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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로콜라를 좋아하게 될 때까지-1화 (1/138)

1회

chapter0 나는 제로콜라가 싫다"근데 제로콜라 좋지 않냐, 신의 발명품이야. 리얼……. 특히 고기나 밥이나, 햄버거 먹을 때 특히 제로콜라가 좋단 말이지. 왜일까. 깔끔해서가 아닐까. 끈적끈적하지 않고."

친구새끼가 카톡으로 큰일이 났다고 해서 급하게 찾아왔더니 이런 개소리를 씨부리고 있었다. 지랄염병났네. 근데 내 친구를 어디로 잡쉈습니까, 시발놈아, 아니 시발년아.

"헛소리 하지 마시고 정원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시발새끼야 내가 바로 그 다정원이다."

"염병하네."

눈앞에서 낯익은 미소녀가 장난스럽게 킥킥하고 웃는다. ‘낯익은’이라는 표현이 어색하다. 여자와 친하다고 말할 정도의 사이는 다정원의 동생인 다정하정도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 여자, 정하와도 썩 닮은 구석이 있다.

내가 술을 마시다가 카톡을 보고 놀라서 헐레벌떡 뛰어온 것은 사실이다. 택시에서 술에 쩔어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걸 거야. 그래서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친구 다정원이 여자라고?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성전환물이 뭐였었지? 너의 이름은? 그러기엔 묘하게 정하를 닮은 생김새가 거슬린다. 하여간에 그런 것을 기반으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내 직감은 내 이성을 부정하며 확신했다. 저건 내가 아는 다정원이 맞다고. 정말로 내 직감을 믿는 게 맞나? 정말로 술을 먹다가 내가 곯아떨어져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근데 왜 다정원이지? 이런 꿈을 꾸고 있는 이유는 뭐지? 욕정 때문에? 내가 다정원을 대상으로 성별을 역전시키고 욕정을 한다? 아니 이런 좆같은 경우가 다 있나.

"하여튼 간에 가족보다 먼저 너한테 알린 거니까. 아, 닥터페퍼는 존나 맛없어."

"어쩌라고. 하긴 뭐 주는 대로 쳐 먹는 누렁이 새끼가 맛이 뭔지나 알겠냐."

굳이 제로콜라 얘기를 하면서 닥터페퍼를 걸고넘어지는 걸 보니 내 친구 다정원이 맞았다. 제로콜라를 숭배하며 묘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점이 다정원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그런 음료수 따위와 상관없이 이 여자와 대화를 나누며 느끼는 거리감이 뭔가 내가 아는 다정원과 썩 흡사했다. 우리 사이의 대화, 태도, 시선, 그리고 내가 느끼는 안정감, 이 모든 것이 이 여자가 정신병자가 아닌 다정원임을 어림짐작하게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술을 너무 마셔서 헛것을 보거나, 택시에서 졸면서 꿈속에서 내 친구를 미소녀로 치환시켜 보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물어볼 것은 많았으나 무엇을 걸러야 할지 고민해야했다. 나는 입을 달싹였다. 입 안에서 단어가 맴돈다. 언어를 거른다. 입 밖으로 내선 안 될 것 같은 말들을 골라냈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 녀석이 더 우울하겠지. 우울한가? 누구보다 마초이즘에 쩔어 있는 주제에 지가 한다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평소 자주 ts 미소녀가 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녀석이었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마주보던 시선을 피했다.

"좋냐?"

"좋겠냐? 새끼야."

"맨날 되고 싶다고 하더니."

"그건 시발새끼야 '여친 만들고 싶다~.'라고 씨부리는거랑 똑같은 거야. 이루어지지 않는 걸 아니까 되고 싶다고 지껄이는 거지. 지금 생각하니 그 때의 나를 죽이고 싶다."

"아, 그러슈."

자신을 다정원이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우울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쓸고 있었다. 얼굴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뱉었는가에 대한 회한, 그리고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는 내 얼굴이 눈동자에 비치고 있었다.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나뿐이었다면 차라리 이 상황이 편했을까 싶었다. 다정원은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그 때의 나를 죽이고 싶다. 아니면 지금의 나라도.”

“……그러냐.”

