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109화 (109/112)

외전 4. 능구렁이 남자친구2017.01.01.

퇴근 후에 동료 교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낙원의 자리로 간 민지는 가방을 챙기는 그의 옆에 섰다.

“선생님. 다 하셨어요?”

“어. 가자.”

낙원을 따라 주차장으로 들어선 민지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잠시 멈추어 고개를 들었다.

“왜요 선생님?”

“오늘은 내 차 말고, 지혁이랑 같이 와.”

“네?”

“아까 얘기 다 들었어.”

낙원의 말에 민지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얼굴마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런 제자가 안쓰러워 낙원은 손을 뻗어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좋은 일을 왜 숨겼어. 나랑 은유한테 제일 먼저 말해줬어야지.”

“……선생님…….”

“강지혁이 어른스러울 때도 있지만 애 같을 때도 있어. 네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줘.”

“……선생님……. 저는…….”

언젠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빠르다.

아직 제 마음에 미안함이 가득 남아있는데,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는데.

그 생각으로 불안해하는 민지를 보며 낙원이 살짝 허리를 숙여 떨리는 두 눈동자를 마주했다.

“민지야.”

“……네.”

“나 기분 좋아.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일 수 있어서.”

“……선생님…….”

“그러니까 다른 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네가 행복한 일에만 신경 써. 나랑 은유는 그거면 더 바랄 것도 없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아.

역시 담임선생님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멋있어지셨다.

항상 제 행복이 먼저라고 말해주는 감사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

자신은 따라갈 수도 없을 만큼 따뜻한 그 마음에 두 눈이 붉어진 그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래. 그럼 됐어. 곧 집에서 보자.”

“네 선생님.”

“아. 혹시 강지혁이 괴롭히면 얘기해.”

진지하기만 한 그의 표정에 민지는 웃음을 터뜨리고선 알았다고 대답하며 운전석에 오르는 그를 쳐다보았다.

손을 흔들어준 그의 차가 먼저 주차장을 빠져나간 뒤, 민지는 몸을 돌려 익숙한 차로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고 부드러운 시트 위에 몸을 기대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이사님이 괴롭히면 말하래요.”

“뭐? 강낙원 저게 진짜.”

“낙원선생님은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해요. 아니, 훨씬 더 멋있어요.”

시동을 걸던 지혁은 ‘멋있다’는 말에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하얀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 멋있다는 얘기가 너무 쉽게 나온다.”

“사촌이라면서, 사촌한테도 질투하세요?”

“질투 대상에 예외가 어디 있어?”

민지가 안전벨트를 채우는 걸 본 후에야 지혁은 차를 출발시켰다.

학교 근처를 벗어나자마자 핸들을 잡지 않은 오른손을 그녀에게 내밀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며 부드럽게 차를 세운 지혁이 고개를 돌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민지를 쳐다보았다.

“손 안 줘?”

“운전에 집중하세요. 위험해요.”

“옆에 네가 있는데 어떻게 집중을 해? 그리고 난 원래 운전 잘 해. 손이나 줘.”

지혁의 고집에 민지는 할 수 없다는 듯 제 손을 그의 커다란 위에 올려놓자 깍지를 껴서 꽉 잡아오는 손길에 얼굴이 금새 붉어졌다.

담임선생님인 낙원과 이사장님인 지혁은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달랐다.

일을 할 때는 칼 같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면 능구렁이가 되기도 하고, 귀여워지기도 한다.

게다가 그와 연애를 하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그는 표현하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예전에도 자신은 돈이 많고 사회적 위치도 높으니 누군가 그걸로 힘들게 한다면 꼭 찾아오라고 했던 것처럼.

깍지를 껴 잡은 손으로 자신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는 지혁을 보며 민지는 가슴이 터질 것처럼 떨려 왔다.

원래 잘생긴 줄은 알았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지혁은 잘생김 지수가 폭발했고,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아낌 없는 사랑을 주었다.

익숙한 주차장에 차가 들어서고 빈 자리에서 멈추자 나란히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손에 커다란 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은하랑 은수 많이 컸겠죠?”

“일주일 전에 봤잖아.”

“그래도요. 애들은 쑥쑥 큰다고 하잖아요.”

“어떡하지. 오늘 은하랑 은수랑 외할머니 댁에 갔다는데.”

동생들을 볼 생각에 들떠 있던 민지는 지혁의 말에 금새 시무룩해졌다.

그 얼굴이 귀여워 지혁은 작게 웃으며 제 어깨 높이에 와있는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다음에 또 보러 오자.”

“네.”

현관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발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활짝 열리며 은유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지야! 도련님!”

“오랜만이에요 형수님.”

“그러니까요! 얼른 들어오세요.”

둘째를 출산한 뒤로 자주 만나지 못해서 아쉬움이 가득했던 은유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졌다.

일주일 전 가족모임에서 보긴 했지만 이렇게 따로 보는 건 또 달랐다.

두 사람이 건넨 커다란 쇼핑백에 놀란 그녀가 둘을 쳐다보자 민지가 예쁘게 웃으며 은유의 팔에 팔짱을 쏙 꼈다.

