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88화 (88/112)

88. 내가 당신의 아내여서2016.12.20.

“아가. 다 챙겼니?”

“네 어머님.”

“어머, 내 정신 좀 봐. 잠시만 기다려!”

청담동 본가에서 하루를 보낸 후, 은유의 친정으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난 두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챙겨주는 노진희 여사와 엄마인 수연 때문에 20분째 발이 묶여 있었다.

괜찮다는 만류에도 과일부터 시작해서 각종 먹을 거리들을 정성스럽게 싸주셔서 차에 싣고 나니 그 짐만 해도 가득했다.

이제 정말 끝났나 하던 찰나에 수연이 다시 손뼉을 짝 치며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통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어머님, 이게 뭐에요?”

“얼마 전에 담근 유자 청인데, 한 이틀만 냉장고에 넣어두셨다가 드시라고 해. 저번에 전화했을 때 사부인이 감기 걸리셨다고 하시길래.”

“세상에…….”

할머니 덕분에 엄마와 시어머니도 거리낌없이 자주 전화도 하시고, 왕래도 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일부러 직접 청까지 담가 주실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 완전 감동받았어요’하는 얼굴로 수연을 쳐다보는 은유를 대신해 유자청이 담긴 통을 건네 받은 낙원이 차에 싣고선 할머니와 어른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저희 가볼게요.”

“그래. 운전 조심하고.”

“너무 잘 있다가 가요, 할머님.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도 안녕히 계세요.”

“그래. 우리 은유 잘 가고, 또 놀러 와. 알았지?”

“네. 감사합니다. 도착해서 전화 드릴게요.”

“그래. 얼른 가 봐. 사돈댁 기다리시겠다.”

사돈댁이 서운해할까 봐 노진희 여사와 낙원의 부모님은 두 사람을 일찌감치 친정 집으로 떠밀었다.

본가 식구들을 뒤로하고 차에 오른 두 사람은 창문을 열고 시댁 식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후 은유의 친정 집으로 향했다.

친정 집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사는 집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굉장히 가까운 거리였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일까지 하다 보니 가까워도 자주 찾지는 못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제 집이었는데 이젠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 은유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은유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차에서 내려 짐을 챙겨 든 낙원이 다른 한 손으로 작은 손을 꼭 잡아주었다.

“들어가자.”

“네!”

계단을 올라 ‘202호’라고 적힌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발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어주고 모습을 드러낸 은유의 엄마인 민정은 두 사람을 격하게 반기며 안으로 들였다.

“오느라 고생했지?”

“아닙니다.”

“추운데 운전하느라 고생했어, 강서방. 얼른 앉아.”

“이거 먼저 받으세요, 장모님.”

낙원이 손에 든 짐들을 식탁 위에 올리자 민정이 커다란 눈으로 사위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이게 다 뭐야?”

“별건 아닙니다. 할머니랑 어머니께서 챙겨주셨어요.”

“세상에. 이걸 다? 아휴, 이렇게까지 안 주셔도 괜찮은데.”

민정은 두 사람이 가지고 온 음식들을 냉장고에 잘 넣어두고는 휴대폰을 꺼내 곧장 딸의 시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르신~”

“[사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아이구, 할머님도요. 뭐 이렇게 좋은 걸 많이 보내주셨어요?”

“[많이는~ 더 못 줘서 미안하지. 애들 잘 도착했어?]”

“그럼요 할머님. 우리 강서방 맛있는 거 많이 해 먹일게요.”

“[그래, 고마워. 낙원이도 좋지만 우리 은유 잘 챙겨주고. 오랜만에 부모님 뵙는다고 신났을 테야.]”

사돈어르신인 노진희 여사는 역시나 그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었다.

다정다감한 전화통화를 마친 후 민정은 점심식사를 준비했고, 은유가 엄마를 돕는 동안 낙원은 장인어른인 그녀의 아버지와 안방에서 사진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번에 설악산에 눈 왔을 때 찍은 건데, 어때?”