그제서야 녀석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내가 아는 다정원은 분명 건장한 남자였는데, 이상하게 정원이의 얼굴이 남아있는 미소녀가 눈앞에 있었다.

그래, 마치 유전자가 일방적으로 쏠려 버린 정원이의 여동생, 정하를 보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정하보다 지금의 정원이가 더 정원이의 여동생 같았다. 낯이 익은 것도 그래서였겠지.

머리가 어지럽다. 그러고 보니 나는 술을 마시다 온 것을 깨달았다. 맨 정신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 녀석도 맨 정신으로 있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에미 시발 술이나 마시자. 내가 사옴."

"오냐 올 때 메로나."

그러고 문을 나선다. 안주는 뭐로 하지? 아 맞아 저 녀석 저렇게 어려 보이는데 술 마셔도 되는 거 맞나? 에이 시발 모르겠다. 오늘만은 저 녀석이 좋아하는 제로콕이랑 잭다니엘을 섞은 잭콕이다. 먹고 뒤지자, 네가 좋아하는 제로콜라는 파묻혀서 말이야. 참고로 나는 제로콜라도 그걸 잭다니엘에 섞는 것도 정말로 싫어한다.

***

다녀오니 정원이는 퍼질러서 자고 있었다. 사오라던 메로나도 사왔는데 퍼질러 자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내 신세가 조금 서글퍼졌다. 내 딴에 괜히 신경 쓴다고 제로콜라와 잭다니엘을 사온 것이 허무할 지경이다. 심지어 잭콕 난 별로 안 좋아하는데. 들고 온 비닐봉지에서 메로나를 꺼내 냉동실에 던져놓고 잭 다니엘을 땄다. 음, 제로콜라는 내일 이 년 보고 마시라고 하자. 냉장고행이다. 이 년? 이 년이라 시발.

다정원이랑 안지는 이제 12년차다. 중학교 때 던파 자결에서 깝치던 새끼를 게임 속에서 복날 개잡듯이 패고 나서 서로 시발시발거리면서 친추를 한 게 인연이 됐다. 그러고 20살이 넘어서 술이나 같이 먹자고 처음으로 얼굴 보고 만나서 친해진 질긴 인연이다. 맨날 서로 운동이나 하자고 말해놓고 우리 같은 엠생이 운동은 무슨 하고 노래를 불렀었지. 결국 운동은 나 혼자 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관리를 하지 않고 있었던 걸까? 그럴 리가 없지.

그런 단짝친구가 여자가 됐다. 가녀린 미소녀로 변한 건데 이전보단 살기 편하지 않을까? 졸고 있는 정원이를 바라본다. 어딜 봐도 미소녀다. 오히려 정원이라고 느끼는 내 자신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나이는 잘 쳐줘봐야 고삐리로 밖에 안 보였다. 화장은 당연히 안 했을 텐데,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피부가 눈처럼 뽀얗고 입술은 앵두 같이 빨갛다. 무엇보다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아마 사춘기 남자 고등학생이 봤다면 일주일 안에 고백을 받았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가슴은 크지 않았지만 언밸런스하게 큰 티가 한쪽 어깨를 흘러내리며 그 사이로 적당한 사이즈의 가슴이 언뜻언뜻 비쳐보였다. 그건 절대로 섹스어필이 부족하다고 말 할 부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허리가 가는 점과 어우러져 밸런스 좋게 여성성을 완성한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잭 다니엘을 개봉해서 깡으로 위장에 쳐 부었다. 나는 정원이를 지긋이 바라봤다. 내 친구 다정원을 바라본다. 그저 내 좆이 서는지를 확인하려고. 한참을 바라본다. 다행히도 서지 않았다. 나는 고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서지 않았음에 안심한다. 만일 좆이 섰다면 나는 이 자리로 이 새끼와의 인연을 끊었을 것이다. 저 새끼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는 자신을 확립하는 데 있어 자아, 신체, 사회적 유대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중 제일은 자아라고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자아관을 가지고 살아왔다. 나만이 나의 자아를 확립할 수 있다는 오만한 전제였다. 나는 성장을 하며, 실패를 하며, 성공을 하며, 내가 노력하며 나의 능력을 바탕으로 자아를 구성해왔다. 나는 자아를 내가 구성하는 것에 대해 결벽증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녀석을 보고 있자니 계속 거부감이 들었다. 다정원은 자신을 구성하던 절대적인 기준중 하나인 신체의 변화를 겪었다. 과연 정원이가 자신을 이전과 같이 인지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감히 내 몸이 변해도 ‘나’를 절대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내가 여자가 된다면 나와 관계를 이루던 것들이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와 이 녀석의 자아의 연결과 관계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나는 이 녀석 때문에 내가 확립했다고 생각하는 자아개념이 흔들리는 것이 두려웠다.

