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주인공은 나라고2016.12.27.
째깍. 째깍.
희미한 불빛이 시야로 천천히 스며들며 눈이 부셔왔다.
커다란 손을 뻗어 시야를 가려보지만 제 손으로 가려지지 않는 빛이었다.
빛이 스며들며 작은 소음이 볼륨을 키우듯 점점 크게,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소음의 근원은 텔레비전이었다. 또 그 날의 꿈이다.
침대 위에 누워서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 화장실에 있을 무원.
띵동.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려오자 지혁의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이제 막 화장실에서 나오는 무원과 마주쳤다.
“내가 나가볼게. 오기로 한 사람 있어.”
저번에 한 번 이 장면을 본 후로 처음이었다.
오기로 한 사람이 있다는 무원의 말에, 꿈 속의 지혁이 무원을 보며 물었다.
“오기로 한 사람? 낙원이 오기로 한 거 아니야?”
지혁의 물음에 무원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거실 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모든 상황을 다 아는 지금 보는 장면은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낙원이는 아직 출발 안 했어. 형이 나갈 테니까 너는 들어가 있어.”
“누군데 그래? 여자라도 와?”
“아니야 임마. 저번에 자선파티 때 봤던 김태형 전무.”
저번엔 들리지 않았던 그 이름이, 오늘은 또렷하게 잘 들려왔다.
무원은 웃으며 지혁에게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하고는 현관으로 나섰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지혁이 보였다.
저번 꿈속에선 이 장면에서 멈췄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빨리 감기를 누른 것처럼 시끄러운 소리가 빠르게 재생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로 나가는 제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거실엔 그 동안 꿈속에서 수없이 봐왔던 모습이 다시 재생되어 있었다.
“……형…….”
깨진 유리 파편과 널브러진 가구들. 그리고 거실 한쪽에 고인 피 웅덩이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의 형.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는 멈출 생각이 없었고 빠르게 무원을 적셔갔다.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간 지혁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에 손도 뻗지 못한 그가 온 몸을 떨며 휴대폰을 꺼냈다.
지금까지는 늘 이 장면에서 꿈에서 깨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는 무원을 안고서 휴대폰을 꺼내는 자신의 손을, 그 커다란 손이 따뜻하게 잡아왔다.
“……하지…마…….”
“형…….”
“쿨럭.”
늘 예쁘게 웃어주던 입술 사이로 피를 토해낸 무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형. 형 말하지마. 내가, 내가 금방 신고할게.”
“하지……마……. 강지혁. 똑바로, 잘 들어…….”
숨소리가 희미해져 가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 동안, 무원은 지혁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에 온 힘을 주었다.
“……원식이한테……. 전화해……. 경찰은, 안돼…….”
“형. 형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넌……. 여기…. 여기, 없었어.”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커다란 몸을 끌어안고 우는 지혁을 보며 무원이 천천히 입 꼬리를 늘였다.
“지혁아……. 살아. 넌 꼭, 살아. 그러려면……. 하…….”
“형. 죽지마. 죽지마 형.”
“……그러려면, 넌. 넌 여기, 없던 거야……. 강지혁. 정진, 건설. 조심해…….”
그 말을 끝으로 무원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고, 잡았던 손에선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울며 원식에게 전화를 걸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도착해 힘없이 늘어진 무원을 데리고 나갔다.
정신 없는 공간에서 자신의 시간만 멈춰있던 그 순간.
원식의 손에 이끌려 구급차에 태워졌지만 그 안에서 정신을 잃었다.
어두운 방 안, 침대 위에 누워있던 지혁은 축축하게 젖은 베개에서 눈을 떴다.
‘살아. 넌 꼭, 살아.’
무원이 신고하지 말라고 했다던 말.
‘그러려면, 넌 여기 없던 거야.’
자신의 숨이 끊어져 가는 그 순간에조차 신고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막았던 이유.
‘넌 여기 없었어. 정진건설 조심해.’
저를 위해서였다.