남자친구인 자신에게조차 먼저 해준 적 없는 그런 대담한 스킨십에 지혁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도 모르는 채로 민지는 은유와 함께 주방으로 들어섰다.

“예쁜 그릇 세트랑, 애기들 옷이에요 선생님.”

“세상에. 이런 거 안 들고 와도 되는데! 그렇지 않아도 네가 올 때마다 사준 것들만 해도 엄청나 민지야.”

“애기들 옷 보면 저도 모르게 자꾸 결제하는 거 있죠?”

누구 제자 아니랄까 봐.

낙원은 크게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은유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제 손으로 옮겨 한쪽에 두고선 커다란 냄비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손 씻고 얼른 앉아. 밥 먹자.”

오랜만에 넷이 앉아 함께 하는 식사 자리는 마냥 훈훈하기만 했다.

“오늘 교생실습 첫날이었지? 어땠어? 할만 했어?”

“저 엄청 긴장됐어요. 말도 잘 못한 것 같고.”

“괜찮아 민지야. 처음엔 다들 그렇지. 시간 지나면 또 잘 할거야. 너무 부담 갖지 마.”

“네. 그래도 담임선생님이 잘 챙겨주셔서 끝날 때쯤엔 좀 괜찮았어요.”

“그래. 힘든 거 있으면 낙원씨한테 다 얘기해.”

민지의 앞에 통통하게 살이 잘 오른 닭다리 하나를 놓아주며 은유가 씽긋 웃었다.

어쩜 아이 둘을 낳은 여자인데도 갈수록 예뻐지는지.

아마 담임선생님한테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 건가 보다 하던 민지는 제게로 날아든 질문에 순간 음식물을 뿜을 뻔 했다.

“그나저나, 우리 민지는 연애 안 해? 한창 예쁜 나인데. 내가 재촉하려는 건 아닌데, 대학 들어가서도 너무 공부만 하는 것 같아서.”

날개 살을 발라내며 말을 하던 은유는 순간 조용해진 분위기에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웃음을 참고 있는 남편과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이는 도련님과 민지.

“왜 그래?”

“……아, 그게…….”

잠시 눈치를 살피던 민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선 두 손을 무릎 위로 가지런히 모으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저 이사장님이랑 연애해요 선생님.”

챙강.

민지의 폭탄 발언에 놀란 건 은유뿐만이 아니었다.

밥을 먹고 있던 지혁도 화들짝 놀라며 젓가락을 떨구고선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분간은 비밀로 하고 싶다고 했으면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응? 뭐라고 민지야?”

“저랑 강지혁 이사장님이랑 연애해요 선생님. 3개월 정도 됐어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연애를 한다고?

누가. 민지가?

누구랑. 도련님이랑?

어지러운 제 머리 속을 정리하던 은유는 헤 벌어졌던 입을 다물고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세상에. 너무 축하해 민지야!! 도련님도요! 아니, 어떻게 이런 엄청난 사실을 저한테 숨겼어요? 너무해요! 낙원씨는 알고 있었죠? 그죠?”

“나도 오늘 알았어.”

“웬일이야! 세상에. 와, 진짜 세상에!”

놀란 은유가 감탄을 금치 못하며 식사자리는 민지의 부모님에게 교제허락을 받으러 온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은유는 도련님인 지혁에게 민지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전했고, 그는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식사를 마친 뒤 디저트까지 먹고 나서 한참을 놀다가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지혁과 민지가 돌아갔다.

씻고 화장대 앞에 앉아 기초화장품을 바르던 은유는 몸을 돌려 침대 위에 기대고 있는 낙원을 쳐다보았다.

“너무 잘되지 않았어요?”

“그렇게 좋아?”

“당연하죠! 민지랑 도련님이라니! 세상에. 할머님께서 아시면 엄청 좋아하시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몇 년 전부터 은근히 민지를 눈독들이던 노진희 여사였는데, 이 소식을 들으면 어찌나 좋아하실 지 안 봐도 벌써부터 훤하게 그려졌다.

“그만 좋아하고 이리 와.”

“저 진짜 놀랐어요! 세상에. 아직도 안 믿겨요.”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걸어와 제 옆에 눕는 은유를 감싸 안은 그가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며 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나도 그랬어. 생각하지도 못한 조합이라서.”

“그죠? 와.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에요.”

“모르는 거지. 너랑 나처럼.”

그 말을 하며 제 옷 속으로 파고드는 남편의 커다란 손의 촉감에 은유가 그를 쳐다보았다.

“손은 왜 거기로 가요?”

“마사지 해주려고.”

“저 괜찮은데요?”

“안 괜찮을 거야.”

둘째인 은수까지 태어난 후로 오로지 두 사람만이 같이 보낸 시간은 예전에 비해 훨씬 줄어든 게 사실이다.

그래서 낙원은 은하와 은수가 없는 지금 이 시간이 굉장히 소중했다.

“벌써 잘 생각은 아니지?”

“잘 생각이었는데요.”

“……심은유.”

잔뜩 굳어지는 남편의 얼굴을 보며 킥킥 웃음을 터뜨린 은유가 몸을 일으켜 그의 허리 위에 앉아 상체를 숙였다.