정원이와의 굳건했던 관계성이 내 의지가 아닌 상황이라는 타의에 의해서 변화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기에 정원이를 보고 좆이 섰다면, 내가 정원이를 이성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나는 인연을 끊으려고 했다. 우리의 관계성이 상황에 의해 변하는 게 두려웠으니까. 아름다운 여성을 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좆이 서지 않았다고 안심을 한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으으음.”

정원이가 뒤척였다. 그럼에도 깨지 않는다. 앉은 채로 고개가 들렸다 떨어졌다를 반복한다. 졸고 있는 모습이 딱하기도 하여 조심히 안아 올리자 술 냄새가 풍겼다. 나도 이미 술을 마셨는데도 술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내가 나간 동안 이미 한 잔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왠지 쳐 자고 있더라니만.

정원이의 술버릇은 그 자리에서 자는 것이었다. 그런 점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깨지기 쉬운 유리구슬이라도 다루듯이 침대에 정원이를 조심히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줬다. 옛날 같았으면 걷어차고 침대로 가라고 깨웠을 것이다.

이것 역시 저 녀석과 맺었던 관계성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나도 자고 싶었지만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잭다니엘을 다시 위장에 붓는다. 내가 정원이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일이 되면 나도 무슨 얼굴을 하든 무슨 스탠스를 취하든 정원이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반드시 지금 나의 의지로.

그런데 저 녀석이 원하는 걸 알 수가 없으니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전과 같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면 나만은 이전처럼 욕설을 하면서 히히덕거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원이가 관계의 변화를 원한다면? 다시 잭다니엘을 털어 넣는다.

“에휴 시발.”

날이 밝을 때 까지 깡 술을 들이켰다. 오늘은 술이 유난히도 잘 받는 날이다.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

“흐아암, 잘 잤다.”

“일어났냐?”

“어엉, 어? 너 왜 여기 있어?”

결국 아침까지 잠을 못 잤다. 자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잘 수도 없었다. 너를 여자 취급하는 것은 정말 미안하지만 여자와 한 방에서 둘이 있어본 것은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아, 정원이 이 새끼야, 넌 결국 평생 여자랑 둘이서 술마셔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원인 모를 도취감이 나를 감쌌다.

“니가 쳐 불렀잖아, 시발새끼야.”

“엉? 언제 불렀지?”

“내가 아냐, 시발놈아.”

“시발놈인가? 아님 시발년인가. 나도 모르겠네. 시발.”

“……그건 그렇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일어나서 어제 비운 술병을 치웠다. 그러자 녀석의 눈빛이 변했다.

“아니, 잭다니엘을 사와 놓고 안 깨우냐? 니가 사람새끼야 시발?”

“아 거 사오라던 메로나까지 사왔는데 쳐 자고 있던 니 잘못이지.”

“하, 나, 시발. 얼마나 남았냐?”

나는 잭다니엘을 찰랑이고는 냉장고 문을 연다. 어제 개봉하지 않은 제로콜라를 꺼낸다.

“와, 친구야 사랑한다. 내가 뽀뽀라도 해줄까?”

“……잭페퍼라도 마시면 받아주마.”

“우웩. 귀중한 잭다니엘에 닥터페퍼를? 차라리 파인애플이랑 피자를 같이 먹으라고 해.”

서로 낄낄거리며 나는 잭콕을 만든다. 사실 잭콕은 제로콜라가 아니라 그냥 코카콜라로 만드는 걸 텐데 말이야.

“퍄~ 역시 제로 콜라야. 잭콕에도 너무 잘 어울려.”

“응 니 애미. 제 실력이 개쩌는 거구요.”

