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우리 계속 같이2016.12.29.
세 사람의 지원사격으로 배도 든든하게 채웠겠다, 스태프들 몫까지 준비해온 센스에 예쁨도 받았겠다.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지혁은 오랜만에 보는 친구에게 다가가 특별히 더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자 친구는 걱정 말라며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능력을 오늘 불태우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바람대로 모든 장면들이 너무나도 예쁘게 연출되었고, 그는 그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 옷으로 갈아 입으시면 됩니다.”
은유의 마지막 드레스는 낙원이 골라주었던 벨 라인의 드레스였다.
주름진 튜브 탑에 허리 라인에 반짝이는 크리스탈이 촘촘하게 박혀 잘록한 허리를 더 강조해주었고, 그 아래로 풍성하게 퍼진 쉬폰 소재가 사랑스러움을 극대화시켜 주었다.
이번엔 긴 머리칼을 하나로 말아 올려 눈이 부신 티아라로 고정시키자 그야말로 완벽한 신부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온 은유는 제법 조용한 내부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낙원씨는요?”
“신랑님께서는 아직 준비 중이세요. 곧 나오실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번엔 준비가 조금 늦어지나 보다, 하고 얼마나 더 멋진 모습으로 나올지 기대감에 부푼 은유는 텅 빈 스튜디오 안을 구경하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 동안 남자 피팅룸에선 긴장한 얼굴의 낙원이 쉬는 시간에 몰래 꺼내온 커다란 꽃다발을 손에 든 채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촬영이 막바지로 접어들었고, 이제 대망의 프러포즈만 남았다.
이런 저런 말들을 생각하며 연습을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제 진심을 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막상 이 순간이 되니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한 것만 같았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 중 하나를 앞둔 지금, 낙원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앞에 선 은유가 제 모습을 점검하며 낙원을 기다리고 있던 그 때, 갑자기 스튜디오 내부의 조명이 꺼지며 주위가 어둠으로 휩싸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것도 잠시, 그 어두웠던 곳에서도 은유가 서있는 곳에만 작은 조명이 켜졌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사이에 하얗게만 보였던 스튜디오의 벽에 음악과 함께 영상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첫 사진은 낙원과 야외에서 결혼식을 하던 날 찍었던 것이었다.
커다랗고 예쁜 펜션 앞에서 소박한 드레스를 입고 턱시도를 입은 그와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모습.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 생생하기만 한 그 장면들은 지금과는 정말로 많이 달랐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리고 신혼여행에 가서 함께 찍었던 사진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갑작스럽게 신혼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그 곳에서 남편의 여자가 되었던 생각이 나 금새 얼굴이 붉어졌다.
낯선 곳에서 서로만을 의지한 채 손을 꼭 잡고 거닐던 거리들과 함께 보았던 예쁜 풍경들.
그 장면들을 바라보며 공유한 감정들이 사진을 보니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부부싸움을 하고 시댁에서 그에게 안겨 울던 제 모습이 나타나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과는 다르게 입술엔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졌다.
처음으로 그와 심하게 다투고 시댁에 갔던 날. 시댁 식구들은 아들인 그보다 며느리인 자신의 편을 들어주며 정말 가족이구나 하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주셨다.
그 동안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들이 머리 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은유의 두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영상이 끝나갈 때 즈음 평범하게만 보였던 스튜디오 천장이 돔 형식으로 열리며 까만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이 쏟아져 내리듯 그녀를 비췄다.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던 그 그림과도 같은 장면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은유야.”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그 끝엔 빨간 장미가 촘촘하게 들어찬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는 남편이 있었다.
검정색의 턱시도에 검은 머리를 올려 고정시켜 시원하게 이마를 드러낸 낙원은 누가 봐도 긴장한 사람처럼 제법 얼굴이 굳어 있었다.
마치 깜깜한 극장 속에 두 사람이 주인공인 것처럼 조명과 별빛 아래 마주보고 선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너랑 같이 지내면서 잘 웃지도 않던 내가 웃음이 많아졌고.”
유난히 잔잔하기만 했던 자신의 인생은 형의 죽음으로 인해 어두운 밤처럼 짙은 어둠이 찾아와 더 고요해졌다.
“…….”
“누굴 사랑하는 감정도 모르던 내가 사랑을 배웠고.”
그런 제게 아내가 생겼고, 거짓말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웠다.
“너랑 발을 맞춰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길이 다 행복했고.”
아내의 옆자리에서 함께 걸어온 길들은 모든 곳이 행복한 여행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매번 상상하지 못한 선물을 받는 것처럼 너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소중했어.”
잔잔하게 전해오는 남편의 목소리는 귓가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크게 들려왔다.
낙원을 바라보는 은유의 두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목이 따끔거리며 메이고, 코끝이 찡해졌지만 마주한 남편의 모습을 똑바로 보려고 애썼다.
천천히 은유의 앞으로 다가온 낙원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지금까지 어두운 밤과 같았던 나를, 너를 비추는 별처럼 만들어줘서 고마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네가 더 빛나도록 노력할게.”
네가 아무리 어두운 곳으로 가더라도 내가 널 비춰서 길을 헤매지 않도록 할게.
내 옆이 아니어도 항상 빛나는 사람이지만 내가 옆에 있음으로써 네가 더 예쁘게 빛이 났으면 좋겠어.
