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너도 나처럼2016.12.18.
얼굴을 괴고 아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낙원이 어느새 은유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해주는 이야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할머니를 병원에서 만났다고?”
“네. 엄마랑 일주일 동안 같은 병실 쓰시면서 많이 친해지셨대요. 저의 뭘 보고 마음에 들어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엄마까지 설득하신 걸 보면 정말 좋은 분이시겠구나 했어요.”
낙원으로써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늘 할머니가 점 찍어둔 아이라고만 했지, 어디서 만났다는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는데.
몇 개월 전 다리를 다치셔서 원식의 외삼촌이 운영하시는 개인병원에 입원하셨던 적이 있다. 그 때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났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럼 그 친구라는 게, 장모님이셨어?”
“그런 셈이죠. 두 분 아직도 자주 만나시잖아요.”
실제로 노진희 여사는 은유의 엄마를 정말로 좋아했다.
나이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말이 잘 통한다며 종종 집으로 부르기도 하고, 밖에서 따로 만나기도 하고, 은유의 친정 집으로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낙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은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할머니한테 감사하다고 해야겠네.”
“왜요?”
“그렇게 밀어붙이신 덕분에 너랑 결혼했잖아.”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건데요, 그 때 낙원씨 진짜 무서웠던 거 알아요?”
그 날 그렇게 ‘또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 절대 이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며칠을 계속해서 제 집으로 찾아오시던 할머니의 정성과 화려한 말솜씨에 은유는 설득을 당했다.
살아보고 정 아니라고 생각되면 그땐 갈라서도 좋다는 조건까지 덧붙이셨다.
남들이라면 전혀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결혼 자체에 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던 은유는 할머니말씀대로 살아보고 안 되면 갈라서자 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낙원이 또라이처럼 보였지만 그렇게 성품이 대단하신 할머니의 손주라면 자신이 잘못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한줄기 희망을 가진 채였다.
“내가 좀, 그랬지. 그건 아직도 미안해.”
“아니에요. 그럴 만해요.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결혼하라는데, 곱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럼 너는. 왜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어?”
낙원의 물음에 은유는 몸을 틀어 그를 보고선 그의 허리에 제 손을 올렸다.
“할머님께서 정말로 좋으셔서요. 그런 할머님 밑에서 자란 분이라면, 나쁜 사람은 아니겠구나 했어요.”
부드러운 볼을 쓰다듬는 낙원의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다정했다.
손을 뻗어 은유의 몸을 끌어 안은 그가 귓가를 간질이듯 속삭였다.
“할머니한테 절이라도 해야겠다 진짜.”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의미에서, 효도 좀 하자.”
“네? 갑자기 무슨- 꺅!”
다시 한 번 아내의 몸 위로 올라선 낙원은 지난 밤의 아팠던 기억은 다 지워낸 채로 아내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은유가 좋아하는 특유의 미성으로 아내와 눈을 제대로 마주하며 입술을 열었다.
“사랑해, 은유야.”
그 음성이 주는 커다란 떨림에 은유는 두 손을 뻗어 남편의 얼굴을 붙잡고 제 입술을 대었다.
저도 사랑해요, 낙원씨.
잔잔했던 집안의 공기가 다시 뜨겁게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마친 낙원과 은유는 양 손에 짐을 한 가득 든 채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차 뒷좌석에 짐들을 싣고 나서 조수석에 은유를 태운 낙원은 빙 돌아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고 히터부터 켰다.
“춥지?”
“조금요.”
“담요 덮고 있어.”
남들보다 유난히 추위를 잘 타는 은유 때문에 늘 차에 담요를 싣고 다니는 낙원이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 커다란 담요를 집어 그녀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싸늘하기만 했던 차 안이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찼고, 낙원은 핸들을 틀어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새하얀 눈이 도로 위에 낮게 깔려 있는 지금, 두 사람은 대한민국의 대 명절 중 하나인 ‘설’을 맞이해서 청담동의 본가로 향하는 중이었다.
지난 추석에는 은유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힘들 테니 따로 집으로 오지 말라는 연락에 어안이 벙벙했고, 정말로 시댁에 가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냥 집에서 편히 쉬라는 할머니와 시부모님의 말에 은유는 절대 안 된다며 꼭 찾아 뵙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간단하게 밥이나 먹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은유는 ‘간단하게’ 밥만 먹을 생각이 없었는지 며칠 전부터 집 앞 마트에 가서 선물세트를 고르며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운전을 하며 힐끔 옆을 쳐다본 낙원은 여전히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은유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었다.
“뭘 그렇게 긴장해.”
“후, 저 진짜 떨려요. 이렇게 명절 맞이하러 가는 건 처음이잖아요.”
“긴장하지 마. 평소랑 다를 거 하나도 없어.”
“그래도……. 아, 정말 너무 떨려요.”
밤새 내린 눈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막히던 길은 ‘명절’이라는 이유로 아예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평소 30분에서 40분이면 도착했을 거리를 지금 30분이 넘도록 반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낙원을 보던 은유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부스럭거리는가 싶더니 작고 동그란 것 하나를 낙원의 입 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뭐야?”
“초콜릿이요! 운전하느라 피곤하잖아요.”
“고마워. 이런 건 또 언제 챙겼어?”
“원래 이렇게 당 보충을 해줘야 돼요.”
