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두 여자의 일탈2016.12.30.
“민지야! 준비 다 됐어?”
“네! 금방 나가요!”
거실에서 들려오는 은유의 목소리에 민지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번 더 들여다본 뒤 방을 나섰다.
조용한 집을 나와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두 여자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찼다.
아직은 찬바람이 제법 부는 쌀쌀한 초봄이었지만 두 여자의 얼굴엔 밝은 햇살과도 같은 환한 미소가 가득 피어나 있었다.
설렌 얼굴로 개찰구를 통과하던 민지는 문득 불안한 표정으로 은유를 쳐다보았다.
“근데요 선생님. 저희 진짜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낙원씨 오늘 도련님이랑 원식 오빠랑 약속 있다고 했어. 이런 날이 흔치가 않아!”
“그, 그렇기는 한데……. 걸리면 담임선생님 진짜 엄청 질투하실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절대 안 걸려!”
며칠 전 새로운 음반을 발매한 빅시 멤버들의 팬사인회에 기적과도 같이 당첨된 두 여자는 그 자리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게 좋아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낙원이 유난히 그 그룹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 또 한번 일어났다.
지혁과 원식과 함께 밥을 먹고 천천히 들어오겠다며 주말을 혼자 보내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왔던 게 이틀 전.
분명 하늘이 내린 기회다 싶어 괜찮다며 힘차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고, 오늘 아침 일찍 남편을 배웅해준 은유는 민지와 함께 곱게 화장을 하고 나섰다.
“햇살이 참 밝은 것 같지 않니?”
꿀이 흐르는 듯한 은유의 말투에 민지 또한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여의도에 있는 쇼핑몰에서 열리는 오늘 팬사인회는 빅시 멤버들과 함께 어린 아이들을 후원하는 재단들에서 주최한 것으로 경쟁률이 엄청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어찌나 조마조마 했는지 모른다.
인터넷 투표로 신청을 하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덜컥 당첨이 되었으니 올해 운은 여기에 다 썼다는 생각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새로 나온 신곡에 대한 예찬론을 펼치며 여의도에 도착하자 가방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미, 민지야…….”
“서, 선생님……. 치, 침착하세요! 절대 티 안 나게!”
액정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이름에 은유가 심호흡을 하고는 눈을 꼭 감고 화면을 부드럽게 밀었다.
“여, 여보세요!”
“[어디야?]”
“저요? 저 잠깐 밖에 나왔는데요?”
“[민지랑?]”
“네, 네!”
긴장을 한 탓인지 목소리가 떨렸지만 은유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대화에 집중했다.
“왜요?”
“[놓고 나온 게 미안해서. 둘이 어디 갔어?]”
“뭐, 근처에 백화점이죠! 하하!”
“[그래. 맛있는 거 먹고, 재미있게 놀아. 주말 같이 못 보내서 미안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렇게 사과를 하면 내가 너무 양심적으로 찔리는데…….
늘 다정하지만 요즘 들어서 다정함 지수가 폭발하여 외출해서도 제 생각뿐인 남편에겐 미안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날 추우니까 옷 잘 여미고 다니고. 이따 다시 연락할게.]”
“네! 낙원씨도 좋은 시간 보내요!”
아무 말 없는 걸 보아하니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십년감수를 하며 전화를 끊은 은유는 긴장이 풀린 탓인지 몸이 축 늘어져 민지에게 기대고선 팬사인회 장소로 향했다.
“와. 담임선생님 촉 장난 아니네요.”
“무섭다, 무서워. 그래도 통화 했으니까 마음 놔야지! 아 너무 기대된다.”
제법 빠른 번호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린 지 한 시간여가 지났을까?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은유와 민지는 서로를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세상에. 세상에.”
“꺅!”
멀리서 봐도 후광이 비치는 저 인물들을 보라.
저게 사람인가? 아니, 어떻게 저렇게 잘생겼지?
“대박. 진짜 잘생겼어요!”
“어떡해 민지야. 나 죽을 것 같아.”
‘모델돌’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다들 큰 키에 우월한 외모와 몸매를 뽐내며 차례로 들어와 앉아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에 두 여자는 서로 저한테 한 인사라며 정신을 못 차리고 소녀 팬들처럼 소리를 질렀다.
“꺅! 오빠!”
그룹 내에 아직 자신이 ‘오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멤버가 있다는 것에 은유는 얼마나 다행이라고 느꼈는지 모른다.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오빠’라는 소리를 내지르며 목이 터져라 좋아라 하던 두 여자는 점점 자신들의 차례가 다가오자 심장마비에 걸릴 것 같다며 서로의 등을 다독여주며 손을 꼭 잡고 기다렸다.