“예쁘네요. 혼자 다녀오셨어요?”

“은유 엄마랑 같이 갔지. 설경이 기가 막혀, 아주.”

평범한 회사원인 은유의 아빠는 평소 여행을 다니고 사진 찍는 일을 좋아하기에 시간만 나면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니곤 했다.

이번엔 얼마 전에 다녀온 설악산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자 낙원이 흥미로운 듯 그 옆에 서서 그녀의 아빠가 찍어온 사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나중에 같이 가시죠, 장인어른. 은유도 눈 좋아하잖아요.”

“그래. 시간 내서 다같이 한번 놀러 가자고.”

방 안에서 사진을 구경하는 사이, 바깥에서 ‘띵동’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려와 낙원이 몸을 일으켜 거실로 향했다.

주방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두 여자를 향해 대신 나가보겠다는 말을 전한 그는 인터폰에 비춰진 얼굴에 미소를 띤 채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철컥 문을 열자 건장한 청년이 낙원을 보고선 함박웃음을 지었다.

“매형!”

“처남 잘 있었어?”

은유와 3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인 은석은 얼마 전 제대를 하고 대학교가 개강하기 전까지 집에서 쉬고 있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 누나가 갑자기 결혼을 한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고, 그 상대가 무려 재벌 아들이라는 소식에 한번 더 충격을 받았다.

휴가를 나와 상견례에 참석했을 때에 본 매형의 얼굴에는 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완벽할 정도로 잘생긴 외모에 반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마음 약한 누나가 그런 집안에 시집을 가서 잘 살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직접 겪어본 매형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아니 훌륭한 남자였다.

그래서 낙원을 친형처럼 따르고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매형도 잘 있었어요? 우리 누나가 괴롭히진 않았어요?”

“야! 누가 누굴 괴롭혀?”

“저거 봐, 저거 봐. 결혼을 해도 성격이 저 모양이니.”

“너 죽을래?”

어느새 거실로 나와 오랜만에 보는 동생과 투닥거리는 은유가 귀여워 낙원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마트에 갔던 은석이까지 돌아오자 푸짐하게 한 상 차려진 식탁 가에 온 가족이 둘러 앉았다.

“와. 상다리 부러지겠네. 매형 온다고 엄청 신경 쓰셨어요.”

“안 그러셔도 괜찮은데,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세요?”

“아니야 강서방. 은석이 넌 밥이나 먹어.”

민정은 낙원의 앞에 고기며, 전이며, 김치며 열심히 가져다 주었고 낙원은 한입 먹을 때마다 맛있다며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우고 다시 한 공기를 받았다.

억지로 먹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장모님의 음식 솜씨는 엄마 못지 않게 훌륭했다.

아내인 은유가 요리를 잘하는 이유가 있었다.

“강서방. 은유가 해주는 건 좀 먹을 만해?”

산적 하나를 낙원의 밥그릇에 올려주며 불안하게 묻는 민정을 보며 그가 작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모님. 은유 음식 잘해요.”

“잘하기는. 가르친 게 없어서 내가 강서방 보기가 미안해.”

“아닙니다 정말로. 손 많이 가는 음식도 잘하고, 맛도 좋아요. 은유 힘들 거 생각하면 밖에서 먹어야 하는데, 해주는 게 다 맛있어서 저희 꼭 집에서 밥 먹습니다.”

어쩜 말 하나 하나에 이렇게 애정이 듬뿍 담겨 있을까?

처음 결혼을 할 때에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오늘 보니 딸과 사위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게 자신에게까지 진하게 느껴져서 뿌듯하기만 한 민정은 괜스레 울컥했다.

“우리 은유가 많이 부족해도 강서방이 잘 좀 챙겨줘.”

“은유 저한테 차고 넘칠 정도로 과분한 여자에요 장모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내 딸이 이렇게 좋은 남자에게 사랑 받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화기애애한 식사시간이 지나고 난 후, 낙원과 은유는 친정식구들과 함께 백화점으로 향했다.