“……낙원씨…….”
은유를 마주한 순간부터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점 더 요동치고 있었다.
그 심장을 안고 낙원이 한 발자국 더 다가가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우리 계속 같이 살자.”
“……흑…….”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터져 나왔다.
제가 건넨 꽃다발을 두 손으로 받으며 울음을 터뜨린 아내를 본 낙원이 두 팔로 작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은유야.”
“……흑……. 사랑해요.”
눈물을 떨구면서 전해 오는 진실한 고백에 낙원의 심장에 커다란 파도가 몰아쳤다.
부드럽게 감싸 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숙인 낙원도 제 마음을 그녀에게 전했다.
“사랑해. 은유야.”
그 말과 함께 낙원의 붉은 입술이 은유의 보드라운 입술 위에 안착했고, 동시에 뒤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작가가 조용히, 그리고 하나도 빠짐없이 그 장면을 담아내었다.
잠시 후 주변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에도 두 사람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오랫동안 그렇게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머리 위로 흩뿌려진 까만 별들이 은하수처럼 두 사람의 앞날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은유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프러포즈였다.
촬영은 물론이고 평생 잊지 못할 프러포즈를 받고 향한 곳은 두 사람의 집이 아니었다.
늘 두 사람이 출퇴근을 하며 지났던 길들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노강호텔의 스위트 룸에 들어서면서도 은유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먼저 샤워를 하고 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장미 꽃다발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씻고 나온 낙원이 등 뒤에서 부드럽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작은 머리에 수없이 입을 맞추던 낙원이 은유의 허리를 감싼 제 손위로 포개어져 있는 작은 손을 내려다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좋다.”
“……저도요.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한 거에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웨딩 사진을 찍었던 곳에서 다시 사진을 찍는 것도, 프러포즈를 받는 것도.
의아한 듯 묻는 은유를 돌려 세워 마주보고 선 낙원이 젖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애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계속 신경 쓰였어.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식 했다는 게 많이 미안했거든.”
“……전 괜찮은데…….”
“꼭 해주고 싶었어. 한번뿐인 결혼인데 프러포즈도 못 받았잖아.”
남편의 자상함에 은유는 다시 눈시울을 붉히고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엄청 긴장했는데, 다행이다.”
그가 긴장을 한 모습이라니, 상상이 되지 않던 모습이었지만 몇 시간 전의 그는 정말로 잔뜩 얼어 있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작가님께서 잘 찍어주셨겠죠?”
“그렇겠지. 예쁘게 나올 거야. 너 정말로 예뻤으니까.”
“낙원씨 옆에 있어서 그래요. 별처럼 나 빛나게 해주잖아요.”
제가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며 마주해오는 시선에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현명하고, 아름다운 네가 내 아내라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믿을 수 없을 거다.
자신의 세상에 찾아와준 아내에게 감사하며 낙원이 은유의 입술에 짧게 여러 번 입을 맞추었다.
“약속할게. 계속 빛날 거야, 심은유.”
“……고마워요. 살아가면서 길을 잃어도, 나 비춰주는 낙원씨 보면서 잘 찾아갈게요. 우리 같이 잘 걸어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창 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불빛들을 뒤로한 채 은유의 두 팔이 낙원의 목을 끌어 안았다.
그런 은유를 그대로 들어 올려 안은 낙원이 입술을 부딪히며 침실로 향했다.
그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로 숨결을 나누던 두 사람은 침실 입구부터 뿌려져 있는 장미꽃잎에 의아한 듯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거 낙원씨가 한 거에요?”
은유의 물음에 낙원은 잠시 말이 없다 살며시 웃으며 꽃잎이 흐트러진 침대 위로 아내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별님 선물이야.”
“네?”
“너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라고, 우리한테 주는 선물.”
오늘 웨딩 사진을 찍는다는 자신의 말에 제 손에 조용히 스위트 룸 열쇠를 쥐어주시던 아버지가 생각이 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쳐졌다.
“낙원씨?”
“우리도 선물 드려야겠다.”
“네?”
“예쁜 너 닮은 아이 낳고, 알콩달콩 살고 싶다고.”
여전히 웃는 얼굴로 저와 마주보는 남편을 보며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 은유가 두 팔을 벌려 낙원의 너른 어깨를 안았다.
“낙원씨 닮아도 좋아요.”
작게 떨리는 음성에 낙원이 커다란 손으로 은유의 목 뒤를 부드럽게 쓸며 하얀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둘 다 닮도록 노력해보자. 지금부터.”
그 간지러운 달콤한 미성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매트리스에 파동을 일으키며 조금의 틈도 없이 겹쳐졌다.
절대로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행복.
죽을 때까지 모를 것만 같았던 감정.
비록 남들과는 다른 시작을 했지만 그 끝은 어떤 누구보다 더 아름답고 환하게 빛날 것이다.
지금까지 함께 걸어왔던 것보다 앞으로 걸어갈 날이 더 많고, 지금까지 함께 웃어왔던 것보다 앞으로 웃을 날이 더 많은 이 순간.
“사랑해요.”
늘 그래왔듯 제 심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그 모습에 낙원이 사랑스러운 아내를 꽉 끌어안았다.
“사랑해.”
“……사랑해요.”
서로를 향한 걸음이 설레는 지금.
그들의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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