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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선생님-87화 (87/112)

87. 조금만 더 너랑 둘만2016.12.19.

어른들의 틈에 섞여 재잘거리던 은유는 어느새 팔을 걷어붙이고 음식 만드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엄마와 어른들과 함께 명절 음식을 만들었던 그녀에게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손에 물 묻히지 말라는 할머님과 어머님의 만류에도 은유는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애교에 넘어간 여자들은 은유가 일을 하는 것을 허락했다.

작은 손으로 전도 어찌나 야무지게 잘 부치는지.

“우리 은유는 못하는 게 없네?”

“아니에요 어머님. 어머님이 더 예쁘게 만드셨잖아요.”

어머님인 수연의 음식솜씨는 대단했다.

보통 대기업 사모님들이라면 가정부를 두고 집안일엔 신경을 안 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수연은 달랐다.

가족들이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에는 늘 그녀의 손길이 닿았다.

예쁘게 모양을 잡은 동그랑땡을 계란 물에 묻혀 기름이 둘러진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던 은유는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낙원씨?”

“안 힘들어?”

“그럼요! 이거 방금 한 건데, 하나 먹어 볼래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동그랑땡 하나를 집어 낙원의 입 안에 넣어준 은유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그런 아내를 내려다보며 작은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맛있어.”

“다행이다. 저는 부친 것밖에 없어요. 간도 어머님이랑 고모님들께서 다 하셨고요.”

집안 식구들은 깨가 쏟아지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입이 떡 벌어져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무뚝뚝하던 아들이, 그렇게 냉정하던 조카가 저렇게 며느리를, 조카며느리를 보는 눈에서 꿀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니 놀라지 않는 게 이상했다.

“와. 오빠 진짜 변했다.”

떡국 떡을 썰던 주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낙원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내가 뭘? 이거 봐, 이거 봐. 제정신이 아니야.”

“떡이나 썰어 강주원.”

“참 나.”

동생인 주원에겐 그렇게 이야기를 해놓고, 다시 고개를 돌려 다정함이 떨어지다 못해 넘쳐 흐르는 눈으로 은유를 보던 낙원이 그 옆자리에 앉아 제 옷 소매를 걷었다.

“낙원씨, 뭐해요?”

“도와줄게.”

“네? 아니에요! 가서 아버님이랑 작은아버님이랑 얘기 나눠요. 오랜만에 뵙는 거잖아요.”

“엄마랑 작은엄마랑 고모들도 오랜만에 뵀어.”

“아니, 그래도…….”

아들을 주방에 들였다고 호통을 칠 시어머니가 아닌 건 당연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낙원이 이렇게 옆에 떡 하니 앉아 있으니 괜히 신경이 쓰여 은유는 발만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을 보며 수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낙원에게 젓가락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잘 뒤집어봐 아들. 태우면 그거 다 네가 먹어야 돼.”

“알았어요.”

은유가 예쁘게 모양을 잡아 낙원에게 주면 낙원은 계란 물을 잘 묻혀 프라이팬 위에 올렸다.

혹시라도 아내에게 기름이 튈까 봐 버너를 제 앞으로 옮긴 낙원을 보며 큰 고모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큰오빠 닮아서 사랑 꾼이 다 됐네, 우리 조카.”

“맞아. 큰오빠가 좀 다정해?”

“새언니가 큰오빠 사람 만들었지.”

아버님인 준원과 어머님인 수연의 젊을 적 러브스토리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던 때에 막내 고모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기 소식은 아직 없니?”

‘아기’라는 말에 동그랑땡 모양을 잡던 은유의 손이 허공에 붕 떴고, 젓가락으로 잘 익은 동그랑땡을 그릇에 옮기던 낙원의 손도 멈칫 했다.

“어머? 얘들 좀 봐. 너희 생각 없는 건 아니지?”

“아, 아니에요 고모님.”

빠르게 튀어나간 은유의 답변에 낙원은 놀란 듯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 모습을 캐치한 막내고모가 낙원을 흘겨보았다.

“넌 왜 대답이 없어, 강낙원?”

“뭐 그런 걸 물어 고모.”

“궁금하니까 물어볼 수도 있지. 낙원이 넌 생각 없어? 이거 안되겠네.”

“내가 언제 없다고 했어.”

“으이그. 저게 저렇다 은유야. 네가 이해해.”

“괘, 괜찮아요 고모님.”

