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가족 여행2016.12.31.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2월의 어느 날.
꼼꼼하게 잘 꾸린 짐을 트렁크에 실은 낙원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자 새근새근 잠이 든 은하를 안은 은유가 최대한 흔들림 없이 차에 올랐다.
조용히 문을 닫아 주고 운전석에 타 시동을 걸고 백미러 너머로 은유와 아이를 쳐다보았다.
“다 됐어?”
“네.”
은유의 대답에 낙원의 차는 주차장을 빠져 나와 달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눈이 많이 오네.”
“그러게요. 운전 조심해요 낙원씨.”
“응. 은하는 아직 자?”
“네. 어제 그렇게 뛰어 놀더니 잘 자네요.”
옆자리에 장착된 카시트에 앉아 잠에 푹 빠진 아들을 보는 은유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이제 14개월이 된 은하는 낙원과 은유의 첫 아이였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낙원의 판박이라고 할 만큼 빼어난 외모를 소유했던 은하는 태어나고 자라며 점점 두 사람을 반반씩 닮아가는 중이었다.
좋은 유전자만 물려 받은 탓인지 키도 또래들보다 제법 컸고, 생긴 것도 어찌나 잘생겼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다 한마디씩 할 정도였다.
지치지 않는 낙원의 체력을 본받은 은하는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뛰어 놀기를 좋아했다.
자기 전엔 늘 낙원과 온 집안을 빙글빙글 돌고 나서야 지쳐 잠에 들었고,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저 뿐만이 아닌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같이 타고 있었기에 낙원은 그 어느 때보다 운전에 집중했고, 잘 달리던 도로 위에서 핸들을 부드럽게 틀어 휴게소로 진입했다.
차가 멈추고 먼저 내린 낙원이 뒷좌석 문을 열고 카시트에서 자고 있던 은하를 안자 아빠인 걸 알았는지 눈을 뜨고 졸음이 가득한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빠아.”
“은하 일어났어?”
뒤이어 내린 은유를 보며 낙원이 벌어진 패딩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은유야. 옷 잘 입어.”
“아, 네.”
혹시라도 감기에 걸릴까 자상하게 챙겨주는 남편의 말에 은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퍼를 잡고 끝까지 채워 올린 뒤 잠에서 깬 은하의 머리에 털모자를 씌워주었다.
“은하 배 안고파?”
“맘마!”
“응. 우리 들어가서 밥 먹자.”
양 옆으로 차를 잘 살피며 은하를 품에 안고 은유와 함께 휴게소 식당으로 들어선 낙원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잘생긴 외모에 예쁜 아내, 그리고 품에 안은 잘생긴 아이.
“어머. 애기가 너무 예쁘다.”
“하하.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때면 쏟아지는 관심에 은유는 아직도 어색하기만 했지만, 은하는 그걸 아는 건지 되려 방긋방긋 웃으며 사람들에게 행복한 웃음을 선사했다.
카운터 앞으로 다가간 낙원이 자꾸 바등거리는 은하를 잘 고쳐 안은 채로 은유를 쳐다보았다.
“뭐 먹을래?”
“전 설렁탕 먹을래요. 낙원씨는요?”
“나도 같은 걸로.”
“설렁탕 두 개 주세요.”
은유가 계산을 하고 자리에 앉자 옆자리에 앉은 낙원이 은하를 제 무릎에 앉힌 뒤 찬바람으로 금새 붉어진 볼에 입을 촉 맞추었다.
“은하 많이 추워?”
“추어?”
말을 배우면서 낙원과 은유가 하는 말을 따라 하기 시작한 은하는 정말이지 귀여움 그 자체였다.
오늘도 저를 올려다보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제 말을 따라 하는 은하가 사랑스러워 낙원의 입가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커다란 식당 안에 두 사람의 주문번호가 울리자 은하를 은유에게 안겨준 낙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녀올게.”
“네.”
커다란 쟁반 위에 뜨끈한 설렁탕을 각자의 앞에 놓아둔 낙원이 들고 온 보온 도시락을 꺼내 그 옆으로 펼쳤다.
일반식을 먹기 시작한 은하는 가리는 것 없이 전부 다 잘 먹는 고마운 아들이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찌나 순하던지, 은유는 입덧도 거의 하지 않았고 태어난 후에도 은하는 떼도 쓰지 않고 잘 웃으며 부부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낙원은 은하를 다시 제 품으로 데려와 도시락 통을 연 후에 따로 챙겨온 아기 숟가락을 꺼냈다.
“내가 할게요 낙원씨.”
“아냐. 식기 전에 먼저 먹어. 은하 밥 먹이고 먹을게.”
