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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선생님-104화 (104/112)

104. 약도 없는 병2016.12.30.

꽃 향기가 가득한 봄날에 나란히 출근을 한 낙원과 은유는 교무회의를 마치고 기다란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낙원은 3학년 2반 제자들을 졸업시킨 후 이번 년도에는 2학년 5반의 담임을 맡았다.

낙원이 담임으로 있는 2학년 교실과 은유가 있는 도서실은 완전히 다른 건물이었기 때문에 작년처럼 자주 부딪힐 일은 없지만 매일 도서실로 출근을 하는 듯한 낙원 때문에 얼굴은 훨씬 더 자주 보게 되었다.

교실로 들어가기 전 늘 은유를 도서실까지 데려다 주는 낙원의 이야기는 이미 학교 내에선 유명한 이야기였다.

오늘도 도서실로 향하는 그 복도엔 창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구경하는 아이들이 가득했고, 그 달달한 장면들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끝나고 저녁 먹고 들어갈까?”

“우와. 어디에서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저 너무 많은데. 천천히 생각해볼게요!”

“그래.”

전과는 달리 낙원은 은유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고, 늘 제 밥을 손수 차려주고 싶어하는 아내가 힘들까 봐 종종 이렇게 밖에서의 저녁 식사를 권유했다.

처음엔 남편의 식사는 꼭 제 손으로 차려주고 싶어 고집을 부렸지만 이상하게 요즘은 춘곤증 때문인지 피곤함이 느껴져 그의 제안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뭘 먹을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동안 도서실 앞에 도착하자 낙원이 커다란 손으로 은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기다란 손으로 하얀 볼을 톡톡 두드렸다.

“일 잘 하고. 내 생각도 하고.”

“낙원씨도 수업 잘해요! 제 생각은 조금만 하시고!”

“왜 조금만 해?”

“너무 많이 해서 엄청 보고 싶어지면 어떡해요? 수업에 집중해야죠!”

제법 무서운 얼굴로 훈계하듯 전해오는 경고에 낙원은 작게 미소 짓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생각은 적당히 하고, 쉬는 시간에 올게.”

“바쁘면 들리지 말고 낙원씨 쉬어요. 왔다 갔다 하느라 쉬지도 못하겠어.”

“너 보는 게 쉬는 거야. 춥다. 얼른 들어가.”

“네! 이따 봐요!”

낙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등을 돌려 들어가던 은유는 다시 뒤를 돌아 보고선 제 손바닥에 쪽 뽀뽀를 하고 그 손을 낙원에게 흔들었다.

“……가라는 거야, 가지 말라는 거야. 하여튼 심은유.”

날이 갈수록 사랑스러워지는 아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아쉬운 발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이 볼멘 소리로 그를 향해 기분 좋게 툴툴거렸다.

“아 선생님~ 또 도서실 가셨다면서요?”

“응. 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물어보는 저 얼굴에 대고 감히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오늘도 졌다는 생각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늘 사랑 꾼인 선생님을 보며 대리만족을 하는 걸로 마음을 달랬다.

낙원이 한창 수업을 하고 있던 시간, 유난히 단 게 당겨서 핫초코를 마시려고 카페로 내려온 은유는 주문을 하려다 제 옆으로 슥 뻗어진 기다란 팔에 고개를 돌렸다.

“어? 도련, 아니. 이사장님!”

지혁이 씩 웃는 얼굴로 직원을 향해 카드를 내밀자 직원이 계산을 하고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에 앉는 은유의 맞은 편에 다가가 앉은 지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이젠 거절도 안 하네요?”

“거절을 왜 해요? 도련님 부자잖아요.”

“참 나. 그렇게 당연한 얘기를 들으니까 또 이상하네.”

“그러니까 좀 사주셔도 되잖아요~”

“형수님 좀 뻔뻔해지신 것 같지 않아요?”

“제가요? 에이. 그럴 리가 없죠~ 기분 탓일 거에요.”

세뇌를 시키듯 쳐다보며 제 고개를 끄덕이는 은유를 보며 지혁은 헛웃음이 나왔다.

강낙원한테 맨날 돈 많다고 자랑했더니 이젠 형수님까지 나서서 이런다.

뭐, 사실은 사실이니까.

팔짱을 끼고 있던 지혁이 진동 벨이 울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픽업대로 향했다.

제 앞에 놓인 따뜻한 핫초코와 지혁을 번갈아 보며 은유가 기분 좋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근데 갑자기 웬 핫초코에요? 형수님 맨날 라떼나 고구마 라떼 마셨잖아요.”

“오늘은 달달한 게 당겨서요!”

“초콜릿도 좀 먹어요.”

“괜찮아요. 그냥 따뜻한 거 마시고 싶었어요. 요즘 일은 어떠세요? 예를 들어 봉사활동이라던가, 후원 프로젝트 라던가.”

