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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3화 (3/138)

3회

chapter1쇼핑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와중에 정원이는 혼자서 모든 짐을 들려고 했지만 결국 무거운 짐은 내가 뺏어 들었다. 정원이는 그것을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아했다.

“내 짐이야.”

“예전에도 이 정도로 짐이 많으면 도와줬었잖아.”

내가 예민하게 굴지 말라고 하자 정원이는 혀를 찼다. 입을 오물거리는 듯 했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정원이는 모든 불만 사항을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말하기로 한 듯 했다. 돌아간 이후가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도망가고 싶은, 적어도 도착하는 시간을 늦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이라도 먹고 가자.”

“짐 많아서 싫은데…….”

“야 시발 오늘 내가 같이 다녀준 게 얼마나 많은데. 입 싹 닦기냐?”

“아, 알았어. 새끼야.”

나는 파스타를 좋아했다. 정원이는 국밥을 좋아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나는 국밥을 먹자고 했다. 이유는 없었다. 딱히 내가 국밥을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딱히 내가 국밥을 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랬다.

“사 달라 그러더니 왠 국밥? 별로 안 좋아 하잖.”

“어제 밤새서 술 쳐 마셔서 속 쓰려.”

“아항.”

정원이는 비음을 섞어서 대답했다. 딱히 정원이가 의도한 바는 아니리라. 하지만 나는 비음이 울리자 찝찝한, 마치 수렁에 빠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이런 감정을 정원이는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국밥집을 대충 골라서 들어갔다.

시킨 국밥이 나오자 억지로 숟가락을 들었다. 사실 나는 평소엔 밤을 새우고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늦추고 싶어서 밥을 먹자고 한 것 이었다. 난 최대한 이 후 일어날 사태에 대해 눈을 돌리고 있었다.

정원이는 국밥을 평소처럼 한 입 가득 넣으려고 했지만, 정원이의 입은 숟가락에 담긴 음식물을 오롯이 다 담을 수 없었다. 결국 정원이는 평소보다 덜 떴지만 그것만으로도 입안이 가득 찼다. 정원이는 그 점이 조금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몸이 진짜 불편한 점 투성이야.”

“뭐 어떤 거?”

“밥도 제대로 못 먹잖아, 짜증나게. 그리고 또.”

“또 뭐?”

“시선도 낮아져서 뭔가 어지러워. 걷는 것만 해도 힘들어 시발.”

아까 내 걸음을 쫓아오지 못한 것은 단지 보폭이 좁아진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정원이의 손을 잡아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은 정원이가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곤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짐 다 넘기라고. 그냥 걷는 것도 힘들면서 왜 고집을 부려.”

“그건 다르지, 시발. 그거 니가 나 계집애 취급한 거잖아.”

정원이는 나를 노려봤다. 사실 집에 돌아갈 때까지 말하지 않으려고 한 주제였다. 내가 최대한 피하려고 했던 내용이었다. 나는 말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지금 이 문제에 대해 정리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집에 돌아가서 나눠야 할 대화였다. 그러니 이참에 나는 내 태도에 대해 변명을 해야 했다. 변명을 해? 아니, 이것은 변명이 아니라 그저 내 행동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의 이유였다.

“아까 짐 뺏을 때도 말한 거지만 분명히 예전에도 짐이 많으면 같이 들었잖아. 시발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예민? 하, 시발 예민?”

정원이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쨍그랑하고 숟가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정원이가 토해내듯이 소리쳤다.

“십새끼야, 니 눈빛이 어땠는 줄 알아 시발?”

“앉아라.”

“닥치고 들어 시발새끼야. 내 짐을 뺏었을 때 넌 시발 날 다정원으로 보지 않았어. 십새끼야. 넌 날…… 도움이 필요한 계집애로 봤어.”

“앉으라고.”

“뭘 앉아 십새끼야! 아까도 너 시발 주위 눈치보고 일부러 닥치게 했지. 지랄하지마. 지금 말할 거 있으면 다 말해 개새끼야!”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내 친구 다정원이 바라는 대로 주위를 신경 쓰던 것을 집어 치우기로 했다. 너는 그렇게 말해선 안 됐다. 나는 그저 손가락 사이로 내 친구 다정원을 바라봤다. 이상할 정도로 머리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앉아, 시발새끼야.”