“그럼 저 얼른 먹을게요.”
“그러지 말고 천천히 먹어.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고마워요.”
은유가 임신소식을 전한 그 순간부터 낙원은 훨씬 더 다정해졌고, 부드러워졌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임신 기간에는 아예 온 집안일을 다 맡아서 했기에 은유가 미안함을 느낄 정도였다.
태어난 후에는 젖을 먹기 위해 새벽에 깨는 은하를 보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꼭 은유와 함께 깨어 있다가 아이를 트림 시키고 재우는 것까지 해주고서야 잠을 잤다.
임신 6개월부터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던 자신과 달리 낙원은 출근을 하면서도 늘 자신과 은하를 살뜰히 챙겼다.
“우리 은하도 맘마 먹자.”
“맘마!”
“응. 맘마. 엄마가 어제 은하 좋아하는 계란국 끓여 주셨다. 맛있겠지?”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밥과 국물을 호호 불어 은하에게 먹여주는 낙원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은하가 태어난 지 벌써 1년이 넘었음에도 낙원은 변함없이 은하를 잘 돌봐주는 고마운 남편이자 훌륭한 아빠였다.
남편 덕분에 편하게 밥을 먹은 은유는 은하를 제 품으로 옮겨 안았다.
“은하야. 아빠 식사 하시니까 엄마랑 밥 먹자.”
“빠빠.”
밥을 먹으면서도 은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낙원이 되려 귀엽게 느껴진 은유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평소 아이를 좋아하던 그는 아니나 다를까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아들 바보가 되었다.
처음 은하가 손을 잡았을 때, 뒤집었을 때, 걷기 시작했을 때. 낙원은 한번도 빠짐 없이 다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겨워했다.
준비해 온 음식을 다 먹은 은하는 배가 불렀는지 은유의 허벅지 위에 서서 그녀와 장난을 치기에 바빴다.
“엄마!”
“응, 은하야. 신난 거 보니까 이제 배부르지?”
식기들을 반납하고 돌아온 낙원이 은하의 손에 장갑을 끼워주고 삐뚤어진 모자를 다시 잘 씌워주고는 신이 나 있는 은하를 들어 땅 위에 내려놓았다.
“우리 저 앞까지만 걸어갈까?”
은하는 낙원과 은유의 손을 나란히 잡고는 신이 나서 작은 발로 문 앞까지 힘차게 걸었다.
매서운 칼 바람에 문 앞에서 은하를 번쩍 안아 든 낙원이 말간 얼굴을 제 품으로 숨겼다.
“밖에 추우니까 잠깐만 이러고 있어. 알았지?”
“낙원씨. 먼저 차에 가 있을래요?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녀와 은유야.”
“응. 그럼 얼른 갔다 올게요.”
“천천히 와도 되니까 조심해서 와.”
“네.”
은유가 화장실로 간 사이 은하를 안고 휴게소 구경에 나선 낙원은 이것저것 신기해하는 아들의 리액션에 일일이 맞춰주며 끊임없이 말을 해주었다.
“아이고, 아빠가 엄청 자상하네. 아들이 몇 개월이에요?”
“14개월이에요.”
“너무 예쁘네. 보기 좋아요.”
“감사합니다.”
젊은 아빠가 뭐 저렇게 잘생긴데다 자상하기까지 한지, 방학을 맞이해서 가족들이 유난히 많은 휴게소 안에는 그를 보며 옆의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여자들이 늘어났다.
그걸 알 리가 없는 낙원은 늘 그랬듯이 은하와 눈을 마주하며 이것 저것을 설명해주었다.
“이건 귤이야 은하야.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거.”
“이어!”
“응. 이거. 엄마 이따 먹으라고 조금만 살까?”
“엄마!”
은하가 뱃속에 있을 때에도 유난히 귤을 잘 먹던 아내 생각이 나 잘 익은 것들로 간추려 고른 낙원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직 오지 않는 은유에 대한 걱정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은하를 안았다.
“우리 엄마 마중 가자.”
“엄마!”
은하를 품에 꼭 안고 외부로 나선 낙원은 화장실 앞쪽으로 다가가다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화장실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분명히 아내인 은유고. 그 앞에 남자는 모르는 남잔데. 표정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같은데.
“번호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아, 죄송합니다. 저 결혼했어요.”
“되게 어려 보이시는데. 그러지 마시고, 연락처만 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너무 예쁘셔서요.”
그렇지 않아도 화장실 줄이 길어서 급하게 나오려고 애를 썼는데, 나오자마자 웬 남자에게 붙잡혔다.
