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진실이 이긴다2016.12.25.
별장 안으로 잠입한 경호원들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조폭들을 조용하면서도 능수능란하게 제압하며 별장 곳곳을 조용히 뒤졌다.
1층과 2층을 모두 둘러보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인질들은 없었다.
마지막 남은 지하.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던 경호실장은 지하 복도 오른쪽 방에서 나오는 납치범과 두 여자를 보고 뒤로 몸을 숨겼다.
계단 위쪽으로 작게 난 공간에 몸을 숨겼던 경호실장은 맨 앞에서 먼저 걸어 올라오던 민지와 눈이 마주쳤고, 그가 급하게 입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민지가 뒤를 보며 눈치를 보자 은유가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그 입 모양에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계단을 모두 올라섬과 동시에 경호원이 민지를 조용히 잡아당겼다.
눈앞에서 민지가 사라지자 놀란 것도 잠시, 맞은 편에서 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경호원을 보고 제 뒤에 서있는 남자의 눈치를 보던 은유가 빠르게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가려다 발목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통증에 주저앉았다.
은유가 주저 앉으며 바로 앞에 다가온 경호원들과 마주친 남자가 욕설과 함께 주머니에서 시퍼런 칼을 빼내며 은유의 몸을 감쌌다.
“이 새끼들이!”
그 늙은 노인네가 조용히 풀어주라고 했을 때부터 이상했다.
분명 여차하면 죽여도 된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이미 주변에 쓰러진 제 수하들을 보며 남자는 이를 갈며 은유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가느다랗고 흰 목 옆으로 날이 잘 선 칼을 들이밀었다.
“움직이지 마!”
남자의 외침에 경호실장이 손을 들어 움직임을 중지하는 표시를 보내자 별장 안으로 긴장감이 가득 퍼졌다.
제 목을 겨누고 있는 칼날에 몸이 덜덜 떨렸고 눈물이 새어 나왔다.
“곱게 풀어주라고 했지만 내 신변도 보장이 되어야지. 안 그래?”
“사모님은 풀어줘. 풀어주고 말로 해.”
“당장 밖에 차 대기시켜. 그 호랑이 같은 양반이 날 배신할 수도 있잖아? 비행기던 배던 당장 출국하게 도와. 여자는 가서 풀어주지.”
경호실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도 은유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뒤에 서있는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학생 먼저 데리고 나가.”
“예.”
“안돼요! 선생님! 선생님 같이 가요. 같이 가야 돼요!”
이 모든 게 다 저 때문인데.
자신은 이렇게 멀쩡하고, 선생님은 잡혀 있다.
그 사실에 민지는 울음을 터뜨리며 은유를 애타게 찾았고, 은유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가, 민지야. 나도 금방 갈게.”
“흐흑. 선생님……. 선생님…….”
“가서 몸 따뜻하게 하고 있어. 금방 갈게. 정말이야.”
이 순간에도 저를 걱정하는 선생님을 보며 민지는 엉엉 울며 경호원에게 부축을 받으며 별장을 빠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별장 안에는 열명 정도의 경호원들과 은유, 그리고 납치범인 남자가 남았다.
남자는 은유의 목에 여전히 칼을 댄 채로 그들에게 고갯짓했다.
“다 나와.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 부리면 여자는 죽일 거야.”
차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낙원은 저 멀리 보이는 경호원들과 한 여체에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빠르게 그 앞으로 다가간 낙원은 엉망이 된 얼굴로 저를 보며 우는 민지를 끌어 당겨 안았다.
“민지야.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엉엉. 선생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괜찮아. 괜찮아.”
민지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낙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별장 안으로 향하는 경호원들 중 하나를 잡은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
“은유는요? 어디 있습니까?”
“……아직 안에 계십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에 있다니.”
“현재 납치범한테 잡혀 계십니다.”
그 말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별장 문이 열렸고,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은유를 앞에 세우고, 여린 목에 칼을 댄 채로 천천히 내려오는 납치범을 마주한 순간 낙원의 숨이 멈췄다.
“……은유야…….”
꽤 멀리 떨어진 거리였지만 은유는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
남편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낙원씨…….”
“똑바로 안 걸어?”
붓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발목으로 절뚝거리던 은유는 뒤에서 민 남자의 힘에 의해 몸이 앞으로 넘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작은 소리와 함께 실장의 손에 쥐어져 있던 총에서 실탄이 발사되었다.
실탄은 정확하게 남자의 어깨를 관통했고, 신음소리와 함께 쓰러진 남자의 뒤로 달려온 경호원들이 그를 붙잡았고 또 다른 경호원들이 은유의 주위를 둘러쌌다.
민지를 경호원에게 맡기고 경호원들이 몰린 쪽으로 달려간 낙원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은유야. 은유야.”
차가운 풀잎 위에 쓰러진 몸을 끌어 안은 낙원이 커다란 손으로 발간 볼을 감쌌다.
초점을 잃었던 은유의 두 눈이 낙원을 담았고, 익숙한 품에 점점 몸에 힘이 빠졌다.
“은유야. 정신 좀 차려봐. 은유야.”
“구급차 대기시켰습니다 도련님. 병원으로 가시죠.”
저 멀리서 달려온 구급대원들이 들것에 은유를 옮겼고, 그 침대가 이동하는 길에는 검붉은 피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독히도 추운 겨울 밤이었다.
.
“대박. 이거 봐봐.”
“이게 뭐야?”
“정진그룹 기자회견이래! 회장이 조폭들한테 협박 받았다는데?”
“협박? 무슨 협박?”
유난히 추운 어느 겨울 밤 8시 30분.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선 ‘정진그룹 기자회견’을 생방송으로 진행해주고 있었다.