뜨거운 김이 나는 핫초코를 호호 불며 묻는 은유를 보며 지혁이 설핏 웃었다.

궁금하면 궁금하다고 직접 물어 보기를 하던지.

“그러니까 궁금하신 게, 그 아이돌 그룹이랑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말하는 거죠?”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이왕 얘기 꺼내셨으니까, 해주세요!”

이럴 때 보면 영락 없는 여동생 같다.

하긴 뭐, 주원이보다 더 어리니 말 다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지혁은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넘기고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었다.

“이건 저번 주말에 다녀왔던 거에요. 다들 착하더라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말도 예쁘게 하고.”

“정말요? 역시! 내가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다니까요?”

“이젠 강낙원이 뭐라고 안 해요?”

“안 해요. 그 날 사인회 간 것도 뭐라고 안 했어요.”

단지 좀, 음. 말로 하진 않았고, 몸으로 대화를 나눴을 뿐이죠.

그 말을 제 속에 고이 넣어둔 채로 은유는 지혁의 휴대폰 속에 담긴 사진들을 구경하는 데에 푹 빠졌다.

그런데 사진을 볼 때마다 자꾸 남편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 봤어요.”

“벌써? 아직 많은데요? 형수님이랑 권민지가 엄청 좋아해서 일부러 엄청 찍었는데, 내가.”

“하핫. 그럼 민지 보여주세요! 저는 요즘 낙원씨 얼굴이 자꾸 둥실둥실 떠다녀서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순간에도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니,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보기 좋은 두 사람의 사랑에 지혁은 가만히 웃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고 몸을 일으켰다.

“보기 좋네요.”

“도련님도요. 편해져서 다행이에요.”

“강낙원 덕분이죠. 혼자였으면 못 했을 겁니다.”

“낙원씨도 도련님이 계셔서 잘 이겨내고 있는 거에요. 아시죠?”

“알죠. 그러니까 저한테 잘 하세요. 맛있는 거 드실 땐 저도 좀 부르시고.”

“아! 오늘 낙원씨랑 저녁 먹고 들어갈 건데, 도련님도 같이 가실래요?”

“오늘은 아쉽지만 선약 있어요. 다음에 같이 먹어요.”

지혁을 따라 일어난 은유가 그와 나란히 카페를 나서며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밝혔다.

“오늘 선 보시는 거에요, 정말로?”

“벌써 소문 났어요?”

“세상에. 낙원씨한테 들을 때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에요?”

무원의 일이 해결되면서 지혁은 선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고, 은유 같은 여자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엄마의 희망에 지혁은 오래 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으니 그런 부탁쯤이야 들어드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 노진희 여사에게는 비밀로 하고.

특별하게 기대를 한다거나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운이 좋으면 정말로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거고.

요즘 낙원과 은유를 옆에서 지켜보니 부쩍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아 승낙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네. 엄마가 요즘 눈에 불을 켰어요.”

“작은어머님이 흘리듯 얘기 하셨었는데, 진짜였구나. 이왕 하시는 거 좋은 사람 만나셨음 좋겠어요! 정말로!”

“그게 뭐 내 마음대로 돼야 말이죠.”

“에이. 사람 일은 모르는 거에요. 언제 어디서 운명의 상대를 만날 지 모른다니까요?”

“전 운명 같은 건 안 믿어서.”

“저도 그랬거든요? 근데 아니에요. 분명히 있어요.”

확신에 찬 얼굴로 얘기하는 은유를 보며 지혁은 그런가, 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두 사람을 보면 정말로 ‘운명’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니까.

어느새 도서실 앞까지 올라온 지혁은 주위를 둘러보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여전히 웃고 있는 은유를 쳐다보았다.

“제가 왜 여기 있어요?”

“왜긴 왜에요. 저 데려다 주신 거죠.”

“난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에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저랑 유익한 대화도 나눴잖아요.”

“대체 어느 부분이?”

“음. 전 이만 들어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이사장님.”

“……직장 상사를 이렇게 사용하는 직원은 또 없을 텐데. 쯧.”

이미 도서실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은유를 가만히 쳐다보며 지혁은 제 둔함을 탓했다.

그래도 은유와 같이 있는 시간들이 전부 다 행복한 건 사실이니 그걸로 웃어 넘기기로 했다.

점심 시간.

은유와 함께 급식실로 가기 위해 도서실로 올라온 낙원은 카운터 안에 혼자 앉아 있는 다현을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송선생님. 왜 혼자 계세요? 심선생은요?”

“어, 강선생님 오셨어요? 심선생 너무 졸려 하길래 양호실로 보냈어요. 어차피 일도 없고 한가해서요.”

“양호실에요? 어디 아픈 건 아니고요?”

“네. 그냥 계속 졸더라고요. 햇빛 따뜻해서 더 그럴 거에요 아마.”

“알겠습니다. 식사하러 안 가세요?”

