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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2화 (2/138)

2회

chapter1정원이가 내가 앉아있는 자리로 돌아와서 옆에 앉았다. 옆을 바라보자 얼굴이 내 어깨 밑에 있었다. 나는 시선을 조금 내렸다.

“신분증 달라길래 잃어버렸다니까 나중에 다시 등록하래. 근데 너 되게 째려보면서 꼭 검사랑 결과 확인 제대로 하라 그러더라.”

“뭘 확인 하라는 건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나중에 정원이가 곤란한 상황에 닥칠 때 한 번쯤은 이방인이 되기로 했다. 그 정도는 돼야 밸런스가 맞지 않겠는가. 내 마음을 헤집은 크레바스는 딱 그만큼은 깊디 깊었다.

산부인과 쪽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자니 곧 차례가 왔다. 나는 정원이의 눈치를 봤다. 정원이도 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꼭 같이 가줘야 되냐?”

“……엉.”

“하아.”

오늘따라 한숨을 내쉴 일이 많았다. 들어가자 의사가 우리 둘을 바라보더니 알 법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딱히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렇게 될 줄 나도, 정원이도 서로 알고 있었다.

“초음파 검사 하실래요? 아니면 CT 찍어보실래요?”

“아, CT, 그리고 저…….”

정원이가 얼굴을 붉히고 말을 잇질 못하고 있었다. 이런 것쯤은 본인이 말해주었으면 했지만 원래 남자일 때도 모르는 사람에겐 말을 잘 못하는 친구였다. 방구석 마초이즘 십새끼 진짜.  오늘 한숨으로 땅을 파면 석유를 발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얘가 생리가 좀 전부터 안와서 문제가 있나 확인 좀 하려구요.”

“아, 남자친구분이랑 혹시 마지막에 하신 게…….”

“한 번도 안했어요.”

의사도 웃는 얼굴로 죄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왔다. 나도 그 인사를 받듯이 어색하게 서로 고개를 숙였다. 정원이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사는 그렇게 된 거라면 혹시 정밀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봤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정원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밀검사 날짜를 잡았다. 사실 오늘 그냥 바로 하려고 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오늘 할 수가 없었다.

“나 지금 속옷 안 입고 왔어.”

“시발. 사왔잖아.”

“나는 남잔데 그런 걸 어떻게 입어.”

그 말을 하면서 정원이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번엔 한숨조차 참았다. 한숨마저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냥 어깨를 툭 쳐줬다. 정원이도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다.”

“아니야.”

“어차피 너 아침에 술 마셨잖아. 한다고 해도 안 됐을 꺼야.”

“그렇겠지?”

“그리고 너한테 맞는 거 사러가자. 나라고 어떻게 널 안 데려가고 사오겠냐.”

“……여자 꺼 입기 싫은데.”

“다음 검사 때 지금처럼 노브래지어에 트렁크 팬티 입고 찍으시던가.”

정원이는 꺼림칙한 듯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병원에 정밀 검사를 예약했다. 3일후에 오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지금 검사를 하고 싶다고 바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괜한 걸로 싸운 것 같아 손해만 본 기분이었다. 우리는 그 후로 서로 말이 없었다. 마침 신촌이니까 병원을 나와서 백화점을 들어갔다. 뭐부터 살 건지 고민하다가 1층에 신발 샵이 많아서 신발부터 사기로 했다.

“야 근데, 나 이거 구두나 힐은 도저히 못 신겠어.”

“어, 그래 보인다.”

정원이는 뒤뚱거렸다. 사실 옛날에 대학교 신입생 때 나도 여장을 하고 힐을 신었을 때 세 번이나 넘어질 뻔 했었다. 정원이 역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을 터 였다. 운동화는 6층이었다.

“벗고 그럼 속옷부터 사러가자. 여성용품이 젤 층이 가깝네.”

“엉.”

정원이와 나는 속옷 샵으로 올라갔다.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려고 했지만 둘 다 속옷 샵 앞에 서니 고양이 앞에 선 쥐라도 된 냥 쭈뼛거릴 뿐이었다. 누가 먼저 들어가자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점원이 우릴 바라봤다. 도망갈까 싶었는데 이대로 도망가면 오늘 안에 못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원이를 바라보니 이미 도망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나는 정원이의 팔을 잡았다.

“야, 도망가면 다음엔 같이 안 와준다.”

“으…….”

“안녕하세요!”

잠시 서있자 점원이 인사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이는 고개도 끄덕이지 못했다. 점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찾으시는 물품 있으신가요?”