“당신이랑 같이.”

“……나 유혹하는 거야?”

“제가 원래도 예쁘지만, 마음먹고 작정하면 더 예쁜 거 아시죠?”

잔뜩 부끄러워하다가도 이렇게 가끔씩 훅 들어오는 아내를 보며 낙원은 벌써부터 애가 탔다.

한 손은 얇은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은유의 잠옷 단추를 푸르며 하얗게 드러난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언제나 그렇듯 간지러움에 은유가 소리를 지르자 그 여린 목에 닿은 입술에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졌다.

“낙원씨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괜찮아요?”

“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어. 너도 오늘 못 자, 심은유.”

“갑자기 그냥 자고 싶- 꺅!”

은유의 장난에 낙원이 그녀를 아래에 눕히고 빨간 입술에 여러 번 입을 맞추었다.

“이래도 그냥 잘 거야?”

제게로 쏟아져 내린 관능적인 시선에 은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의 목에 두 팔을 휘감았다.

“오늘 재우지 말아주세요.”

“그래. 그래야 심은유지.”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꿀이 떨어지는 부부임에 틀림 없었다.

나른한 주말 오전, 오랜만에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던 민지는 침대 위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휴대폰을 들었다.

그가 멋대로 저장해 놓은 ‘남자친구’라는 문구가 액정에 떠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일어났어?]”

“그럼요. 왜요?”

“[왜요오? 남자친구한테 너무 야박하네 권민지.]”

벌써부터 서운한 듯 터져 나온 볼멘 소리에 민지가 작게 웃고는 이불 사이로 몸을 웅크렸다.

“제가 뭘요.”

“[하. 기운 빠지네 진짜. 집 앞이니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네? 지금요?”

“[응. 날 좋으니까 데이트 가자.]”

“……네. 금방 준비하고 내려갈게요.”

“[안 다치게 천천히 해. 기다릴게.]”

스무 살 이후로 민지의 주말은 늘 바빴다.

낙원과 은유와, 혹은 지혁과 주말마다 봉사활동을 다녀서 4년 동안 토요일에 쉬어본 기억이 없는 그녀로선 지금이 꿈만 같았다.

원래 가기로 했던 양로원에서 오늘 다른 분들이 오시게 되어 봉사활동을 미뤄졌다는 연락을 받은 게 어제 저녁.

지혁과 전화를 하던 중에 그 이야기를 했는데, 아침이 오자마자 집 앞으로 찾아왔다는 그의 말에 화장실로 들어가 준비를 하는 민지의 손길이 빨라졌다.

깨끗하게 씻은 후 곱게 화장을 하고,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제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집을 나설 수가 있었다.

2층에서 계단으로 내려와 출입문을 열자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기대어 서있는 지혁이 한눈에 들어왔다.

큰 키에 딱 벌어진 어깨와 작은 얼굴.

저 얼굴 안에 옅은 쌍꺼풀이 진 눈과 오뚝한 코, 예쁜 입술이 조화롭게 들어가 있다는 게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늘 시원하게 이마를 드러냈던 머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항상 수트를 입고 있던 지혁이 오늘은 청바지에 하얀 반팔티셔츠를 입고 카디건을 걸쳐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니 무슨 남자가 어떤 머리를 해도, 어떤 옷을 입혀놔도 저렇게 잘 어울리는지.

“안 오고 뭐 해?”

“네? 아, 네!”

멍하니 서있던 민지가 지혁의 앞으로 다가가자 머리통 하나만큼 키가 더 큰 그가 순식간에 허리를 숙여 민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뭐, 뭐 하시는 거에요!”

“뽀뽀.”

“뽀, 뽀, 뽀……. 누, 누가 보면 어떡해요!”

“사람들이 생각보다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아. 다행이지?”

저 속에 구렁이 백 마리는 들어 앉은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민지를 알 리가 없는 지혁이 씩 웃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안 타?”

“타, 타요.”

혹시라도 머리를 부딪힐까 봐 제 손으로 민지의 머리 위를 보호해준 지혁이 그녀가 탄 후에 문까지 닫아주고는 빙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조금 전의 뽀뽀로 정신을 놓고 있던 민지는 또다시 제게 훅 들어오는 지혁의 얼굴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런 감촉이 느껴지질 않아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러자 여전히 제 앞에 있는 그의 얼굴에 숨을 헙 들이쉬자 그가 그 잘생긴 얼굴로 웃으며 이번엔 그녀의 입술에 촉 입을 맞추었다.

“이런 거라도 기대했나?”

“뭐, 뭐! 아침부터!”

“그럼 밤에는 해도 되고?”

“뭐, 뭐에요?”

“난 안전벨트 해주려고 한 건데. 네가 그렇게 원하면 생각은 좀 해 볼게.”

“됐어요!”

지혁과 함께 있으면 늘 놀림 받는 기분이 든다. 그러면서도 싫지 않고 오히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좋다는 게 신기했다.

지혁의 말처럼 오늘 날씨는 끝내주게 좋았다.

바람도 적당하고, 햇빛은 따사롭고, 하늘은 파랗게 맑았다.

그야말로 데이트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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