아니, 내가 어려 보이는 거랑 결혼했다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야?
좋게 이야기했지만 믿지 않는 남자의 태도에 잠시 한숨을 내쉬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뒤를 돌아본 은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저를 보고 있는 은하와 그런 은하를 안고서 앞의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낙원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야?”
“네? 아, 그게…….”
“겨, 결혼하셨어요?”
“네. 말씀 드렸잖아요.”
“아, 너무 어려 보이셔서……. 죄, 죄송합니다.”
지금 불고 있는 칼바람처럼 차갑고 매섭기만 한 낙원의 눈빛에 남자는 황급히 사라졌고, 은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낙원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해요. 자꾸 안 믿어서…….”
“진짜 유부녀라고 써 붙일 수도 없고.”
“하핫. 그러게요.”
차로 돌아오는 내내 낙원의 표정을 풀어질 줄을 몰랐고, 은하를 카시트 위에 앉히고 앞에 앉은 낙원을 슬그머니 쳐다본 은유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맘에 안 들어, 진짜.”
“화났어요?”
“화나지. 내 눈에만 예뻐야 하는데. 남들 눈에 다 예뻐서.”
“어휴, 못하는 말이 없어 정말.”
“안되겠다. 가면 은하는 어머니한테 맡기자.”
“네?”
“너랑 데이트 좀 해야겠다고, 심은유.”
그가 말하는 ‘데이트’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는 은유는 얼굴을 붉히며 은하를 쳐다보았다.
“으, 은하도 같이 있는데!”
“난 데이트라고 밖에 안 했어. 무슨 상상을 한 거야?”
“……됐어요!”
“왜, 뭐 바라는 거 있어?”
저렇게 능글맞게 웃으며 물어볼 때면 할 말이 없어진다.
은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앞에서 불쑥 들어온 손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이게 뭐에요?”
“귤. 가면서 먹어.”
“와, 이건 또 언제 샀어요?”
“너 기다리면서. 생각나서 샀는데, 그런 장면을 목격할 줄이야. 앞으론 화장실 앞에서 꼼짝 않고 지키고 있어야 하나?”
“이런 일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예요. 걱정 말아요.”
거짓말. 분명 저번에 같이 영화 보러 갔을 때도 그랬으면서.
아내인 은유가 늘 예쁘긴 하지만, 아이를 낳고 이상하게 점점 더 예뻐지는 것 같아 하루하루가 행복하면서도 불안했다.
낙원은 네가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다며 한탄을 하면서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얼마 정도 더 가요?”
“1시간 정도? 피곤하면 자.”
“아니에요. 당신도 운전 하는데, 난 은하랑 놀아야죠.”
휴대폰을 꺼내 동요를 틀자 배도 부르겠다, 심심했겠다 은하가 생글생글 웃으며 카시트에 앉은 채로 몸을 들썩였다.
“은하 신났어?”
“네. 춤추느라 정신 없어요.”
“동영상으로 찍어줘. 못 봐서 아쉬워.”
“알았어요.”
낙원은 은하가 자라는 모든 순간순간을 전부 다 제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직업이 있는 그로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에 출근을 해서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는 늘 영상통화를 걸어 자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했고, 밤에 잠을 자다가도 가끔씩 일어나 새근새근 잠이 든 아내와 아들을 보고 몰래 입을 맞추고는 다시 자곤 했다.
그런 모습들을 알기에 은유는 낮 동안 은하를 보며 휴대폰으로 영상들을 찍어두었고, 집으로 돌아오면 낙원은 그 영상들로 하루의 피곤함을 풀었다.
오늘도 은유가 은하의 재롱을 영상에 담는 동안 세 사람이 탄 차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해안가를 달려 한 별장 앞에 도착했다.
은유가 은하를 안고 낙원이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자 차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가족들이 세 사람을 반겼다.
“아가!”
“은하야!”
“강서방!”
기회가 되면 꼭 다같이 여행을 가고 싶다고 얘기했던 은유의 소원은 오늘에서야 이루어졌다.
임신 기간에는 몸 조심을 해야 한다며 말렸고, 작년에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힘들다며 말린 탓에 이번에 와서야 비로소 그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다.
낙원의 시댁식구들과 은유의 친정식구들이 다 함께 모여 이렇게 놀러 온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태안에서도 전망이 좋은 해변에 별장을 지은 준원이 모두를 오늘 이 곳으로 초대했다.
한걸음에 달려 나와 은하를 보며 좋아하는 어른들을 보며 낙원이 은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추우니까 들어가자.”
“네!”
그렇게 두근거리는 첫 가족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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