“아, 너무 떨려요 선생님.”
“나도. 나 진짜 떨려.”
“저 수능 볼 때보다 더 떨리는 것 같아요.”
“난 올해 들어서 제일…….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무튼.”
올해 들어서 제일 설렜던 건 역시 ‘프러포즈’를 받던 날이지.
그 뒤로 전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요즘, 좋아하는 가수의 팬사인회까지 왔으니 은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여자의 차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그 시각.
지혁과 원식과 함께 쇼핑몰로 들어선 낙원은 여기저기 보이는 커플들의 모습에 자꾸만 은유가 눈에 밟혔다.
“강낙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그냥. 은유 생각나서.”
이젠 적응이 될 때도 된 것 같은데, 이런 솔직한 낙원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영 어색하기만 한 원식은 고개를 저으며 넓은 어깨 위로 제 팔을 둘렀다.
“나와서도 그렇게 생각이 나냐?”
“형도 연애를 하라니까.”
“이것들이 맨날 달달 볶네.”
여전히 투닥거리며 쇼핑몰을 거니는 세 남자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큰 키에 잘생긴 외모, 환상적인 패션감각으로 무장한 세 남자는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비주얼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 커다란 쇼핑몰을 런웨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각자 할 말만 하며 걷던 그들은 지혁이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덩달아 멈춰서야 했다.
“왜 그래?’
“오늘 여기서 팬사인회 있는데.”
“무슨 팬사인회?”
“우리 재단에서 이번에 남자 아이돌 그룹이랑 주최하는 나눔 프로젝트 있거든. 강낙원 너도 알걸? 형수님이 좋아하는 아이돌.”
지혁의 입에서 나온 설명에 낙원의 입가에 걸쳐져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본 원식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굴 풀어라 강낙원.”
“걔들 얘기 내 앞에서 꺼내지 마.”
“야. 질투할 사람이 없어서 연예인한테 질투를 하냐?”
그렇게 말한 원식은 낙원과 눈이 마주친 순간 방금 제가 한 말을 주워담고 싶었다.
아니 뭐 이렇게 살벌해.
“나중에 형 와이프한테도 그래라. 안 겪어봤으면 말을 하지마.”
“……그렇게 싫어?”
“속 뒤집어져.”
이미 오만 인상을 쓰며 탐탁지 않아 하는 낙원을 보며 지혁이 씩 웃고는 한마디 던졌다.
“구경 갈래?”
“뭐?”
“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형수님이 그렇게 좋아하는지. 잘 진행하고 있나 보기도 할 겸. 겸사겸사?”
“겸사겸사는 무슨. 됐어. 안 가.”
“또 아냐? 그 수많은 팬들 사이에 형수님이 있을지.”
“은유 민지랑 백화점 갔어.”
“그니까 들어가서 구경만 하고 오자고.”
지혁의 고갯짓에 낙원은 하는 수 없이 저를 끌어당기는 원식과 발을 옮겼다.
싫기는 하지만 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아내가 그렇게 열광하는지 궁금하긴 했다.
심지어 민지까지 합세해서 그러는 걸 보면 뭐가 있긴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커다란 홀 앞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에게 지혁이 무어라 말을 하자마자 굳게 닫혀있던 문이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커다란 함성소리에 세 남자는 일제히 귀를 막고 홀 안을 쳐다보았다.
약 오십여 명 정도 되는 것 같은 인원들이 일제히 앞의 무대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행복함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인기 많다고는 들었는데, 장난 아니네.”
“말도 마. 이거 경쟁률 엄청났어. 우리 직원들이 서버 폭파하는 줄 알았단다.”
맨 뒤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내려다보던 세 남자들 중에서도 낙원은 멀리 떨어진 멤버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다들 휘황찬란한 색들로 머리를 물들이고, 귀걸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누가 봐도 ‘연예인’이었다.
“강낙원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시끄러워.”
“좀 가까이 가서 보자. 잘 보이지도 않는데.”
성큼성큼 걸어 내려가는 지혁의 뒤를 원식이 따랐고, 낙원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여기까지 온 이상 저 얼굴들을 똑바로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그들을 따랐다.
“여러분 점심 뭐 먹었어요?”
“김밥!”
“햄버거!”
“너는! 너는 뭐 먹었어!”
한 멤버의 질문에 여기저기에서 답변들이 쏟아져 나왔고, 능수능란하게 팬들을 다루는 그들을 보며 세 남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 많은 소리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골라서 듣는 건지.
아무리 들어봐도 자신들 귀에는 그저 ‘함성’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데.