“응 니 애미 마이애미~”

나는 냉동실에서 메로나를 꺼내 입 안에 넣었다. 사실 안주도 없이 깡술을 들이킨 판에 속이 쓰려서 술은 더 이상은 무리였다. 나는 메로나를 물고 내 속을 달래며 물었다.

“그래서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정원이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곧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나도 모르겠어. 시발. 어제 일하고 돌아오는데 존나 온 몸이 아프잖아. 필사적으로 119부른다고 핸드폰 잡았는데 정신 차리자마자 널 부른 모양이다?”

“그 와중에 올 때 제로 콜라를 찬양하고 메로나 사오라고 시키고 술 쳐마셨냐.”

“몰라 시발 나도 너보고 꿈인 줄 알았나보지.”

말을 나누는 중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제 일을 하고 돌아왔다고?

“야 어제 토요일인데?”

“어?”

정원이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허어, 시발 하루 웬 종일 정신 잃고 있었나보네?”

“이러나저러나 병원은 한 번 가봐야겠네.”

그럼 이 새낀 하루 웬 종일 쳐 기절해 있다가 나를 부르고 술을 처마시고 있었단 소리였다. 진짜 답 안 나오는 새낄세. 이 한심한 새끼를 위해 나는 냉장고에서 메로나를 하나 더 꺼내서  던져줬다. 그걸 얼굴에 맞은 정원이가 소리 질렀다.

“왜 던지고 지랄이야, 시발!”

“쳐맞을 줄 몰랐지. 그걸 못 잡냐?”

“아 몰라 시발.”

녀석이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긁으며 툴툴댔다.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는 메로나를 다 먹고 남은 스틱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오우 골인.

“그래서 어쩌게?”

“뭘 어쩌긴 어째.”

“내가 살다 살다 진짜로 성별 바뀐 새끼를 봤겠냐?”

그 말을 들은 정원이도 한숨을 푹 내쉰다.

“그럼 난들 봤겠냐, 시발.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짜 모르겠어. 솔직히 너 안 왔으면 혼자 징징 짜고 있었을 걸? 아 존나 울고 싶다.”

사람이랑 시비가 걸려 얼굴에 주먹을 맞아도, 게임을 하다가 현금 100만 원짜리 무기가 날아갔을 때도 웃어 넘기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울었을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켰다. 성별 전환, 연관 검색어로 ts가 뜨길래 그것도 검색해봤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상상으로 치덕치덕 쌓아 올린 창작물 꾸러미정도 뿐이었다. 그거라도 확인해 보자하고 프롤로그를 훑어봤더니 대부분 너무 우울하거나, 너무 현실성을 잃었거나, 혹은 너무 상업적이었다. 무엇하나 도움 되는 것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정원이의 몸 상태라도 확인할 겸 병원부터 가기로 했다.

“뭐 그럼 일단 병원부터 가볼래? 혹시 모르냐 그래도 남자일지.”

“응 내 소중이 이미 사라졌구요. 하아.”

“하루 동안 정신 잃기도 했잖아. 일단 검사부터 해보자. 같이 가줄게.”

“엠생이 여기서 도움이 되네.”

“닥쳐라 진짜 뒤지고 싶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함께 낄낄 웃는다. 다분히 의식적으로. 분위기가 늘어지지 않게.

“아, 맞다. 너 설마 그러고 나갈 거냐?”

“뭐가.”

“너 그 상태로 데리고 나가면 나 백타 미성년자 감금 납치범인데.”

때 마침 정원이의 티가 한쪽 어깨를 타고 흐른다. 가슴이 살짝 보여 고개를 들어 천장 구석을 바라본다. 어제 한 번 빤히 바라봤었음에도, 술이 깨고 나니 차마 정면으로 바라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자에 대해 내성이 부족한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것도 이 여자가 정원이라고 확신이 들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아 그런가. 그럼 옷부터 니가 좀 사와. 돈은 줄게.”

“음, 알았다.”

자꾸 부탁만 들어주게 되는 것 같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 깨끗한 주민등록등본을 위해 오늘은 꽤나 힘내야 하는 날이 될 것 같다.

***

“그래서 시발 여자 속옷을 사오셨어요?”

