생각해뒀어야 했다. 생각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었다.
“일이 다 끝나고 말해줄게. 아직은 나도 잘 몰라.”
누나는 나를 조금 더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범죄는 아니지?”
“절대로 아니야.”
“제발 내 손으로 니 새끼 쇠고랑 안차게 좀 해줘.”
“알았어. 누나 선배가 안 기다려?”
“니가 말 안 해도 나갈 거야!”
누나가 방을 나가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려고 했는지도 까마득해졌다. 누나 덕분에 피로가 몰려왔다. 위기를 극복한 내 뇌는 더 이상의 사고를 원하지 않았다. 오늘 나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적어도 머릿속을 채우던 수많은 파편들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위기를, 감정을, 사건을, 사람을 너무도 많이 겪었다. 나는 어느새 끈적한 피로감에 몸을 담구고 있었다. 사실 끈적한 것은 피로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철저하게 외면하기 위해 정신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오로지 패배의식에 감싸여.
***
눈을 뜨자 머리가 띵하다. 이제 슬슬 늙어가는 것이 느껴질 나이 대다. 아니 몇 살이든 잭다니엘 반병을 혼자 비우고 눈 뜬 채로 돌아다니면 피곤할 법하지. 내 나이의 문제는 아니다. 계란 한 판이면 일반 가정에서 일주일이면 다 먹을 개수다. 결단코 많지 않은 양이다. 집에서 가방을 매고 나갈 준비를 한다. 그 때 엄마가 나를 불렀다.
“어제는 뭔데 술을 그리 마시고 왔니.”
“친구 하나가 뒤늦게 군대 갔다가 휴가를 나와서.”
“그래도 공부하니까 조심 좀 하고.”
“네.”
나는 가볍게 대꾸하고 집을 나선다. 고시생은 사실 할 일이 많은 존재고 할 일이 없는 존재다. 그러고 보니 정원이는 디자인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이공계를 나온 주제에 디버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광고 디자인을 만들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진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매일 놀려댔다. 정원이는 나를 엠생이라 놀려댔다. 솔직히 내가 맨날 지는 주제의 싸움이었다.
하여튼 나는 문과인데다가 엠생 고시생이라 상관없지만 오늘은 월요일이니 정원이는 출근을 해야 했다.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정원이에게 전화를 했다. 곧 수신음이 울렸다.
[어.]
[야 너 회사는.]
[엠생인 니가 내 회사 걱정도 하고 고맙다.]
[아니 시발 지랄 말고 어케 됨.]
[아니 솔직히 개 좆 됐음. 어쩌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보니 7시 반. 내가 오늘 일찍 일어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회사에 나 몇 번 놀러갔었잖아. 내가 가서 니 몸 너무 안 좋다고 입원했다고 설명해 놓을 테니까 니 상사한테 너도 카톡이라도 보내놔.]
[카톡? 전화라도 해야 되지 않냐?]
[그 목소리로? 걍 내가 가서 설명함.]
[어, 음. 그래. 고맙다.]
전화를 끊자 마자 준비를 하고 정원이네 회사로 갔다. 정원이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부장을 만나 설명을 했다. 프론트도 정원이의 상사인 부장도 구면인데다가 마침 부장이 출근을 일찍 해서 만나는 것이 어렵진 않았다.
“아 한강휘. 자네 오랜만이구만.”
“예,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야 별 일 없지. 그래, 우리 계장이 쓰러졌다고?”
부장은 정원이를 자기 직속 후임으로 키워내고 있었다. 정원이를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래서 정말로 걱정하고 있었다.
“네. 어제 밤에 절 불렀는데 애가 상태가 안 좋아서 일단 응급실로 보내놨습니다. 오늘은 보고 드리러 온 거구요.”
“아, 우리 회사 사정인데 미안하구만.”
“뭐 제 친구 사정이기도 하죠.”
그러자 부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자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혹시 우리 회사 들어올 생각은 아직도 없나?”
“하하, 아직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서요. 이번 년에도 떨어지면 진지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예끼, 이 사람. 지금까진 진지하게 생각 안했나?”
나는 그렇게 부장을 적당히 상대해주며 정원이의 병가를 정식적으로 받았다. 나중에 병원기록이 필요하기야 하겠지만, 그건 그 때가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장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오자 익숙한 듯 낯익은 여자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도 인사를 건네자 그 여자가 나에게 물었다.
“정원씨 많이 아파요?”
이 여자가 누군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날 듯 말듯한데. 아, 정원이의 회사후임이라고 하던 여자였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린다. 어렴풋이 이름이 정원이와 비슷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연아에요.”
“아, 이연아씨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내 생각과는 달리 정원이와 비슷한 이름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지만 과연 내가 그쪽의 이름을 몰랐다는 것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나는 문득 내 태도가 부자연스럽진 않았는가를 생각하기보다 차라리 상대가 원하는 답을 줘서 내 태도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원이 아픈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부장님께 아침 보고하러 들어가려다가 들었어요.”
“음……. 방금 부장님께도 말씀 드렸지만 정원이 많이 아픕니다. 그래도 목숨이 위험한 건 아닙니다.”
“그래요? 혹시 어느 병원에 있는 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병원이라, 역시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다른 거짓말을 해야 했다. 이놈의 오리는 황금알이 아닌 쓸데없는 무정란을 낳고 있었다.
“정원이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가요……,”
나는 서둘러서 다음에 뵙겠다는 인사를 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인사를 나누며 이름을 듣자 짧은 사이에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이연아씨가 정원이 걱정이 될 법도 했다. 정원이를 짝사랑하던 것이 눈에 보이던 여자였으니까.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정원이 뿐이었다.
나는 회사에서 모든 일을 수월하게 마치고 정원이네 집을 향했다. 이렇게 어른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른이 되고나서 익숙해진 일이었다. 익숙한 것은 무엇이든지 편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이 불편했다.
오늘은 정원이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여러 가지를 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하고도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그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불편하면서도 편한 일은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었는데도, 나는 이상한 부채감을 느끼며 정원이네 집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