대명절인 설을 맞이해서 백화점 곳곳에서 수많은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었고, 덕분에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백화점 안에 뒤섞여 있었다.

낙원이 영화 표를 예매하는 동안 은유는 오랜만에 만난 은석과 투닥거리기에 바빴다.

“누나 살쪘어?”

“아니거든!”

“볼살이 좀 올랐는데?”

“아니라고!”

그렇지 않아도 요즘 살이 좀 오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기분 탓일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는데, 둔한 동생이 알아볼 정도면 좀 찌기는 찐 모양이다.

“매형은 참 관리도 잘해.”

“그러니까. 아니, 같이 먹는데 왜 나만 쪄?”

“매형 피지컬을 봐라. 노력도 하시겠지만, 저건 타고난 것도 한몫 한다 분명히.”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알거든?”

심술이 나서 툴툴거리는 은유를 보던 은석이 팔로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삐졌어?”

“됐다 됐어.”

“장난이야 장난. 그나저나 매형이 유난히 좀 다정해지신 것 같다?”

“응. 엄청 잘해줘.”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대답에 은석은 물론이고 은유의 부모님마저 흐뭇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강서방이 잘해줘?”

“응. 진짜 최고야.”

은유의 칭찬에 은석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매형이 2주에 한번씩 부대로 편지 보내주신 거 알아?”

“……뭐?”

“매형도 군대 있을 때 힘드셨다고, 다 이해한다고. 거기 있으면 사람들 소식이 그립다고, 2주에 한번씩 꼬박꼬박 손 편지 써서 보내주셨어. 한 달에 한번씩은 먹을 거 가득 채워서 보내주시고.”

전혀 몰랐다.

전혀 모르고 있던 이야기다.

손 편지라니. 누나인 자신조차 은석에게 그렇게까지 하진 못했는데.

“……낙원씨가 그랬어?”

“어. 덕분에 나 말년인데도 무슨 연락이 그렇게 많이 오냐고 다들 부러워했지.”

은석이 전해준 이야기는 은유의 부모님들도 모르고 있던 것이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뚝뚝하기만 하던 남편이, 어렵게만 느껴졌던 사위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누나가 매형한테 잘하는 건 나도 당연히 아는데, 더 잘해줘. 매형 같은 남자 없다 진짜.”

“……나 진짜 몰랐어.”

“매형이 어디 그런 얘기 할 사람이야? 평생 모를까 봐서 얘기하는 거야.”

정말로 은석이 이야기해주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몰랐을 것이다.

그런 티를 단 한번도 내지 않았으니까.

멍하니 앉아 있던 은유는 제 어깨로 닿는 따뜻한 온기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멍하니 있어?”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웃으며 따뜻한 온기가 담긴 시선으로 저를 바라봐주는 남편.

대답이 없는 은유가 이상했는지, 그녀의 가족들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낙원은 허리를 굽혀 은유와 시선을 마주하며 걱정스런 얼굴로 작은 손을 잡고 어루만졌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딸을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소중하게 다뤄주는 모습에 그녀의 부모님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우려와 달리 사위인 낙원은 그 어디 내놔도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멋있고 존경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딸이 자랑스럽고 예뻤다.

“은유야.”

부드럽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은유는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애써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괜찮아요 낙원씨. 그냥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했어요.”

“정말로 괜찮아? 어디 아픈 건 아니고?”

“네. 정말 괜찮아요.”

“그래. 장인어른, 장모님. 시간 다 됐으니까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낙원은 금새 그녀의 부모님들까지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부모님과 먼저 앞서 걸어가는 낙원의 뒷모습을 보며 은유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재빨리 훔쳐내며 은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 결혼 진짜 잘한 것 같아.”

“응. 태어나서 한 일중에 제일 잘했어. 행복해 보인다, 누나.”

응. 나 너무 행복해 은석아.

저 사람이 내 남편이어서.

내가 저 사람 아내여서.

나 매일매일이 너무 행복해.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