부끄러움과 민망함 속에서 전을 다 부치고 나서 식탁 위로 옮기자 진수성찬이 그 위를 가득 채웠다.

뽀얀 사골육수를 낸 떡국엔 주원이 잘 부친 달걀 지단이 얹어졌고, 산적부터 시작해서 각종 전과 생선, 갈비찜, 잘 익은 김치가 맛깔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수많은 집안 사람들이 다같이 모이니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다 같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주제는 당연히 낙원과 은유였다.

“신혼여행 어땠어요? 재미있었어요?”

“네, 아가씨. 좋은 것도 많이 보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너무 재미있게 잘 다녀왔어요. 나중에 같이 가요!”

“진짜? 나랑 여행 가도 괜찮아요?”

“당연하죠! 저 기회 되면 할머님이랑, 아버님, 어머님이랑 다 같이 여행 갔으면 좋겠어요.”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어른들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이야기를 잘 하며 그 어른들에게 사랑 받는 은유를 보는 노진희 여사의 시선은 따뜻하기만 했다.

처음 저를 대하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알아봤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친 후 고모들은 각자의 시댁으로 향했고, 커다란 집안에는 큰아들인 준원과 작은아들인 준혁의 가족들만 남았다.

준원과 준혁은 오랜만에 바둑을 두겠다며 서재로 사라졌고, 노진희 여사는 낮잠을 자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들인 수연과 진희는 주방에서 티타임을 가졌고, 주원과 지혁은 각자 볼일이 있어 잠시 집을 비웠다.

조용해진 집 안, 은유는 낙원과 함께 그의 방으로 올라와 침대 위에 풀썩 앉았다.

“피곤하지.”

“괜찮아요! 점심 먹고 나니까 괜히 나른해서 그래요.”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은유는 넓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왼편에 보이는 침대와 그 옆으로 난 커다란 창문. 그리고 침대의 오른쪽 편에 놓인 원목의 책상과 수많은 책이 꽂혀 있는 책장.

얼마 전 부부싸움을 하고 본가에 왔을 땐 제대로 구경할 겨를이 없어 몰랐는데, 결혼 전 남편이 썼던 방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천천히 발을 옮기며 넓은 방을 구경하는 은유의 뒤로 다가온 낙원이 작은 몸을 뒤에서 끌어 안았다.

“신기해?”

“네! 제가 몰랐던 시절의 낙원씨가 여기에서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렇지.”

“기분 되게 이상해요. 우와! 이건 뭐에요?”

수납장 위에 놓인 나무로 된 오르골을 본 은유가 감탄을 내질렀다. 이런 예쁜 오르골을 모으고 싶지만 가격이 비싼 편이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은유의 얼굴 옆으로 손을 뻗은 낙원이 태엽을 감자 나무로 된 회전목마가 잔잔한 음악 소리와 함께 느릿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와!”

“오르골 좋아해?”

“네! 너무 예뻐요!”

제 품에 안겨 아이처럼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별것도 아닌데 괜히 뿌듯해진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집에 가져가자.”

“네? 그래도 돼요?”

“내 건데 당연하지.”

“저 진짜 좋아요! 너무 예쁘다. 매일매일 틀어놓고 있어야지.”

오르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은유를 보던 낙원이 그 작은 몸을 천천히 돌려 저와 마주보게 했다.

제 허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지긋이 내려다보는 시선에 은유는 심장이 떨려옴을 느끼며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폭 묻었다.

잔잔한 바닷가에 파도가 몰아치듯 저 끝에서부터 밀려오는 떨림에 낙원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제게 안겨온 은유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자꾸 예쁜 짓 하네.”

“그, 그렇게 쳐다보니까 좀 쑥스러워서요…….”

어떨 때 보면 대담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때 보면 또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아 매력이 끝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제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들어 저를 보는 모습에 낙원은 심장이 내려 앉는 것 같았다.

“낙원씨는 정말로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 같아요.”

“그래. 맞아.”

“그래서 너무 좋아요. 할머님도 그렇고, 아버님, 어머님, 주원아가씨. 그리고 도련님네랑 고모님들 전부 다요. 다 너무 잘해주시고, 너무 따뜻하세요.”

진심이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와 눈빛에 낙원은 한번 더 녹아 내렸다.

이렇게 예쁜 너를,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중에 우리 아이도 태어나면 사랑 듬뿍 주고 싶어요.”