그렇게 그 진귀한 광경을 구경하는 동안 무대에서 멤버들과 팬들을 컨트롤하던 매니저가 지혁을 발견했다.
후원자이자 이 프로젝트의 관리자인 그의 모습에 매니저가 크게 놀라며 한걸음에 달려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사장님! 말씀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아, 그냥 지나가다가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방해는요!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시죠!”
“하하. 아닙니다. 편하게 일 보세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관리자의 앞에서 편하게 일을 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무대로 다시 돌아간 매니저는 멤버들에게 그 사실을 전했고, 팬들과 사인을 하고 손 깍지를 끼면서 달달한 장면을 연출하던 멤버들이 일제히 그 세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느라 쉬고 있던 리더가 마이크를 들었다.
“여러분. 저희가 이 프로젝트 노강재단이랑 대안재단이랑 같이 하는 거 아시죠?”
“네!”
“평소에 저도 노강재단에서 좋은 일을 되게 많이 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오늘 그 이사장님께서 깜짝 방문을 하셨대요.”
리더의 그 한마디에 수많은 팬들의 시선이 멤버들에게서 그들에게로 옮겨졌고, 밀려드는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 낙원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제 머리를 매만지며 함박 웃음을 짓고 무대로 올라가는 여자.
두 손을 꼭 모으고 긴장한 것 같으면서도 유난히 들떠 보이는 여자.
“……강지혁.”
“왜?”
“……내가 지금 눈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뭐?”
“저기 저 여자. 심은유 아니지?”
낙원의 말에 지혁이 무슨 소리냐는 듯 그의 시선을 따라 옮기다 한 곳에서 멈췄다.
저거 분명히 형수님이랑 권민지 같은데.
“……쟤 민지 아니야?”
“그니까 형. 내 눈에만 권민지로 보이는 거 아니지?”
아직 세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은유와 민지는 무대 위로 올라 서면서부터 심호흡을 하며 한발자국씩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 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리더가 ‘노강재단’이라고 언급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은유가 첫 번째 멤버의 앞에 서자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이름을 물었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에요?”
“시, 심은유요.”
“은유? 이름 예쁘시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 저 스물 여섯이요.”
“아 진짜? 그럼 내가 오빠네?”
세상에. ‘오빠’란다. 오빠!
그 황홀함에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씩 웃으며 앨범에 사인을 해준 그가 반지를 모두 뺀 뒤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서있는 은유의 앞에 커다란 손을 흔들어 보인 그가 예쁘게 웃으며 물었다.
“나랑 손 안 잡을 거야?”
“……네? 아, 아뇨! 자, 잡아요!”
천천히 손을 잡은 순간 그 손 끝으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감촉에 은유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손을 잡았다. 손을!
그런데 남편의 손보다는 조금 작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자.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그 뒤로도 멤버들과 눈을 마주치며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잡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마지막으로 리더 앞에 서자 특유의 예쁜 웃음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안녕하세요~”
“네, 네. 안녕하세요!”
“긴장 되세요?”
“네. 엄청 떨려요. 너무 잘생기셨어요. 노래도 너무 잘 듣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심은유에요.”
“이름도 예쁘시다. 사인회는 처음 오신 거에요?”
“네!”
민지가 아직 전 단계에서 사인을 받고 있어서 은유 또한 리더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졌다.
손까지 잡았는데도 내려가라는 말이 없어 우물쭈물하는 은유를 보며 리더가 환하게 웃었다.
“남자친구 있어요?”
“저, 저요?”
“네. 웃는 게 되게 예쁘세요.”
“아, 가, 감사합니다! 저 남자친구 없어요.”
“정말? 이렇게 예쁘신데?”
“하하……. 저 사실 유부녀에요.”
쑥스럽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리더가 정말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유부녀란다.
옆에서 민지에게 사인을 해주던 장난꾸러기 멤버가 급히 마이크를 들었다.
“대박! 우리 유부녀 팬도 있어요 여러분!”
다들 자신들이 사인을 해주고 이야기를 나눴던 젊은 여자가 ‘유부녀’라는 사실에 꽤나 놀랐는지 서로 진짜냐고 물었다.
남편 다음으로 많이 아껴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은유가 그 작은 헤프닝을 뒤로하고 무대를 내려왔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려던 순간, 저 끝에 서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말도 안 돼.”
제 몸이 뚫릴 것 같이 심각하게 쳐다보고 있는 남자는 다시 봐도 남편인 낙원이었다.
그래. 어쩐지 운이 좋다 했다.
올해 운은 여기로 다 쏟았다 했다.
정말 딱 거기까지가 올해의 운이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은유는 혼이 나간 얼굴로 제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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