“그럼 시발 트렁크 입고 여자 옷을 입을래, 시발새끼야?”

“아니 그래도 여자 속옷은 아니지! 아 시발 게다가 안 맞잖아!”

“아니 그럼 같이 가서 샀어야지!”

“니가 이대로 같이 나가기 싫다매!”

나도 여자 속옷을 사기 위해 속옷 샵에 들어갔을 때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다행히도 점원은 ‘여자친구 분 드릴건가 봐요~.“ 하고 멋대로 착각하고는 알아서 몇 개를 골라줬다. 그 중에서 야한 것들을 빼느라고 진땀을 흘렸다. 다음부턴 꼭 여자친구랑 같이 오세요. 사이즈도 잘 모르시잖아요? 점원의 놀리는 듯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와중에 정원이가 갑자기 옷을 벗어서 고개를 획 돌렸다. 정원이는 나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허이구, 지랄하네. 야! 나 다정원이야 니 친구 다정원!”

“그럼 시발 뚫어져라 쳐다봐주랴?”

“흠……. 그건 또 복잡미묘한 기분이군. 오, 이게 여자의 몸인가.”

시발새끼. 정원이가 한참을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 나는 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

“오, 개 쩌는데. 야 그래도 브래지어는 못 입겠어도 옷은 대충 맞네. 나 몰래 여친이라도 있었냐?”

“나가기 전에 니 사진 찍어서 누나한테 보여줬다.”

“뭐라시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던데.”

“공무도하가였나? 큭큭큭.”

조금 뒤에 다 갈아입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스키니 진에 자기 몸에 맞는 흰 티만 입었는데도 선이 부드러운 것이 매력적인 소녀가 서있었다. 나름대로 중성적인 옷을 샀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성성은 확연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술이 덜 깬 모양이었다.

“하여간에 가자. 병원이든 어디든.”

“그래.”

내가 문을 나섰다. 정원이는 내가 사온 슬리퍼를 신고 나가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텅 빈 눈이었다. 그러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현관을 나섰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런 기색을 비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술이 덜 깨서 그런지 내색하지 않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내가 걷자 정원이가 따라온다. 평소처럼 걷고 있으니 정원이가 어느새 뒤쳐졌다. 나는 조금 걸음을 늦췄다. 누나는 항상 나보고 걸음이 너무 빠르다고 했다. 나는 뒤늦게 걸음을 신경 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긴 내 인생에선 후회하지 않을 것이 오히려 적었다.

정원이와 470번 버스를 탄다. 두 자리가 비어있었다. 나는 정원이를 안쪽에 앉히고 바깥쪽에 앉는다. 목적지는 일단 세브란스 병원이다.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는 척 하며 정원이를 바라봤다. 정원이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비추는 곳에서 묶지 않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나는 뒷좌석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창문을 닫았다. 창문을 닫으려고 몸을 가까이 했을 때 정원이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분명히 씻지 않고 나왔을 텐데, 그러고 보니 나도 씻지 않았다. 아마 내 몸에선 정원이와는 달리 술에 쩔은 냄새가 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아 맞다.”

“왜?”

“나 시발 민증 남잔데. 뭐라 하지?”

잠시 고민을 했다. 병원이 민증을 요구하던가? 처음가면 요구 했었나? 확실하게 절차를 따지진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달라 그러면 깜박한 척 해.”

“그럼 증상은 뭐라고 해?”

흠……. 뭐라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을 밝히는 게 맞을까? 아까 얼핏 봤던 창작물에선 자주 그랬던 것 같던데.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그냥 밝혀 보자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질러보기엔 너무도 리스크가 컸다. 일단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걍 산부인과 가서 생리가 좀 늦는데요, ct한 번 찍고 싶어요. 라고 말해.”

“오, 씹. 천재냐?”

정원이가 프론트로 갔다. 프론트에서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프론트 간호사가 나를 쓰레기 보듯이 바라본다. 아니 시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갑작스레 억울함이 파도처럼 닥쳐온다. 이게 바로 아다 성폭행범의 마음인가?[작품후기]너와 나의 새로운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 시작합니다.

+ 곯아떨어졌다 / 붇다 -> 붓다 수정 완료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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