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약속 할게2016.12.24.
이곳에 갇힌 지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은유와 민지는 점점 체온이 떨어짐을 느꼈다.
한겨울에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로도 힘겨운 일인데, 두 사람은 ‘납치’ 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심리적으로 다가오는 압박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은유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납치될 당시 발버둥치다 발이 접질린 바람에 오른쪽 발목이 크게 부어 올라 있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응. 난 괜찮아. 민지 많이 춥지?”
“아니에요. 저도 괜찮아요.”
두 사람이 서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는 사이 굳게 닫혀 있던 커다란 문이 양 옆으로 활짝 열리며 한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곳에 들어와 처음 보는 사람의 모습에 은유는 본능적으로 민지를 제 뒤로 밀었다.
“일어나셨네. 흠, 좀 춥지?”
꽤 젊어 보이는 남자가 건방진 말투로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씩 웃고선 넓은 공간 안을 빙 둘러보았다.
“여긴 올 때마다 기분이 나빠. 매번 사람을 죽여서 그런가.”
아무렇지도 않게 밖으로 흩어져 나온 말에 두 사람은 숨소리조차 낼 수가 없었다.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떨림에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던 은유에게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강무원도 원래는 여기에서 처리할 계획이었는데.”
“……당신이 어떻게…….”
“강무원 내가 죽였는데.”
말도 안돼.
아주버님을 살해한 피의자는 분명히 어린 남자였다. 게다가 당시 검거되어 현재는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 도대체 왜.
“어라? 표정 보니까 진짜 몰랐나 보네?”
“……왜……. 어떻게…….”
충격에 휩싸인 은유가 말을 잇지 못하자 남자는 그런 은유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왜긴 왜야. 강무원이 죽었어야 하니까 그랬지.”
너무나도 쉽게 사람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남자의 모습에 은유는 치가 떨렸다.
긴장감과 두려움, 분노가 뒤섞여 그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흠. 이거 알면 죽여도 된다고 했는데. 생각이 좀 바뀌셨는지 기다려보라시네?”
“…….”
저보다 훨씬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남자를 마주하고 선 은유는 뒤에 있는 민지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남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뭐야.”
“와, 누가 노강그룹 사람 아니랄까 봐. 하는 말마다 이렇게 똑같아? 당신 시아버지나, 남편이나.”
남자의 말에 ‘설마’하는 생각이 은유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런 은유의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남자는 비웃듯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녀를 자극했다.
“당신 남편도 한번에 죽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무슨 짓을 한 거야.”
“뭐, 아직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돼. 살아는 있어.”
남자의 면전에 대고 한바탕 쏟아 붓고 싶었지만 절대 그럴 수 없었다.
혼자였다면 몰라도 지금 이곳엔 민지가 같이 있다.
혹시라도 남자를 자극해서 위험한 상황이라도 벌어진다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 생각에 아무런 대꾸가 없는 은유를 쳐다보던 남자는 제 주머니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는가 싶더니 두 사람을 남겨놓은 채로 바깥으로 나섰다.
남자가 나가자마자 뒤를 돌아 민지를 살핀 은유는 제 겉옷을 벗어 민지의 몸에 둘러주었다.
“민지야. 조금만 기다려. 절대 정신 놓으면 안돼. 무서운 거 알아. 그래도 절대 약해지면 안돼. 우린 꼭 여기서 나갈 거야. 알겠지?”
“선생님……. 저 너무 무서워요……. 흑…….”
“알아. 다 알아. 내가 같이 있을게. 여기 같이 있어. 그러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아 민지야.”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민지를 감싸 안은 채로 텅 빈 넓은 공간을 둘러보는 은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
째깍. 째깍.
온갖 명품 가구들과 갖가지 장식품들이 들어차 있는 커다란 사무실 안에는 열심히 시간을 달리고 있는 초침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방금 전 사무실에 들어온 준원이었다.
“방법이 틀렸다는 생각 안 했습니까, 김 회장?”
“하하. 방법이라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웃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한들 정진그룹 회장의 본성은 숨겨지지 않았다.
웃고 있는 입과는 달리 매섭기만 한 눈매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준원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진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살인을 저지를 건가?”
“살인이라뇨. 오해십니다, 강사장님.”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내 큰아들 무원이로도 모자라서 이젠 내 아들, 조카에 며느리까지. 당신 손에 얼마나 더 많은 피를 묻힐 셈이야?”
“지금 제게 부탁을 하러 오신 겁니까, 협박을 하러 오신 겁니까? 하나만 하시죠.”
젊을 적 만났을 때엔 이렇지 않았는데.
분명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배포가 큰 남자다운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정부에 뇌물을 받치기 시작하고, 조폭들과 형님 아우하며 지내고, 야욕에 눈이 멀어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썩을 대로 썩은 주제에 되려 당당하게 나오는 태도가 준원을 더욱 더 기막히게 만들고 있었다.
“긴말 하지 않겠네. 내 며느리와 학생 풀어주게.”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시는지 모르겠네, 강사장.”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자네는 모든 걸 잃을 거야. 정진그룹 회장 자리도, 그 직위에 함께 딸려왔던 부와 명성도.”
“글쎄. 어디 그게 내가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사람의 탈을 쓰고 엄청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나오는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지만 준원은 침착했다.
“증거는 우리 쪽에서 이미 확보했지.”
