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졸업식2016.12.26.
사상 최대의 살인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지혁은 민지의 증언에 따라 제 재단에 있던 사람 중 스파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믿었던 직원을 제 손으로 직접 잘라내었고, 내부 보안을 강화했다.
준원은 지혁과 함께 무원의 살인사건과 은유와 민지의 납치사건에 대한 수사에 최대한 힘을 보탰다.
그리고 국민들의 엄청난 분노로 수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들과 증인들, 그리고 몇몇의 자백으로 인해 사건은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지혁의 말에 의하면 5년 전, 무원을 살해했던 실제 살인범들은 결코 짧지 않은 징역형을 받을 것이라고 전해왔다.
그들은 일본으로 출장을 간 태형을 대신해 김태민 회장의 지시로 무원의 집으로 가서 태형이 못 오는 대신 선물을 보내왔다는 말로 그 집에 들어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그리고 살인사건의 직접적인 지시와 이번 납치 사건의 배후인 김태민 회장은 사회적 위치와 그 죄질이 무거워 실제 살인범들 못지 않은 형을 선고 받을 것이고, 권중식 의원도 살인 방조죄와 납치, 아동학대까지 추가해서 비슷한 형량을 선고 받을 것이다.
그리고 민지의 사촌언니와 엄마도 학대 죄로 구속수사를 받게 되었다.
정진그룹으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긴 국회의원들도 국민들의 목소리에 계속해서 검찰조사를 받으며 탈당을 하게 되었고, 이 기회에 부정부패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말들이 강하게 터져 나왔다.
그 속에서 태형은 이사직을 사퇴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현재 기업이 위태로운 만큼 직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사퇴하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전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에게 들른 태형은 투명한 창 너머로 참담함 얼굴을 하고 마주앉은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식사는요.”
“……생각이 없구나.”
“아직도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세요?”
태형의 질문에 태민의 시선이 땅에서 아들에게로 옮겨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냥 어린 아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훌쩍 컸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다 널 위해서였다.”
“여전하시네요.”
“……남들이 다 욕할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너에겐 최고의 자리만 주고 싶었고, 그게 널 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보세요. 그렇게 하셨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운이 없었을 뿐이야.”
“앞으론 오지 않을 겁니다.”
매정한 목소리에 태민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제가 알던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혹시라도 뉘우치고 반성하신다면 생각은 해보겠습니다만, 기대하지는 마세요. 자기 자식 귀한 줄 아시면, 남의 자식 귀한 줄도 아셨어야죠. 이제 와서 소용 없는 말이지만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말을 마치고 나자 미련 없이 일어서서 돌아서는 아들을 지켜보는 태민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차 올랐다.
넌 나처럼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 마음 그대로, 예쁘게 자랐으면 좋겠구나.
내 아들로 살아줘서 고마웠다. 태형아.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친 은유는 침대 위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팔을 쭉 뻗으며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스트레칭을 했다.
요새 계속 먹고 자고 치료만 받다 보니 살이 꽤 붙은 느낌이 들어 위기감을 느꼈다.
한참 동안 스트레칭을 하며 굳은 몸을 푸는 사이,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며 병원으로 퇴근을 한 낙원이 들어섰다.
“나 왔…….”
“왔어요?”
아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서던 낙원은 눈 앞의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얀 형광등 아래에서 침대 위에 앉아 허리를 틀고 있는 은유는 병원 복을 입고 있어도 섹시했다.
아니, 근데 단추는 왜 저렇게 많이 푸른 건데?
“……뭐 해?”
“매일 먹고, 자고, 치료만 받았더니 몸이 많이 굳은 것 같아서 스트레칭 좀 했어요. 손에 그거 케이크에요?”
고개를 끄덕이며 은유에게로 다가선 낙원은 케이크 상자와 가방을 옆쪽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선 침대 위로 허리를 굽혔다.
두 손으로 풀어진 단추를 꼭꼭 채워주는 낙원을 보며 은유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 하세요?”
“감기 걸리게 단추는 왜 풀었어.”
낙원의 떨리는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은유는 샐쭉 웃으며 잘 채워준 단추를 다시 풀었다.
이 여자가 진짜.
“더워서요. 오랜만에 스트레칭 했더니 개운해요.”
“……그래서, 몸은 다 풀렸어?”
“아뇨. 스트레칭 좀 자주 하려고요. 그러다 보면 풀리겠죠?”
“내가 풀어줄까?”
“네?”