정진그룹의 김태민 회장은 5년 전, 조폭들에게 협박을 당해 노강건설의 강무원 전무가 일반인이 아닌 조폭들에게 살해된 사실을 숨겼다고 발표했다.
그 생방송을 지켜보던 중식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저, 저 새끼를!”
손에 쥐고 있던 유리컵을 내던진 중식은 곧바로 변호인단을 꾸렸다.
혹시라도 제게 불똥이 튀면 어떻게든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 때를 대비해서 모든 준비를 해두어야만 했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후, 그런 중식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갑자기 노강그룹에서 기자회견을 연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게로 쏟아진 플래시 사례에 지혁은 단호한 눈빛으로 마이크 앞으로 몸을 가까이 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음을 밝힙니다.”
“방금 전 정진그룹 김태민 회장님이 노강건설의 강무원 전무님 죽음에 대해 은폐했다고 기자회견으로 말씀하셨는데요, 알고 계셨습니까?”
“여러분들께서 보셨던, 정진그룹 김태민 회장님의 기자회견은 전부 거짓입니다.”
기자회견장을 울리는 그 낮은 목소리에 술렁이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다랗게 퍼져 나갔다.
“거짓말이라뇨? 어떤 부분이 거짓말입니까?”
“자세하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어져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지혁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을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똑. 똑. 똑.
무서우리만큼 조용한 병실 안에선 수액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작은 기계음들만이 들릴 뿐이었다.
커다란 침대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작은 손에 주사바늘을 꽂은 채로 잠들어 있는 사람은 은유였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은유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겨준 낙원은 얇은 팔목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몇 시간 전, 총에 맞고 쓰러지던 납치범이 쥐고 있던 칼이 은유의 팔목을 따라 스치며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도 깊게 베이지 않았지만 놀란 마음은 쉬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체온이 많이 떨어졌고 놀라서 정신을 잃었다고 했지만 아직도 깨어나질 않으니 낙원으로써는 미칠 노릇이었다.
혹시라도 추울까 봐 몸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이불을 꼭꼭 잘 덮어주던 찰나, 커다란 손 안에 들어 있던 작은 손에서 가느다란 떨림이 짧게 전해졌다.
“……은유야?”
놀란 낙원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이자 잘게 떨리던 눈꺼풀이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깜빡임을 반복하고서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눈동자가 흐릿하게 나타났다.
“으, 은유야. 정신이 들어? 나 누군지 알겠어?”
잔뜩 물기 어린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은유를 보며 그가 기어이 눈물을 터뜨렸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어서 미안해 은유야. 미안해.”
한참 동안 제 손을 잡고 미안하다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낙원을 보며 은유는 힘이 없는 손을 들어올려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 대신 눈빛으로 제 마음을 전했다.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짙은 어둠이 깔린 병실 안에선 한동안 두 사람의 울음 소리로 가득했다.
꽤 이른 시각 눈을 뜬 은유는 제 손을 꽉 잡은 채로 구부정하게 앉아서 자고 있는 낙원의 모습에 속이 상했다.
며칠 사이에 까칠해진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을 낚아챈 낙원의 모습에 놀란 그녀가 눈을 커다랗게 뜨자 걱정이 가득한 눈빛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낙원씨가 보고 싶었나 봐요.”
그 말에 다시 한 번 울컥한 그가 목 뒤로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선 몸을 일으켜 동그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늦어서 미안해.”
“아니에요. 와줘서 고마워요. 낙원씨는 어디 안 다친 거 맞아요?”
“난 멀쩡해.”
“낙원씨랑 도련님도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걱정 많이 했어요.”
분명 두렵고 무서웠을 텐데, 그 상황에서조차 자신을 걱정했다는 말에 낙원은 또 한번 미안함을 느끼며 하얀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치. 미안하다고 그만 해요. 정말 괜찮아요, 저.”
하얗고 예쁜 팔목엔 상처가 났고, 발목은 퉁퉁 부어서 걸을 수도 없으면서 괜찮단다.
아내는 이렇게 아픈데 자신만 멀쩡한 것 같아 죄스러워진 낙원이 고개를 떨구자 멀쩡한 은유의 한 손이 그의 커다란 손을 꼭 마주잡았다.
“낙원씨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 거 알죠?”
“……내가 미리 언질을 해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어.”
“절대 아니에요.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잖아요. 자책하지 말아요. 저 진짜로 속상하단 말이에요.”
자꾸만 처지는 제 모습에 일부러 씩씩하게 말을 하는 아내를 보며 낙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자책했다간 되려 은유가 더 힘들어할 것 같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잘 넘겨주며 애써 웃었다.
“그래.”
두 사람이 서로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이 회진을 온 원식은 꼼꼼하게 은유의 상태를 살폈다.
“일단 바이탈은 안정적이고, 팔목에 상처는 아무는데 시간 조금 걸릴 거에요. 발목은 계속 물리치료 받아야 하고.”
“네. 감사합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제수씨.”
“감사합니다.”
“와이프 잘 챙겨 강낙원. 제수씨, 저 이만 가볼게요. 푹 쉬시고, 이따 오후에 봬요.”
“네. 수고하세요.”
낙원과 은유를 뒤로 하고 간호사와 병실을 나온 원식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경호원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선 다음 병실로 향했다.
그런 원식을 뒤따르던 간호사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저 분이, 그 뉴스에 나오신 분이에요?”
“네.”
“와. 진짜 무슨 영화 같은 얘기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믿기 힘드네요.”
아마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것이다.
영화에서만 보던 이야기가 실제로 벌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걸 원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병원 복도에 마련된 텔레비전을 통해 비춰지는 지혁을 보며 조용히 응원했다.
‘힘내라, 지혁아.’
언제나 그랬듯, 진실이 이길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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