“……”

“안 앉아? 시발 대화할 생각 없어? 그럼 내가 일어서지 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원이는 자리에 앉았다. 난 정원이를 내려 봤다. 정원이는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주먹을 꽉 쥔 손과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서로의 기분과 서로의 생각과 서로의 감정과 서로의 가치가 나란히 달리던 레일에서 갈라지고 있었다. 우리는 엇나가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불편한 기류가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역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과정일까. 나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가장 참을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를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했다. 이 상황에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가지마.”

정원이는 흐느끼듯 말했다. 다정원이 흐느꼈다? 머리에 쏠렸던 피가 천천히 흘러 내려가기 시작한다. 나는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 반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지마. 지금가면 너 다신 안볼 거야.”

“하아, 시발.”

난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바라보니 정원이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을분을 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순히 끓어오르는 화가 눈물로 흘러내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단순한 화가 아닌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있었다. 내가 아는 다정원은 이렇게 약한 친구가 아니었다. 좀 더 이지적이고 좀 더 자존심이 강하고 좀 더 감정을 억제할 줄 아는 친구였다. 그러면서도 화를 내야할 때 울지 않고 확실하게 낼 수 있는 친구였다.

하지만 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후회했다. 후회가 밀물처럼 쓸려왔다. 그에 대응하듯 분노가 썰물처럼 밀려났다. 파도가 흘러가고 남은 것은 비참함과 후회뿐이었다. 머리가 식자 나 역시 오늘은 너무 피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벼랑 끝에 서있는 친구를 마지막으로 떠밀어버린 것에 대한 이유는 될 수 없었다.

“미안하다.”

“으응, 아니야.”

나는 미안하다고 씹어내듯이 말했다. 정원이는 대답했지만 말을 하는 것보다 울음을 참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주위가 보였다. 나는 음식을 반도 먹지 않았다. 정원이도 겨우 몇 숟갈을 떴을 뿐이었다. 하지만 대화를 이어나가기엔 좋지 않았다. 나는 짐을 들었다. 내가 일어서자 정원이가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자리 옮기자. 여기서 계속 말하긴 좀 그렇잖아.”

“응.”

정원이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정원이네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대화를 안 할수록 정원이는 알아서 정리하고 알아서 납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 형태로. 오해가 오해를 낳고 그 오해가 새로운 오해를 낳아서 결국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혼자서 정리하고 알아서 포기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나와 싸운 친구들을 포기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앞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저기로 가자.”

“응.”

카페를 들어가서 커피를 두잔 시켰다. 디저트도 하나 시켰다. 초코렛 무스 케이크였다. 단 걸 좋아하지 않는 주제에 초콜렛은 좋아하는 정원이가 그나마 먹던 디저트였다. 정원이는 우울하게 커피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나는 정원이가 말을 고르길 기다렸다. 그냥 기다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원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원이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정원이는 그 한마디를 하고 입을 닫았다.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저 기다렸다.

“오늘따라 감정이 정리가 잘 안 돼. 내가, 내가 아니게 된 것 같아. 무서워.

내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무서워. 네가 하는 행동이 무서워. 네가 하는 행동이 딱히 내가 여자라서 하는 게 아닌 걸 알아. 아니야, 사실 아니야.

네가 하는 행동이 어제까지 너의 친구였던 내가 아닌 여자인 다정원에게 하는 행동으로 느껴져. 그게 참을 수가 없어.

뭐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너와 내 사이가 원래 너와 나의 사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뭔가 참을 수가 없어. 우리가 변하는 게, 너랑 나랑 말하는 게 달라지는 게 참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나는…….”

정원이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온몸을 부들거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그는, 정원이는 자신의 감정과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자신이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우리 안에 다시 세우기 위해, 아니, 나와의 관계를 부여잡기 위해 정원이는 자신의 감정을 나에게 날 것 그대로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아닌 너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현상을 이름 붙이고 단어화해서 그것을 가두어 왔다. 그래서 오히려 본질에서 눈을 돌리는 경향이 짙었다. 하지만 너는 달랐다. 너는 본질에 발을 딛고 있었다. 해야 할 말을 부르짖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너의 그 모습은 내겐 너무 눈이 부셨다. 나는 눈을 조금 찡그린다.

“나는 다정원이니까. 나는 그냥 다정원이란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그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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