은유의 물음에 낙원은 천천히 손을 뻗어 환자복 안을 파고들었다.
그제야 그 질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은유가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나, 낙원씨?”
“그러게 왜. 왜 풀고 있어.”
“아, 아니. 저는 그냥 더워서……. 저 많이 풀지도 않았는데.”
눈에 띄게 당황한 은유를 보며 낙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작은 몸을 침대 위로 눕히고선 불을 끄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낮에 혼자 쓸 때는 넓게만 느껴졌는데, 낙원이 올라오니 떨어질까 봐 본능적으로 그에게 제 몸을 꼭 붙였다.
그 행동에 죽어나는 건 낙원이었다.
“아 진짜…….”
“왜, 왜요? 저 떨어질 것 같아요 낙원씨.”
“내가 잡았어.”
“……자세가 조금…….”
침대에 누워 있는 은유의 위로 제 몸을 내린 낙원은 두 팔로 은유의 얼굴 양 옆을 지탱하고 있었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잔뜩 얼어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네, 네?”
“너 아플까 봐 손도 못 댔는데.”
“……밤마다 손은 댔잖아요…….”
“네가 자극한 거야.”
“뭐, 뭐를요?”
“뭐긴 뭐야. 네 남편이지.”
“……여기 병원인데요?”
“아무나 못 들어오는 VIP실이지.”
그렇게 말하며 낙원의 손은 이미 은유의 환자복 안을 자유롭게 헤집고 있었다.
발 끝에 힘이 꼭 들어가며 두 눈을 감았다 뜬 은유는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누, 누가 들어오면요?”
“안 들어와.”
“그, 그래도요. 가, 갑자기 의사 선생님이나, 민지나.”
“민지는 친구들이랑 있고. 의사는 회진 끝났고.”
바닥으로 툭. 은유의 환자복 상의가 떨어졌다.
“아, 아무래도 안되겠는데요.”
“나도 안되겠어.”
붕대를 감고 있어 한쪽 손이 자유롭지 못한 게 낙원에게 있어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천천히 제 입술 위로 내려온 부드러운 촉감에 은유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낙원이 잔잔한 미소와 함께 가느다란 허리 아래로 손을 넣어 자신의 몸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인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환자인 아내의 상태를 고려해서 관계를 하지 못했고, 몸에서 사리가 쌓이는 것만 같았다.
은유의 만류에도 매일 이곳에서 출퇴근을 하며 잠은 꼭 아내의 옆에서 같이 잤다.
물론 잠만 잔 건 아니었지만, 그 동안 나름대로 얼마나 참았는지 은유는 절대 모를 것이다.
그렇게 참아온 만큼 한번 터진 욕망은 뜨겁게 타올랐고, 은유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꾹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낙원은 은유를 바짝 안으면서도 하얀 얼굴 위로 짧은 키스를 흩뿌렸다.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흔들리는 시야로 보이는 남편의 얼굴에 은유가 붕대를 감지 않은 다른 팔로 낙원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자유롭지 못한 팔이 흔들리지 않게 단단하게 잡고서 도톰한 입술을 문 낙원은 며칠 동안 참아온 마음을 가득 담아 더 깊이 파고들었다.
조용하고 넓은 병실 안엔 두 사람의 짙은 숨소리로 열기를 더했다.
옷을 다시 걸쳐 입은 채 제 팔에 머리를 베고 누워 새근새근 잠이 든 아내를 바라보는 낙원의 시선에선 꿀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넘쳐 흐를 정도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기분에 꽤 많이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러면서도 제게 안겨오는 그 모습이 예뻐 멈출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꽤나 격렬했던 스트레칭으로 근육이 이완된 아내는 노곤함에 지쳐 잠에 들었고, 낙원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온 세상이 멈춘 것 같고, 이 넓은 세상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기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정에 파도가 밀려오듯 크게 숨을 들이쉰 그는 땀으로 젖어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고는 볼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자는 것도 예쁘네.”
“…….”
“잘 자. 은유야.”
아침 일찍 일어난 은유는 낙원의 도움을 받아 깨끗하게 씻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휠체어를 타고 민지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오늘은 노강고등학교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나란히 차에 오르니 예전 생각이 떠올라 민지는 새삼 시간이 빠르구나, 하고 느꼈다.
백미러로 멍하니 앉아 있는 민지를 보던 낙원이 작게 웃으며 부드럽게 핸들을 틀었다.
“긴장돼?”
