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도와주세요2016.12.24.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올 민지를 위해 비어있던 방을 열심히 청소하고 나온 은유는 시간이 꽤 늦었음을 깨닫고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들었다.
낙원은 오늘 지혁과 함께 볼일이 있어 조금 늦어질 거라는 말과 함께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섰고, 그 뒤로 온 집안을 닦고 쓸고 치우던 은유는 노곤해진 몸을 소파에 묻으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정신 없이 청소를 하는 사이 민지가 비행기에 탈 시간이 다가와 ‘통화’버튼을 누른 은유는 떨리는 마음으로 귓가로 휴대폰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신호음이 달랐다.
이상한 기분에 마음이 제법 초조해졌고 한참 신호음이 울리다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선생님…….]”
“민지야! 어디야? 공항 도착했어?”
“[…….]”
“여보세요? 민지야?”
자신의 물음에도 반대편에서 어떠한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아 불안감에 휩싸인 은유에게 흐느끼는 소리가 전해졌다.
“[……흐흑……. 선생님…….]”
“……민지야. 민지야 너 왜 그래. 어? 무슨 일이야?”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울음 소리에 은유의 몸이 소파에서 떨어졌다.
“민지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선생님…….]”
“민지야! 너 어디야. 거기 어디야!”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한 은유가 소리치던 그 때,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은유씨?]”
“……당신 누구야.”
“[자기 학생도 아닌데 애착이 대단하네?]”
“누구냐고!”
“[그건 알 거 없고. 학생 데리러 안 와? 아까부터 덜덜 떠는 게 불쌍해서 못 봐주겠네.]”
“어디 있어. 우리 민지 어디 있어!”
은유의 외침에 한 주소를 불러준 남자의 목소리는 금새 사라졌다.
끊어진 전화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은유는 떨리는 손으로 익숙한 이름을 눌렀다.
“제발……. 제발 낙원씨. 제발…….”
한없이 울리는 신호음에도 은유가 원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급히 전화를 끊고 지혁에게 걸어보았지만 그도 답이 없었다.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간신히 일어선 은유는 그대로 현관으로 가 신발에 발을 구겨 넣고 집을 나섰다.
제발 그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바라면서.
.
서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비교적 소란스러운 레스토랑 안.
건물 전체가 통 유리로 설계되어 있는 곳의 창가 쪽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마주앉은 세 남자의 얼굴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음식을 먹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뜨거운 차만 세 잔이 놓여 있었고, 나란히 앉은 낙원과 지혁을 보던 맞은 편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뵙는군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일을 찾을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놀랐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해외까지 떠들썩하게 했던 노강건설 강무원 전무의 살인사건을 맡았던 유지환 검사는 잘나가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검사복 벗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대검찰청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제가.”
당시 검찰청 내에서의 유지환 검사는 톱스타였다.
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실력으로 사법고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후 사법연수원에서 2년간 있으면서 남다른 실력으로 이름을 날린 그를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빽 없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치열한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실력을 입증시키며 제 자리를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5년 전에 그 사건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갑자기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사건 당시 모든 상황이 너무 딱 맞아떨어져서 직감적으로 이상하다는 판단을 했고, 목격자인 문창수씨를 다시 심문하는데 갑자기 담당검사가 교체됐다는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정말 단 한 순간에 담당검사는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고, 부장검사를 찾아가 따져 묻기도 했지만 되돌아온 건 ‘지시에 따라라’라는 앵무새 같은 대답뿐이었다.
그렇게 담당검사가 바뀌며 사건은 빠르게 종결되었고, 그 과정을 전부 다 제 눈으로 지켜본 지환은 ‘검사’라는 직업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래서 검사 복을 벗었다. 그 옷을 벗으며 지환은 자신을 말리는 후배 검사에게 그런 말을 했다.
“헌법 제 30조. 타인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명, 신체에 대한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
“……선배님.”
“살인사건이야. 제대로 확실하게 수사해서 피의자 가려야 하는 사건이라고. 한 국민의 생명이 꺼졌는데 이걸 이렇게 종결시킨다?”
“…….”
“국가는 모두에게 구조의 의무가 있다. 내가 항상 애기했지. 근데 이렇게 너무나 당연한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내가 뭘 더 어떻게 할 수가 있겠냐.”
그 말을 하는 자신을 후배는 더 이상 잡지 못했다.
모든 이야기가 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그만둔 후에 작은 카페 하나를 차려서 운영하고 있는 겁니다.”
“……그 때 담당검사를 교체한 사람이 현재의 권중식 의원이 맞습니까?”
“네.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그 분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었습니다.”