“아이 빨리 가지고 싶어?”

“아, 그런 건 아니에요! 부담 갖지 마세요!”

“아니야. 궁금해서 그래. 네 말대로 ‘우리 아이’니까 같이 생각해야지.”

“……낙원씨는 어때요?”

“난 지금도 좋은데, 조금만 더 너랑 둘만 있고 싶기도 해.”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제 마음을 표현해주는 남편의 모습에 은유는 절로 피어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아이도 좋지만, 낙원씨랑 조금 더 이렇게 붙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은유의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작은 몸을 번쩍 들어 올린 그가 침대로 향했다.

“낙원씨!”

“붙어 있자며.”

“부, 붙어 있었잖아요!”

“부족해.”

은유를 침대에 내려놓은 그가 다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제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진하게 입을 맞춰오는 남편의 행동에 정신이 혼미해지던 은유가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무, 문은요?”

“들어오면서 잠갔어.”

낙원의 손이 은유의 포근한 니트를 벗겼다.

“아, 아래에 어른들 계시는데…….”

“절대 안 올라오실 거야.”

커다란 손이 작은 몸을 꼭 끌어 안았다.

“그, 그럼 우리 최대한 조용히…….”

“알았어.”

그 대답에 은유의 두 팔이 낙원의 목을 끌어 안았고, 온 몸의 구석구석 닿아오는 남편의 손길에 은유는 입을 꾹 다물어야만 했다.

.

명절이라 비교적 한산한 시내의 카페 안에서 지혁은 커피 두 잔을 사이에 두고 김비서와 마주 앉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창수씨가 연락을 해 왔다고요.”

“예. 어제 저녁에 휴대폰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아직 한국으로 올 수는 없답니다.”

“전화로도 불가하고요.”

“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마음을 돌린 것일까, 아니면 함정인 것일까.

“함정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사장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닐 수도 있죠.”

“……이번에도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 쪽에서 움직이기 힘들다면, 내가 움직여야죠. 당시 사건 담당했던 형사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당시에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들이 중간에 다른 형사들로 교체가 됐답니다. 자기들도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 영문도 모르는 채로 날치기를 당했다고 생각하고요. 경찰 내부적으로도 알아보는 중이니까 조만간 답변이 올 겁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사진을 보던 지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김태형 이사 쪽은 어떻습니까?”

“너무 깨끗합니다. 사람 자체도 평판이 좋고, 선행도 먼저 나서서 하고. 봉사활동도 자주 다닌답니다. 마치 돌아가신 강전무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직 의심을 거둘 단계가 아닙니다. 조금 더 지켜봐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굳을 얼굴을 하고 있는 지혁을 보던 김비서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낙원 도련님한테는…….”

“아직 모릅니다. 일단 문창수씨 만나보고 나서, 결정할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잠은 좀 주무십니까? 전보다 얼굴은 괜찮아 보이시는데요.”

“요즘 신경 쓸 일이 많다 보니까, 딴생각을 못하고 있네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지혁의 휴대폰이 진동소리를 내며 울렸고 액정을 확인한 그가 웃으며 제 휴대폰을 들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 왔네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얼굴이 나빠 보이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김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려 카페를 빠져나갔다.

남겨진 지혁이 부드럽게 액정을 터치하자 제법 익숙해진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이사장님!]”

“9시 정각이야.”

“[안 늦었잖아요!]”

“1분만 늦었어도 호주 가려고 했어.”

“[허. 우리 담임선생님이랑 은유선생님도 안 그러시는데요?]”

기가 찬다는 듯한 목소리를 하고 있는 주인공은 민지였다.

저번에 호주에 다녀온 후로 9시가 되기 전에 꼬박꼬박 전화를 해서 집에 잘 들어갔다는 말을 듣는 게 하루 일과가 되었다.

무원과 재단의 일로 정신 없이 일을 하다가도 전화만 오면 ‘벌써 9시구나’라고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별 일 없었고?”

“[오늘 나이트마켓 다녀왔는데 완전 재미있었어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거리공연도 구경하고.]”

재잘재잘 하루 있었던 일을 보고하다시피 하는 민지의 말에 지혁의 얼굴엔 ‘귀찮음’이 아닌 ‘포근함’이 서렸다.

느긋하게 앉아 통화를 하는 지혁의 모습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더 편안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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