“네? 아, 아뇨.”
“뭘 그렇게 굳어 있어.”
“그냥……. 기분이 좀 이상해서요…….”
민지는 원래 다시 호주로 돌아가 남은 어학연수를 마쳤어야 했지만, 사건 이후로 심리적인 안정이 필요했기에 어학연수는 포기하고 병원에 입원을 했다.
두 사람의 병실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낙원은 그 두 병실을 오가며 소중한 두 여자를 살뜰하게 챙겼다.
여전히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민지를 보며 차를 세운 낙원은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 은유를 안아 그 위에 앉히고는 무릎 위로 담요를 덮어주며 무릎을 굽혀 앉아 눈을 마주했다.
“춥지 않겠어?”
“네!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걱정 말고 가자.”
민지의 졸업식은 꼭 참석하고 싶다는 은유의 간절한 부탁에 낙원은 자신이 옆에 꼭 붙어 있겠다는 마음으로 허락했다.
민지는 먼저 교실로 향했고, 은유가 앉은 휠체어를 밀고 교무실로 들어오는 낙원에게로 다가온 선생님들이 안부를 물었다.
“심선생님! 괜찮아요?”
“뉴스 봤어요. 세상에, 휠체어 탈 정도면 많이 다친 거 아니에요?”
그 날 일은 노강고등학교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낙원이 사실은 노강호텔 강준원 사장의 둘째 아들이었고, 큰아들인 무원의 살인사건은 민지의 큰아버지인 권중식 의원이 은폐하려고 했었다.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일임과 동시에 놀라운 일이었는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제 책상 앞에 앉은 은유는 걱정스런 얼굴로 저를 보는 다현과 윤주, 그리고 은혁을 보며 밝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심선생!”
그 동안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병문안을 가려고 했지만 심리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다는 낙원의 말에 기다렸고, 졸업식에 참석하겠다고 해서 괜찮은가 싶었는데 오늘 보니 아직 걷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여 마음이 쓰라렸다.
낙원이 오랜만에 학생들과 만나기 위해 교실로 들어가고 난 후, 은유는 다현과 함께 따뜻한 카페 안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얼마나 무서웠어. 지금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죄송하긴! 병문안 못 가서 우리가 미안하지. 퇴원은 언제야?”
“내일 모레요. 답답해서 얼른 집으로 가고 싶어요.”
발목 물리치료도 계속 받아야 하고, 이제 민지와 나란히 심리치료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병원을 제집 드나들 듯 다녀야 했지만 그래도 얼른 퇴원을 했으면 좋겠다.
은유가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는 동안 교실로 들어온 낙원은 학생들 한 명, 한 명에게 졸업증서를 나눠주고 안아주며 이별을 준비했다.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울먹이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울컥했지만, 같이 울 수는 없었기에 낙원은 마음을 다잡으며 1년 동안 고생했던 제 아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부족한 나랑 불평 없이 같이 해줘서 고마웠고, 다들 고3 불태우느라 수고 많았고.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도 늘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란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없어도 연락하면 더 좋고.”
“선생님! 은유선생님께서는 괜찮으세요?”
손을 번쩍 들고 해온 질문에 낙원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심선생님도 괜찮고. 안부 물어줘서 고맙다.”
뉴스를 통해 담임선생님과 은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이들은 호들갑을 떨며 엄마를 찾았다.
자신들의 선생님들이 숨겨왔던 비밀과 어른들의 만행에 얼마 남지 않은 졸업식까지 마음을 졸였는데, 괜찮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오늘 이렇게 직접 보니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런 학생들의 마음이 예뻐 낙원의 눈가에 결국 눈물이 맺혔다.
“아, 쌤! 우시면 안돼요! 저희도 참고 있단 말이에요!”
“너희는 아까 다 울었잖아.”
커다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투덜거리는 담임선생님이 귀여워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하며 인사를 나눈 낙원은 학생들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이미 도착해있던 은유의 뒤로 보인 지혁의 모습에 낙원이 천천히 그 앞으로 걸어갔다.
“네가 데려왔어?”
“어. 형수님 잘 좀 챙기지?”
“잔소리 하지마. 알아서 챙길 거야.”
투닥거리면서도 낙원은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고, 지혁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휙휙 내저었다.
커다란 운동장에 아이들이 하나 둘씩 줄을 서기 시작했고, 노강고등학교 졸업식 시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런 오늘을 기념하듯, 하늘에선 하얀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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