“증거를 확보하셨어도 며느리 안위는 확보하지 못하셨을 텐데. 나야 뭐, 감옥에서 몇 년 쉬다 나오면 그 시간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질 테고. 그런데 사람 목숨은 하나라서 말입니다.”
뻔뻔하고 느긋한 김태민 회장의 말엔 죄책감이나 일말의 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미칠 듯이 화가 나긴 했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현재 다급한 건 자신 쪽이었다.
어떤 말도 쉽게 내뱉을 수 없어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준원을 보던 태민이 비릿하게 웃으며 제 턱을 쓸었다.
“시간을 좀 드리지요. 길게는 못 드리고, 오늘 오후 6시까지 어떻게 하실 건지 잘 생각해보시고, 후회 없을 결정 내리시기 바랍니다.”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실어 자리에서 일어난 준원이 차가운 눈빛으로 태민을 내려다보았다.
“며느리와 그 학생에게 조금의 이상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네.”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그대로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선 준원은 상실감과 무력함에 눈물이 차 올랐다.
한 기업의 총수로써 많은 사람들의 동경을 받으며 지내왔지만 모두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정작 자신의 가족들이 위험한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준원은 쓰디쓴 눈물을 삼키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옆쪽에 조그맣게 나 있던 공간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려가는 숫자를 보던 남자의 눈가가 붉어졌고, 꽉 쥐었던 주먹을 펴고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비서님. 지금 어디십니까.”
김태민 회장과의 만남 후에 집으로 돌아온 준원은 이상할 만큼 텅 빈 집안을 둘러보며 소파에 앉아 있는 낙원과 지혁에게 다가갔다.
“경찰들은?”
“철수했습니다.”
지혁의 입에서 나온 ‘철수’라는 단어에 준원이 잘못 들었다는 듯 다시 되물었다.
“뭘 해?”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답니다.”
준원이 집을 나선지 10분 뒤, 거실에 함께 앉아 있던 형사가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더니 곤란한 얼굴로 다시 들어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형사님. 뭐 하시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이사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 하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저희는 수사에서 빠지라는 지시입니다.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아십니까?”
“정말로 죄송합니다. 저희도 위에서 내려온 결정이라서…….”
기가 막혔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돈을 쥐어주었으면 감히 노강그룹의 일에 ‘철수’라는 결정을 내릴 수가 있을까.
대체 당신들은 지금까지 얼마나 더럽게 권력을 휘둘렀기에.
“……내 잘못이구나. 부정부패는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너무 꼿꼿하게 세우기만 했어.”
“큰아버지 잘못이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호텔부터 시작해서 건설, 유통부분까지 대한민국에서 최고를 달리고 있는 그룹이지만 다른 대기업들과는 달리 비리 문제에 유난히 민감했다.
다른 기업들에서 정부에 돈을 주고 환심을 사는 대신 노강그룹은 사회 약자들을 돌보고, 제품과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돈을 쏟아 부었다.
그래서였을까?
너무 정직하고 바르게 살려고만 했던 자신의 욕심 때문에, 가족들이 대신 부러져야만 하는 것일까?
한꺼번에 몰아쳐 오는 고통에 준원은 깊은 패인 이마 주름을 쓸며 아무런 말 없이 앉아있는 아들을 쳐다보았다.
“……낙원아. 내가, 내가 미안하구나…….”
“아버지 잘못 아닙니다. 사과하지 마세요. 은유, 어떻게 해서든 꼭 찾을 겁니다.”
무작정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이렇게 피를 말리는 것만 같은 시간으로 8시간이나 넘게 앉아있었으면 많이 기다린 것이다.
“어떡하려고 강낙원.”
“뭐든 해야지. 어디든 가 봐야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챙겨 입는 낙원을 보며 지혁이 덩달아 일어섰다.
“같이 가.”
“고맙다.”
낙원을 따라서 집을 나서던 지혁은 갑자기 우뚝 멈춰서는 낙원의 모습에 덩달아 멈춰 서야만 했다.
“왜 그래?”
“전화 왔어.”
액정에 뜬 모르는 번호에 낙원이 마른 침을 삼키며 ‘통화’버튼을 눌렀고, 놀랄 만한 이름이 흘러 나왔다.
“[김태형입니다.]”
“……당신…….”
“[지금 좀 만납시다. 주소 보내줄 테니까 아무도 모르게 와요.]”
그 말만 마친 채로 뚝 끊어진 전화에 멍한 얼굴이 된 낙원을 보던 지혁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낙원. 누군데 그래.”
“나 좀 나갔다 올게.”
“뭐?”
“여기서 기다려줘. 혹시라도 은유 소식 알면 나한테 연락해주고.”
“너 어디 가는데. 혼자 못 보내. 말 해.”
제 앞을 막아서며 불안하게 쳐다보는 지혁을 보며 낙원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야 돼.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
“너 약속 하나만 해.”
“무슨 약속.”
“안 죽겠다고.”
“…….”
“무원이형처럼 안 떠나겠다고. 약속 해.”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를 마주한 낙원이 천천히 손을 올려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약속 할게. 난 형처럼 안 죽어 강지혁.”
“……다녀와. 혹시라도 위험하면 바로 나와.”
“어. 다녀올게.”
확고한 말투로 약속을 마친 낙원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틀어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나갔다.
혼자 남겨진 지혁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다 휴대폰을 꺼내 김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회사로 와주세요.”
약속 꼭 지켜 강낙원.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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