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이렇게 예쁜 너의 남편2016.12.30.
자리에 앉은 이후로 은유는 사인회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가수가 앞에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그들은 인사를 마친 채 나가고 없었고, 팬들도 자리를 정리하고 커다란 홀을 나서고 있었다.
“선생님.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민지야.”
“네?”
“……난 망했어.”
“네? 망하다뇨?”
“……난 망했어. 망했어!”
곧 있으면 머리를 쥐어 뜯을 것만 같은 얼굴에 민지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일으켰다.
“왜 그래요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민지야. 세상은 넓고 그 세상엔 기막힌 우연이라는 게 있나 봐.”
“네?”
아까부터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던 민지는 정확히 10분 후 그녀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서, 선생님…….”
사인회장을 나오자마자 앞에 서 있던 장정들과 마주친 민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는 무표정에 괜히 제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끼던 그녀는 제 옷깃을 아프지 않게 잡아채는 손에 의해 어깨가 들렸다.
“으악!”
“주말에 공부하러 간다더니. 공부를 팬사인회에서 하나, 권민지 장학생?”
“이, 이사장님.”
낙원의 기분을 고려해 지혁은 민지를 데리고 사라졌고, 이미 오래 전에 도망간 원식을 제외하고 부부 두 사람만이 홀 앞에 마주보고 서 있었다.
“……나, 낙원씨…….”
“가자.”
말없이 뒤돌아서 걸어가는 낙원의 뒷모습에 은유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뜨며 후다닥 달려가 그 뒤를 쫓았다.
차마 옆에는 서지 못하고, 두 발자국 뒤에 서서 걷다 보니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먼저 운전석에 올라타는 낙원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은유가 뒤따라 조수석에 올라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안전벨트.”
“아, 아! 죄, 죄송해요.”
다급하게 안전벨트를 채우자 낙원의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이른 오후 시간이라 환한 햇빛이 차창을 통해 가득 비춰 들어왔고, 은유는 쏟아지는 햇빛을 피하랴 남편 눈치도 보랴 양쪽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기운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거, 거기에는 어떻게 왔어요?”
“그 프로젝트 노강재단에서 하는 거야.”
“아, 아……. 그, 그랬구나. 하하.”
멍청한 심은유.
팬사인회 응모한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이름을 똑바로 봤어야지!
아니, 근데 이사장님씩이나 되는 사람이 무슨 가수 팬사인회에 와?
일은 일로 끝내야지!
“하하. 저, 점심은 먹었어요?”
“어. 너는.”
“저, 저도 먹었어요! 민지랑 오랜만에 떡볶이 먹었어요.”
“그래.”
아무런 말 없이 운전에만 집중하는 낙원의 모습을 훔쳐보며 은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라리 화를 내지. 아니, 화가 나긴 난 건가?
얘기하면 대답은 또 잘 해주는데.
근데 난 왜 이렇게 쫄았지? 뭘 잘못한 게 없는데? 사인회 정도야 갈 수도 있지.
아니지. 남편이 그렇게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것도 몰래 갔다 왔으니 기분이 나쁠 테지.
“나, 날씨가 참 좋아요. 하하하.”
정신 나갔구나.
이 상황에 날씨가 좋다는 말은 왜 나와?
방정맞은 제 입을 탓하며 눈치를 보던 은유는 결국 고개를 떨구며 조용히 읊조렸다.
“……미안해요…….”
“뭐가?”
“네?”
“뭐가 미안해.”
예상 외로 덤덤한 목소리에 은유가 고개를 들어 신호에 맞춰 부드럽게 차를 세우는 낙원을 쳐다보았다.
화가 난 게 아닌가? 왜?
“……화난 거 아니에요?”
“내가 화나야 할 행동 했어?”
“네? 아, 아뇨!”
“그럼 됐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가슴이 답답하긴 했지만 그냥 넘기기로 했다.
사실 처음엔 거기에서 은유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화가 났고, 그 남자들과 손을 잡는 순간 눈이 돌아갈 뻔 했다.
그런데 그렇게 예쁘게 웃는 걸 보니 스스로에게도 어이가 없지만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좋으면 자신에게 말도 못하고 몰래 올 생각을 했을까 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차가 주차장에 들어서서 빈 곳에 멈춰 서자 낙원이 멍하니 앉아 있는 은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려야지.”
“네? 네, 네!”
이상하다.
이렇게 차분해야 할 상황이 아닌데?
분명 남편이 엄청 싫어했는데?
왜지?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온 낙원이 휙휙 젓는 손에 정신을 차린 은유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낙원씨. 정말로 화 안 났어요?’
“어. 안 났어.”
그렇게 이야기하며 저를 기다려주는 남편의 옆으로 가 걸으며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왜요?”
“뭐가 ‘왜요’야?”
“아니. 왜 화가 안 났어요? 낙원씨 그 그룹 안 좋아하잖아요.”
“안 좋아해.”
“그런데 왜요?”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며 먼저 나선 낙원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고 돌아선 은유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낙원을 쳐다보았다.
“안 좋아하는데 왜 화가 안 났어요? 저 막 엄청 웃었는데?”
“알아. 봤어.”
봤다고? 다?
그 남자들이랑 그렇게 다정하게 얘기하며 웃었는데, 화가 안 났다고?
“저 손도 잡았는데요?”
“……그것도 봤고.”
심지어 그것도 봤어? 근데 진짜로 화가 안 났단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저보고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봤어요! 저 엄청 예쁘다고!”