사랑하는 형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그 순간에도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신고를 했다면 그 자리에 내가 함께 있었다는 게 세상에 밝혀졌겠지.
그랬다면 난 정진그룹의 표적이 되었을 거고, 형과 같이 끔찍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겠지.
그걸 내다보았기에 형은 그렇게도 날 말렸던 거였다. 자기 목숨을 버려가면서.
날 살리려고, 날 지키려고.
“……형……. 미안해……. 미안해. 내가, 내가 미안해…….”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 시퍼런 칼날에 몇 번이고 당신 몸이 망가졌으면서, 사는 게 행복하다던 당신은 생의 마지막과 마주한 순간 살 수 있었음에도 날 위해서 그 희망을 버렸다.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그 마음이 얼마나 속상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크기에 지혁은 한참을 울었다.
더 일찍 기억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그 희망을 버리게 한 죄책감에.
.
‘나 기억이 다 났어.’
그 전화를 받은 지 30분 만에 지혁의 집 앞에 도착한 낙원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초인종을 눌렀다.
길게만 느껴졌던 몇 초가 지나고, 현관문이 철컥 열리며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있는 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지혁.”
“들어와. 추워.”
지혁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선 낙원은 한기가 느껴지는 집안을 둘러보다 거실 벽으로 가 보일러를 켜고는 소파 위에 놓인 담요를 들어 지혁의 몸에 둘러주었다.
“추워 죽으려고 작정했냐?”
“……몰라.”
“강지혁.”
“……내가 죽인 거 맞아, 무원이형.”
잔뜩 잠겨있는 목소리에 낙원이 불안한 얼굴로 지혁을 쳐다보았다.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마른 세수를 한 지혁은 조금 전의 꿈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때론 덤덤한 목소리로, 또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뭐라고……. 왜 나 때문에…….”
더 이상 울 힘도 없을 만큼 많이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올라 기어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수도꼭지를 튼 것마냥 쉴새 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낙원이 울음을 삼키며 지혁을 끌어 안았다.
“그게 왜. 그게 왜 네 잘못이야.”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강낙원. 무원이형,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아니야. 그건 형 선택이었어. 절대로 네 잘못 아니야, 강지혁.”
“……내가……. 내가 미안해……. 미안해 형. 내가 잘못했어.”
“괜찮아. 괜찮아 강지혁. 다 괜찮아.”
한참 동안 울음을 토해내던 지혁은 축 처진 몸을 낙원에게 기댄 채로 침실로 들어왔다.
침대 위에 지혁을 눕힌 낙원이 장롱에서 이불을 더 꺼내 세 겹이나 덮어준 뒤에야 벌개진 얼굴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너 나한테 감기 옮겼으면 죽는다 진짜.”
“……아픈 사람한테 협박하냐?”
“죽 끓여놓고 갈 테니까, 자고 일어나서 먹어.”
“됐으니까 집에나 가. 형수님 아직 못 걸으시잖아.”
“민지 있어. 넌 혼자 사는 티를 이렇게 내야겠냐? 보일러 좀 틀고 살아. 돈도 많으면서 그 돈 다 어디다 쓰냐?”
“네 학생 후원하는데 쓴다. 왜.”
“하여간 한마디를 안 져요. 입 다물고 누워나 있어.”
방문을 열고 주방으로 향하는 낙원의 뒷모습에 지혁이 작게 웃으며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따뜻함에 잠이 잘 올 것 같다.
하얀 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날, 카페에 앉아 커피를 시켜놓고 앉은 세 남자의 표정은 심각했다.
“프러포즈를 한다고?”
“몇 번을 물어봐. 그렇다니까.”
“결혼했는데, 프러포즈를 한다고?”
계속된 원식의 질문에 낙원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지혁이 혀를 끌끌 차며 원식의 어깨를 두드렸다.
“형. 공부만 하느라 연애세포가 다 죽었지? 얘 선봐서 결혼했잖아. 그랬으니 당연히 프러포즈도 안 했을 거고.”
