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93화 (93/112)

93. 기나긴 밤2016.12.24.

차가 단지 앞에 멈춰 서자마자 튕겨져 나가듯 내린 낙원은 그대로 달렸다.

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앞에 선 낙원은 떨리는 손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어젖혔다.

“심은유!”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온 방의 문을 모조리 열었지만 그 어디에도 아내는 없었다.

낙원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안방에서 나오는 것을 본 지혁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강낙원.”

“내 생각이 짧았어.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너랑 내가 위험한 거면, 은유도 위험한 거라고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지금 자책하고 있을 시간 없어. 일단 본가로 가.”

자신도 정신이 없었지만 같이 무너질 수는 없었다.

넋이 나간 낙원을 차에 태운 지혁은 교통사고가 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속도를 높여 제법 빠른 시간 안에 청담동 본가에 도착했다.

이미 집 앞에 일렬로 서있는 차들을 보며 두 남자는 서로를 쳐다보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넓게만 느껴지는 정원을 지나 현관문을 열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져 들려왔다.

“현재로썬 휴대폰 전원이 꺼져 있어서 위치추적이 불가합니다. 제일 마지막에 잡힌 신호는 김포 쪽입니다.”

노강그룹의 경호실에 비상이 걸렸다.

밤늦은 시각에도 준원은 망설임 없이 경호실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낙원과 은유의 집에 보내진 몇 명의 경호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이 전부 청담동 본가로 모였다.

엉망이 된 모습으로 나타난 아들과 조카를 발견한 수연이 한걸음에 달려가 두 사람을 살폈다.

“얘들아! 세상에. 너희 괜찮니?”

“네.”

낙원이 준원에게로 다가갔고, 그 뒤를 따르던 지혁을 수연이 붙잡았다.

“지혁아. 피 많이 나. 병원부터 가자.”

“이따 갈게요 큰어머니.”

“그럼 조금만 기다려. 도련님이랑 동서도 오는 길이야.”

거실의 커다란 탁자 위에는 그 동안 지혁이 모아온 증거물들이 펼쳐졌다.

가족들이 무원의 죽음에 대해 사실과 마주한 순간 찾아온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다.

누구 하나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아기가 행방불명이 된 거라고.”

“…….”

어느 것 하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일단 산 사람부터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준원은 자꾸만 틀어지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경찰에 전화를 걸어 집 근처의 CCTV를 뒤졌고, 경호원들은 은유의 마지막 위치를 중심으로 그 일대를 찾아 헤맸다.

세상을 잃은 얼굴로 앉아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본 그가 문드러지는 속내를 감추며 고개를 돌려 지혁을 바라보았다.

“너희들 다친 곳은 없는 게냐.”

“예. 괜찮습니다.”

“지혁이 너는 치료부터 받고 와.”

“여기 있겠습니다 큰아버지.”

“다녀와.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피로 얼룩진 조카의 얼굴을 보기가 미안한 그의 떠밂에 고집을 부리던 지혁은 결국 주치의를 따로 불러 방에서 가볍게 상처만 치료한 뒤 다시 거실로 나왔다.

지금으로썬 무작정 찾거나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거실에는 가족들을 비롯해 준원이 부른 경찰들이 혹시 모를 전화를 대비해 위치추적 장치들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째깍. 째깍.

조용한 집 안에 초침소리만 들렸고, 그 재촉에 낙원의 심장은 저 바닥으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 ♪♬♫

커다란 벨소리가 집안을 울림과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얽혔다.

경찰과 사인을 주고받은 준원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아아. 흠. 거기가 강준원 사장님 댁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목소리를 보니 나이가 좀 있으신 것 같은데. 강준원 사장님인가?]”

“내가 강준원입니다.”

“[위치추적 시도해도 소용 없습니다. 당신 며느리가 있는 곳이랑 내가 전화하는 곳은 다르니까.]”

준원은 당장이라도 부실 것처럼 수화기를 꼭 붙든 채로 덤덤하려 애를 썼다.

“원하는 게 뭐야.”

“[거기 당신 아들 있나?]”

제게로 향한 준원의 시선에 낙원이 그에게 다가가 수화기를 건네 받았다.

“심은유 어디 있어.”

“[넌 어디까지 알고 있어?]”

“은유 어디 있냐고.”

감정을 잔뜩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에 저 너머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와 낙원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다 아는 모양이네.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됐네. 그러게 아까 레스토랑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네가 안 죽어서 불쌍한 네 와이프가 죽게 생겼잖아.]”

“손대지 마.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너부터 죽어.”

“[네 아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던데. 자, 그럼 이렇게 하자. 너랑 강지혁만 죽자. 아, 강준원 사장도 다 알고 있겠지? 그럼 너희 집에 불을 지를까?]”

상대는 말장난을 하는 것처럼 낙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네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다고 숨겨질 일 아니야.”

“[시간이야 벌 수 있지. 예를 들어서 네 와이프가 죽는다거나. 그게 싫으면 네가 그 일을 숨길 수도 있고.]”

“말 가려서 해. 죽여버리기 전에.”

“[우리 그냥 깔끔하게 가자. 다 덮어. 네가 알고 있는 거 전부 다. 그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안 그래?]”

이렇게 나올수록 너희가 한 일이라는 게 더 확실해질 뿐인데.

위치추적 이야기를 꺼낸 걸 보면 경찰들과 함께 있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대체 정진그룹의 위력이 어느 정도이길래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나오는 걸까?

“은유 어디 있는지 먼저 얘기해.”