그 말에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던 낙원의 손이 우뚝 멈췄다.
역시. 화가 난 거였어. 그럼 그렇지!
“저보고 막 엄청 어려 보인다고 했다니까요? 손도 막, 이렇게 깍지 껴서 잡고!”
허공에 붕 떠있는 제 커다란 손을 들어 깍지를 끼며 천진난만하게 이야기를 해오는 얼굴에 낙원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심은유.”
“이거 봐. 화났죠? 그죠?”
마치 자신이 꼭 화가 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추궁하는 질문에 낙원은 그 말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아내는 자신이 질투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집요하게 성질을 긁을 리가 없지.
그 모습에 화가 나기보단 되려 귀엽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갔다.
“풉.”
“……뭐에요? 왜 웃어요? 낙원씨 화난 거 아니에요?”
이렇게 예쁜 너한테 어떻게 화를 내.
“화 안 났는데.”
“뭐야. 정말 안 났어요? 아니, 나 막 손 엄청 오래 잡았다니까요?”
이젠 아예 대놓고 ‘왜 화가 안 났냐’고 닦달하는 모습에 낙원은 실없이 올라가는 입 꼬리를 만지며 은유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손 엄청 오래 잡았어?”
“네! 완전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아내를 내려다본 그가 커다란 손으로 작은 손에 깍지를 껴 잡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손도 잡고, 또 뭐 했어?”
“저보고 엄청 예쁘댔어요!”
조금 찔리기도 했지만, 은유는 일부러 ‘엄청’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엄청 예쁘다고 했어?”
“네! 막 어려 보인다고도 하고!”
여전히 웃고 있는 낙원의 다른 한 손이 은유의 등 뒤로 향했다.
“어려 보인다고도 하고. 또?”
“음……. 아! 제가 어리니까, 자기가 오빠라고 했어요!”
그건 좀 기분 나쁜데.
뭐, 일단 넘어가지.
“오빠라고 했어? 자기 입으로?”
“네! 남자친구 있냐고 물어봤어요!”
남자친구 유무를 왜 궁금해 하는 거야, 도대체. 없다고 하면 어쩔 건데?
그렇게 불평하는 낙원의 손이 지퍼를 잡고 천천히 내리자 그의 앞에 서있던 은유가 등이 서늘해짐을 느끼며 그를 쳐다보았다.
“뭐 하세요?”
“뭐 하는 것 같은데?”
“……설마 지금, 아니죠?”
“뭐가 아니야?”
“……여기서요? 갑자기?”
아니. 화 났다며?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한두 번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뭘.”
“아, 아니. 낙원씨 화 났다면서요!”
“내가 왜?”
“……네?”
등이 완전히 서늘해지며 놀란 은유가 두 손으로 낙원의 셔츠를 꽉 움켜쥐자 그가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어 식탁 위에 앉히고선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거리만큼 얼굴을 움직였다.
“네 남편은 나잖아.”
“그거야 당연하죠!”
“네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고.”
“……그것도 당연하죠!”
“그러니까 화 안나.”
낙원의 붉은 입술이 은유의 입술 위로 짧게 겹쳐졌다 떨어졌다.
그 아쉬움에 은유가 고개를 들어 낙원을 올려다보며 그의 셔츠를 꼭 잡았다.
“왜 하다가 말아요?”
“갑자기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해서.”
웃고 있던 표정이 금새 굳어지는 걸 보며 은유가 아차 싶었다.
다급히 낙원의 목에 제 팔을 두르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저 유부녀라고도 했어요! 가서 손 잡으면서도 아, 우리 남편 손이 더 크다. 이런 생각만 했다니까요? 그러니까 화내지 마세요.”
해명하듯 줄줄이 내뱉는 그 말들이 귀여워 웃음이 터질 뻔 했지만 낙원은 날뛰는 제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은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맨 입으로?”
잔잔하게 귓가로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에 아찔해진 은유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제게로 향해 있는 뜨거운 시선에 은유는 대답 대신 남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혔다.
언제나 그랬듯 낙원은 은유를 능숙하게 조련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애가 타는 것도 그였다.
그래서 오늘도 아내를 도발해 놓고선 더 절실하게 그녀를 탐했다.
식탁 아래로 떨어지는 옷가지들이 하나 둘씩 쌓여가며 차가웠던 유리 사이로 뜨거운 공기가 차 올랐다.
낙원의 커다란 손이 은유의 머리와 식탁 유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배려해주는 거에요?”
“저번에 아팠다며.”
“낙원씨가 너무 격하게- 아!”
“좀 봐줘. 네가 좋아서 그래.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장담은 못 해.”
“하아……. 낙원씨.”
“그래. 네가 자꾸, 그렇게 날 부르니까.”
잘게 부서지는 숨소리와 흔들리는 머리칼 사이로 마주한 시선에 부끄러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젠 그런 것들조차 모조리 간직하고 싶었다.
오늘도 남편과 함께 숨이 찰 정도로 벅찬 사랑을 나누며 은유는 커다란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화, 풀린 거죠?”
“아직 멀었어.”
그렇게 이야기하며 제 손에 꽉 깍지를 껴오는 남편의 행동에 예쁜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두둥실 떠올랐다.
역시. 제게 꼭 맞는 손은 이거다.
그 웃음에 답하듯 낙원이 부드러운 어깨 위로 입술을 묻었다.
그리고 자신의 흔적을 새겼다.
이렇게 예쁜 너의 남편은 누구도 아닌 나라고.
그렇게 여러 번 제 흔적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