낙원은 이제야 말이 좀 통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혁은 귀찮다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테이블 앞으로 상체를 바짝 끌어당겨 앉았다.
“뭘 어떻게 할 건데?”
“웨딩사진 찍을 거야.”
“프러포즈가 먼저야, 웨딩사진이 먼저야?”
“둘 다.”
“같이 하겠다고?”
“어.”
은유가 퇴원하고 집으로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꼬박꼬박 물리치료를 잘 받은 덕분에 이젠 완치가 되어 일상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미뤄뒀던 웨딩 촬영을 진행해볼까 하다 문득 프러포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래서 오늘 하루 은유와 민지에게 오붓하게 데이트를 하라며 내보낸 후, 원식과 지혁에게 긴급호출을 해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머리를 맞대봤자 이렇다 할 좋은 방법이 생각나진 않아 괜히 불렀나, 하고 생각하던 도중 원식이 손뼉을 짝 쳤다.
“웨딩 촬영하면 사진 나오나?”
“당연한 걸 왜 물어?”
“그 얘기하니까 생각났는데, 그 동안 제수씨랑 같이 찍은 사진들 없어? 그거 모아서 영상 만들고, 촬영 끝난 후에 틀어주면서 프러포즈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도 그 생각 하긴 했는데, 뭔가 더 큰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큰 거?”
지혁의 물음에 낙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젯밤 일을 회상했다.
여느 날처럼 저녁을 먹고, 셋이 거실에 모여 드라마를 한창 보고 있었다.
마침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호텔 스위트 룸을 빌려 그 안에 전부 풍선으로 가득 채우고, 촛불로 하트를 만들어 피아노 연주를 해주며 장미꽃을 선사했다.
그 모습에 민지가 입을 헤 벌리며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은유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선생님. 저런 프러포즈 어때요? 멋있지 않아요? 뻔하긴 한데, 실제로 받으면 엄청 감동적일 것 같아요.”
“응 뭐. 마음만 담겨있으면.”
‘마음만 담겨있으면’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앞의 ‘응’이라는 대답이 심히 마음에 걸렸다.
혹시 은유도 저런 프러포즈를 원하는 건가 싶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어 밤새 끙끙 앓다가 아침부터 일찌감치 두 남자에게 온 것이었다.
“야. 절대 아니야. 형수님 성격에 그렇게 휘황찬란하고 삐까뻔쩍한 프러포즈? 전혀다, 전혀. 절대 하지마.”
“근데 의외로 또 좋아할 수도 있잖아?”
“아 원식이형 진짜. 연애 안 해본 티 이렇게 낼 거야?”
“야, 강지혁. 너 자꾸 나보고 연애 안 해본 티 낸다고 하는데. 넌. 그러는 넌 퍽이나 많이 했냐?”
“난 했는데. 많이.”
저기. 우리 지금 주제를 벗어난 것 같은데.
“뭐? 언제? 네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어?”
“왜 없어? 영국에서 5년이나 있었는데.”
“……너 설마 그 동안 연애했냐? 야! 너 아팠다며!”
“환자는 연애도 못 하냐? 마음의 상처를 치료할 겸, 뭐 겸사겸사 했지.”
“겸사겸사? 이자식이! 그래서, 몇 명이나 만났어? 어?”
하……. 저기.
주인공은 나라고, 이 사람들아.
‘내 프러포즈’가 주제라고.
그렇게 외치는 낙원은 안중에도 없는지, 지혁과 원식은 그간의 연애생활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치기 시작했고 결국 낙원은 집어치우라며 카페를 나섰다.
“아 진짜. 형 때문에 쟤 삐쳤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야, 강낙원! 같이 가! 그나저나 너 몇 명이나 만났냐?”
“아 좀! ……다섯 명.”
“뭐어? 5년 동안 다섯 명? 이 자식이!”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낙원을 쫓으면서도 두 남자의 입은 쉴 틈이 없었다.
해가 지났어도 그들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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