나는 정원이를 노려봤다. 정원이는 얼굴이 빨개져있었다. 우물쭈물 입을 열지 못했다. 시발. 결국 말해야하는 건 나였다. 밤샘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왔지만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웃음으로 억지로 눌러 막았다.

“저, 얘 위아래로 속옷 좀 사려고 하는데요.”

“혹시 사이즈 아시나요?”

결국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점원은 묘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결국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정원이의 귓가에 뭐라고 하는 듯 했는데 정원이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점원은 정원이를 데리고 갔다. 탈의실에서 꺅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정원이는 탈의실에서 나와서 몇 개의 상품 앞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른 상품을 들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점원이 내게 다가왔다.

“부끄럼이 많은 여자 친구분이시네요. 그런데 왜 자기 사이즈도 모르신데요?”

반박해야할 게 너무 많은 말이었지만 나는 이 상황을 두루뭉술하게 넘기길 택했다.

“요새 들어 이상하게 다시 좀 크네요.”

“혹시 벌써 건드리고 계시는 건 아니죠?”

“세상에서 제일 아끼고 있습니다.”

점원은 어머어머 하면서 웃었다. 그동안 정원이는 탈의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

“저 친구가 브래지어를 갈아입는 것도 잘 못하는 친구라서 혹시 도와주실 수 있나요?”

“아, 무슨 집안 사정이라도…….”

“뭐, 그런 셈이죠.”

딱히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변명할 말도 생각 나지 않는 차였다. 점원은 곧 탈의실을 들어갔다. 꺅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내 친구가 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소리였다. 정원이는 잠시 후 탈의실에서 나오자마자 나에게 달려왔다.

“쓸 때 없는 참견이야!”

“한 번은 필요한 참견이었지.”

“십새끼 진짜 한마디를 안 져주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여자와의 말다툼은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정원이와의 말다툼은 전문분야였지만 나 역시 이미 오늘 하루 정신력을 너무 소모한 뒤였다. 나는 정원이를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맞냐?”

“맞음.”

“사자.”

“야 근데 이거 진짜 입어야 되냐?”

“그럼 어쩌게?”

“나 남잔데 시발.”

“나중에 검진할 때도 그렇게 말하시든가요.”

“하 시발 거 진짜.”

계산대로 가서 정원이는 카드를 꺼냈다. 입고 있는 것 외에도 몇 개가 더 있었다. 나는 그 봉투를 자연스럽게 채갔다. 어머니와 누나의 조기교육 덕에 몸에 자연스럽게 배인 행동이었다.

“야 내가 들 거야. 내놔.”

“퍽이나 들겠다.”

“이 새끼가 진짜?”

정원이는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진짜로 화를 내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나는 결국 봉투를 다시 돌려줬다. 여자애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항복의사를 표출하는 것 밖에 없었다.

“너 진짜 시발새끼야.”

“알아.”

“시발새끼.”

정원이랑 나는 그 말을 하고 한참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원이가 입을 연건 신발을 사고 나서 옷을 고를 때나 돼서 였다.

“야 나 좀 뭘 입어도 잘 어울리는 듯.”

나는 정원이를 바라봤다. 정원이가 고른 옷은 모두 티셔츠와 바지였다. 나는 그것을 지적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하다가 마네킹을 가리켰다.

“너나 나나 아무것도 모르니까 걍 마네킹대로 사면되지 않냐?”

“마네킹? 아 설마 나보고 치마 입으라고? 임마 나 다정원이다 다정원.”

“아 뭐 알아서 하라고.”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그제 서야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마침 점원이 다가와서 말했다.

“정말로 손님 뭐든지 잘 어울리세요. 핏이 너무 딱 이에요. 남자친구 분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

정원이의 웃음이 멈췄다. 그리고는 점원을 향해 무언가 따지려고 하는 듯 했다. 아마 남자친구라는 점을 정정하고 싶은 거였겠지. 차마 자신이 남자였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기껏 풀렸던 분위기가 다시 싸해졌다. 나는 소란을 피우지 않기 위해 그런 정원이를 붙잡고 점원과 사이에 서서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너무 다 잘 어울려서 고르기가 힘드네요. 그래도 그 중에서 추천하시는 것 몇 개 골라주시겠어요?”

점원은 알겠다고 했다. 정원이를 바라보자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 내가 들고 있던 봉투를 뺏었을 때의 표정과 흡사했다. 나는 정원이가 말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

“소란 일으키지 마. 이따 얘기해.”

“……알았어.”

정원이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듯 했으나 일단은 납득했다. 나는 어제 밤을 새며 술을 마셨다. 하지만 피곤한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한숨으로 풍선을 불면 그것을 모아서 열기구에 매달고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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