“[그건 안되지. 역시 넌 사업가가 못돼. 기다리는 동안 잘 판단해. 함부로 입 놀렸다간 네 와이프랑 학생 안전은 보장 못해. 다시 전화할 테니까 얌전히 있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매정하게 끊어진 전화에 낙원은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워서. 제 아내 하나조차 지키지 못한 자신이 용서가 되질 않아서.

“와이프는 사장님 며느리 말씀하시는 거고, 학생은 누굽니까? 납치된 사람이 둘이란 말입니까?”

경찰의 질문에 지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숙였던 고개를 든 낙원이 지혁과 눈을 마주쳤다.

“……민지.”

“……미치겠다.”

경호원들과 경찰들에게 새로운 정보가 전달되었다.

납치된 사람은 두 명. 노강그룹 며느리인 심은유와 학생인 권민지.

무조건 두 사람이 무사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밤이 지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로 인해 딱딱하게 굳어있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고, 곧이어 그 차가운 손을 꽉 잡은 작은 손의 온기가 전해졌다.

발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뜬 은유는 작은 숨을 몰아 내쉬며 눈동자를 천천히 굴려 이 곳이 어느 곳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선생님.”

손의 온기만큼이나 따뜻하게 들려온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든 그녀가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켜 앉자 그 앞에 앉아 저를 보며 울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울컥하는 마음에 애써 눈물을 삼키며 작은 몸을 끌어안은 은유가 차가워진 두 손으로 눈물을 떨구는 얼굴을 감싸 쥐며 찬찬히 살폈다.

“어디,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네 선생님. 흐흑……. 죄송해요…….”

“다행이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민지야.”

알 수 없는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경찰서에 전화를 하던 은유는 뒤에서 덮쳐온 손길에 정신을 잃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린 민지를 꽉 끌어안은 은유는 놀란 아이를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민지야.”

“흑…….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선생님이…….”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마.”

한참을 은유의 품에 안겨 울던 민지는 어젯밤 일을 은유에게 털어놓았다.

한국에서 지혁과 함께 종종 마주쳤던 그 직원은 민지도 아는 사람이었다.

제 아카데미 서류를 접수해주고, 출국 하기 전까지의 일정을 관리해주던 분이었다.

그런 사람이 전화를 해서 지혁의 말을 전해왔기에 너무나도 쉽게 믿었고, 낙원과 은유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조건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 그 직원은 비행기 티켓을 함께 전해주었다. 그리고 노강재단의 직원이 마중을 나갈 테니 따라서 온다는 말도 함께였다.

노강재단에서 나왔다는 남자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고, 마련되어 있던 차에 의심할 여지도 없이 올라탔다.

그리고 차에 오름과 동시에 뒷좌석에 숨어 있던 한 남성이 문을 잠그고 그녀를 붙잡았다.

악을 쓰며 발버둥쳤지만 성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두려움에 떠는 동안 차는 한 시간 정도를 달려 비어 있는 커다란 건물 안에서 멈췄다.

눈이 가려졌고 남자들에게 끌리다시피 한 채로 걸은 지 몇 분 지나 문소리와 함께 한 공간 안에 집어넣어졌다.

“그리고 나서 계속 혼자였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선생님을 데리고 들어왔어요.”

“그랬구나……. 얼굴은, 얼굴은 봤니?”

“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에요. 저희 이제 어떡해요 선생님?”

은유도 민지만큼이나 두렵고 무서웠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자신까지 불안해하면 이 작은 아이가 더 두려움을 느낄 것 같아서 은유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두려운 얼굴을 한 민지와 눈을 마주했다.

“걱정하지마. 우리 나갈 수 있어. 낙원씨가 올 거야. 도련님도 오실 거고. 정신 바짝 차리자 민지야.”

그렇게 이야기하는 본인도 무서울 거면서, 많이 두렵고 힘들 거면서 이런 순간에조차 저를 먼저 챙기는 선생님의 모습에 민지는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구하러 오실 거다.

자신의 담임선생님이. 선생님의 남편이. 분명히 오실 거다.

길었던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며 청담동 본가 안에도 밝은 햇살이 천천히 들어찼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빛을 즐기지 못했다.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노진희 여사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수연이 그곳을 지켰다.

경찰들과 경호원들이 밤새 수색에 나섰지만 여전히 두 사람의 행방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의 마음은 점점 타 들어갔고, 거의 넋을 잃은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던 준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겠구나. 내가 나서마.”

“형님.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지혁의 아빠를 마주한 준원은 하룻밤 사이에 까칠해진 얼굴로 낙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낙원아. 저들이 원하는 게 무원이의 죽음을 덮는 게 맞지?”

“아버지.”

“그 일은 절대 덮을 수 없고, 덮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새아기가 먼저야. 은유랑 그 학생이 위험한데,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니.”

“…….”

“준혁아.”

“예 형님.”

“나 대신 애들 잘 보고 있어라. 정진 회장은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다.”

무턱대고 경찰들을 움직였다가 그 쪽에서 며느리와 학생에게 해라도 입힐까 봐 정확한 장소를 알아내기 전까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만약에 시간이 더 지체가 되어 며느리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5년 전 무원이 죽던 날과 같은 일이 일어나선 절대로 안 된다.

침실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는 주름진 준원의 손이 가늘게 떨렸지만 그의 눈은 그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보다 훨씬 더 견고하게 빛이 났다.

방문 앞에 선 준원은 심호흡을 한 후 결심했다는 얼굴로 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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