검사 일을 하며 온갖 더럽고 추악한 모습을 많이 봐왔지만 직접 겪고 나니 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 사건을 잊어버리려고 했고, 잊혀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신문에서 강지혁 이사님이 귀국하셨다는 기사를 보고 다시 떠올랐죠. 그래서 제 나름대로 다시 찾아봤습니다.”
지환은 그렇게 해서 얻은 증거들과 진술들이 담긴 서류 파일을 두 사람의 앞으로 내밀었다.
“언제 드릴 수 있으려나 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네요.”
“……잊지 않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를 전하는 낙원을 가만히 지켜보던 지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5년 전, 형의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울던 남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절대 손을 놓아서는 안됐었는데.”
“지금이라도 이렇게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세 사람 사이에 감사함과 미안함이 오고 가는 그 순간.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룸 안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원. 강낙원!”
하얗게 피어 오르는 연기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지혁의 얼굴.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집기들과 멍했던 귓가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들.
“강낙원!”
뻐근한 몸을 일으킨 낙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해진 레스토랑 안에 멈춰 있는 승합차 한 대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몇 명의 사람들.
정신을 놓고 있던 낙원은 제 어깨를 흔드는 지혁의 손길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지혁의 볼을 타고 흐르는 피에 낙원이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크게 물었다.
“다쳤어?”
“아니. 너 피나.”
“나 말고! 너 어디 안 다쳤어?”
“어. 뻐근한데 괜찮아. 넌.”
“괜찮아.”
“검사님은?”
낙원의 물음에 지혁이 손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고, 그 곳엔 건장한 남성의 등에 업혀 나가는 유지환 검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직 살아계셔.”
분명 습격이었다.
혹시라도 자신들을 노릴까 봐 일부러 유동인구가 많은 시내 한복판에서 만났는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리 경호원들을 주변에 배치해두었고, 돌진하는 차를 발견한 경호원들 덕분에 불행 중 다행으로 낙원과 지혁은 크게 다친 곳이 없었고, 유지환 검사는 정신을 잃어 경호원들에게 실려 나갔다.
놀라고 다친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들 사이로 구급차와 경찰차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사이렌이 크게 울렸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지혁과 그 공간을 나서던 낙원이 순간 멈칫했다.
“……이거 정진그룹 짓이지.”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지, 이 상황에.”
“……은유.”
“뭐?”
“은유. 심은유.”
멍하니 지혁을 바라보던 낙원이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낙원의 말뜻을 알아차린 지혁이 이를 악물고 그 뒤를 쫓아가며 빠르게 휴대폰을 꺼냈지만 방금 전 사고에서 망가진 휴대폰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휴대폰을 빌린 지혁이 낙원이 탄 차의 조수석에 올라 망가진 휴대폰을 집어 던진 그에게 빌린 휴대폰을 건네며 차 문을 열었다.
“자리 바꿔 강낙원.”
욕설과 함께 운전석에서 내린 낙원이 익숙한 번호를 누르며 차 앞을 빙 돌아 조수석에 올랐다.
긴 신호음이 갈 뿐 들려와야 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불안함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안 받아.”
“일단 집에 다시 전화해봐.”
시동을 걸고 창문을 내린 지혁이 다른 경호원에게 휴대폰 하나를 더 빌리고선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그 잠깐 사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아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네 집으로 갈 거니까 큰아버지께 전화해.”
우선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집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있어야만 하니까.
제발 있어줘. 제발.
저녁식사 후 가족들과 거실에 모여 과일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준원은 브라운관 자막에 빨간색으로 뜬 뉴스 속보에 눈살을 찌푸렸다.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 승합차 한 대 돌진’
“이 밤에 무슨 일이야 이게.”
“그러게 말이에요 어머님.”
어머니인 노진희 여사와 아내인 수연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속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 탁자 위에 올려둔 준원의 휴대폰이 울렸다.
손을 뻗어 액정을 확인한 준원은 난생 처음 보는 번호에 의아한 얼굴로 액정을 터치했다.
“강준원입니다.”
“[아버지.]”
“……낙원이냐?”
“[……아버지. ……은유가…….]”
휴대폰 너머로 또렷하게 들려오는 떨리는 음성에 휴대폰을 쥔 준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아기가 왜. 떨지 말고 낙원아.”
심상치 않은 준원의 목소리에 텔레비전에 고정되어 있던 노진희 여사와 수연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낙원아.”
“[……은유가 위험합니다.]”
터져 나온 숨과 함께 쏟아진 말에 준원은 순간 앞이 깜깜해짐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게 무슨 얘기야. 너 지금 어디야.”
“[모르겠어요. 은유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찾아주세요. 도와주세요 아버지…….]”
불안한 목소리에 이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5년 전 무원이 죽던 그 날과 같은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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