“윤주랑 은혁쌤 올라오신다고 했어요. 먼저 양호실 가 보세요.”

“감사합니다. 이따 봬요.”

도서실을 나와 양호실로 향하는 낙원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변해갔다.

혹시라도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빠른 걸음으로 양호실에 도착한 그는 점심 식사로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으로 들어가 칸막이가 쳐져 있는 곳을 한곳씩 보다 맨 마지막 창가 쪽에 멈춰 섰다.

하얀 침대 위에 두 눈을 감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는 아내의 모습에 조용히 의자를 끌어다 앉은 그가 걱정스런 얼굴로 하얀 볼을 쓰다듬었다.

“은유야.”

“…….”

“은유야.”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뜬 은유는 흐릿한 눈에 초점을 맞추려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긴 손가락으로 그 미간을 부드럽게 쓴 낙원이 허리를 숙여 작은 얼굴을 가까이 마주보았다.

“은유야. 어디 아파?”

“……아뇨……. 저 졸려서요…….”

어제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어서인지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속이 상한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많이 피곤해?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저 생각 없어요. 낙원씨 가서 먹어요.”

“이따 배고플 텐데. 밥만 먹고 자자. 응?”

“그냥 잘래요. 너무 졸려요. 햇빛도 너무 따뜻하고…….”

하늘색의 이불 안으로 몸을 웅크리는 은유를 보며 낙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동그란 이마 위로 입술을 내렸다.

“밥 먹고 바로 올게. 자고 있어.”

“먹고 쉬어요 낙원씨. 저 조금만 자다가 올라갈게요.”

“너 데려다 주고 갈게. 편하게 자고 있어. 춥지는 않아?”

“네. 괜찮아요.”

“그래. 잘 자고, 좋은 꿈 꿔.”

“네.”

낙원은 몇 번의 토닥거림에 다시 스르르 잠이 든 은유를 뒤로하고 양호실을 나섰다.

빨리 먹고 와서 자는 아내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인 게 분명했다.

약도 없다는 상사병.

퇴근 후 나란히 차에 오른 후에도 저녁 메뉴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뭐 먹지? 곱창? 음, 스파게티도 먹고 싶은데. 아니, 설렁탕도 먹고 싶고. 아니! 고기?”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리는 사람처럼 인상을 굳히고 저녁 메뉴를 결정하지 못하는 아내를 보는 낙원의 눈동자에선 꿀이 떨어지고 있었다.

뭘 해도 좋고, 무슨 말을 해도 좋다는 그 얼굴은 남들이 봤으면 정말 미쳤다고 하기에 충분할 만큼이었다.

시동을 걸고 학교 정문을 빠져나가며 낙원이 작은 손을 꼭 잡았다.

“천천히 생각해.”

“아, 정말 못 고르겠어요. 어떡하죠? 낙원씨는 뭐 먹고 싶어요?”

“네가 먹고 싶은 거 뭐든지. 난 다 잘 먹잖아.”

“저도 다 잘 먹잖아요. 흠……. 어떡하지?”

학교 앞 백화점에 도착해서도 은유는 여전히 선택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요즘 따라 먹고 싶은 건 왜 이렇게 많은지.

보통 생리 시작하기 이주일 전부터 식욕이 폭발하는데 생리할 기간도 이미 지났는데.

낙원의 옆에서 손을 잡고 걸으며 생각하던 은유는 문득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멈춰선 낙원이 혹시라도 아내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치일까 봐 옆쪽으로 돌려 세우고선 허리를 숙여 흔들리는 두 눈을 다정하게 마주쳤다.

“왜 그래?”

“……낙원씨…….”

“응?”

“……우리 스파게티 먹어요. 어, 그리고 저 화장실 좀 들렀다 갈게요. 먼저 들어가 있어요.”

“앞에서 기다릴게.”

“아니에요! 먼저 들어가서 주문 해주세요.”

“그래.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네.”

식당가 쪽으로 멀어지는 낙원을 한참 지켜본 후에야 은유가 재빠르게 몸을 돌려 지하에 있는 약국으로 향했다.

설마. 아니겠지.

약국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 속에 뒤엉켜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저……. 저 임신 테스트기 하나 주세요.”

떨리는 손으로 테스트기를 받아 가방 깊숙이 숨긴 은유는 잠시 그 앞의 의자에 앉아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바보처럼 예정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 유난히 잠이 쏟아지고, 피곤하고. 어지럽기도 하고.

혹시, 설마, 정말로 임신일까?

생각해보니 낙원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던 날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아주 혹시라도 제 뱃속에 그와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스레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설렘이 교차했다.

만약에 임신이 맞는 거라면?

그가 좋아해줄까?

그 때, 서로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지만 막상 닥쳐왔을 때 정말 만약에, 원치 않는다고 한다면?

그 쓸데 없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은유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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