차가 많이 막히는 탓에 힘들 법도 했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는 토끼 같은 아내의 사랑스러움에 낙원은 지치기는커녕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고 생각했다.
입 안에 넣은 초콜릿을 씹자 달콤한 맛과 아몬드의 고소함이 함께 느껴졌다.
“초콜릿 잘 먹네 심은유.”
“저 초콜릿 되게 좋아해요. 이상하게 사탕은 싫어하는데, 초콜릿은 집에 쌓아둬야 마음이 편한 거 있죠?”
예쁘게 웃으며 재잘거리는 은유를 빤히 쳐다보던 낙원이 몸을 슥 옮겨 오물거리는 입에 짧게 입을 맞추자 잔뜩 붉어진 얼굴이 들어왔다.
“얼굴 빨개졌다.”
“낙원씨 때문이잖아요!”
“예쁜걸 어떡해.”
정말이지, 하루가 다르게 사랑꾼이 되어가는 모습에 쑥스러움도 배가 되었지만 그만큼 행복함도 같이 커졌다.
“아, 얼른 갔으면 좋겠다.”
“앉아있는 거 힘들지?”
“아뇨. 할머님도 보고 싶고, 아버님이랑 어머님도 보고 싶어서요. 아! 주원 아가씨도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요!”
노강관광의 마케팅 팀장으로 일을 하고 있는 주원은 몇 달 전부터 새로 시작된 프로젝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동안 종종 만나서 잘 놀곤 했는데 요 몇 달간 만나지 못해서 아쉽던 차에, 오늘 시댁에 같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반가워했는지 모른다.
“주원이가 그렇게 좋아?”
“그럼요! 우리 아가씨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어요? 예쁘고, 착하고, 능력 있고! 같은 여자지만 진짜 멋있고 부러워요.”
소심한 저와는 달리 아가씨인 주원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서부터 당당함이 넘쳐 흘러 그 모습을 늘 부러워하고 동경해왔었다.
그런 주원을 보는 걸로 대리만족을 느끼며 좋아했는데, 한동안 그걸 못해서 좀 속이 상하기도 했다.
시댁 식구임에도 어른들은 물론이고 주원이까지 어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제 편으로 만들어 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긴 뭐. 나까지 잡았으니 말 다 했지.”
“네?”
“아니야. 너 예쁘다고.”
“그, 그만 좀…….”
“계속 할거니까 익숙해지려고 노력해봐. 너 진짜 예뻐서 그러는 거야.”
남편의 사랑까지 독차지한 은유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니까.
그 뒤로 약 1시간을 넘게 더 달려 본가에 도착하자 이미 주차장에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차들이 보여 은유는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챙겨온 선물 세트를 뒷좌석에서 꺼내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낙원이 그 짐들을 제 손으로 옮겼다.
“내가 들게.”
“무거운데 같이 들어요.”
“나 힘 좋은데. 알지?”
농담 반, 진담 반인 그 말에 은유는 혹시라도 누가 들을 새라 낙원의 팔을 때렸다.
“못살아 정말!”
“때리는 게 취향이야? 요즘 자꾸 때리네, 심은유.”
“뭐에요?”
“알았어 그만할게. 추우니까 들어가자.”
어쩌다 이런 능구렁이가 되었는지.
그러나 그 모습조차 멋있어서 은유는 오늘 또 한번 남편에게 반했다.
주차장을 나와 눈이 소복이 쌓인 정원을 가로지르자 현관 앞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지혁이 두 사람을 발견하곤 휴대폰을 집어넣고 천천히 걸어왔다.
“왔어?”
“어. 넌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오랜만이에요 형수님.”
“아, 네 도련님. 안녕하셨어요?”
시댁 식구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있는 자리에선 이렇게 늘 존댓말을 해오는 지혁의 모습이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지혁이 웃으며 은유를 쳐다보았다.
“적응해보려고 해봐요. 익숙해져야 하잖아요.”
어쩜 말하는 것도 남편인 낙원과 이렇게 비슷한지. 사촌이 아니라 그냥 형제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닮은 두 사람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가까워 보였다.
지혁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입구에서부터 풍겨 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에 이끌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낙원의 아빠와 지혁의 아빠가 두 사람을 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며느리 왔어? 차 많이 막혔지?”
아들인 저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아내인 은유부터 반기는 아빠의 모습에 낙원은 헛웃음이 나왔다.
“아빠. 운전은 내가 했어.”
“당연히 네가 해야지, 그럼 우리 은유가 하겠냐? 밖에 많이 춥지? 우리 며느리 추울까 봐 내가 보일러 빵빵하게 틀어놨다.”
“우와. 감사합니다 아버님!”
졸지에 찬밥신세가 된 낙원은 작은아버지인 준혁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가지고 온 짐을 소파 옆쪽에 내려놓았다.
“할머니는요?”
“어머니는 잠깐 요 앞에 마트에 가셨어. 주원이랑 같이.”
“마트요?”
“오실 때가 다 됐는데.”
준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관문이 열리며 노진희 여사와 주원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할머니 때문에 웃는다 진짜.”
“인석아. 너도 나중에 자식 낳고, 손주 낳아봐.”
“이 정도는 아닐 것 같거든요?”
집안으로 들어선 노진희 여사는 소파에 앉아있는 은유를 발견하고선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가!”
“할머님!”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를 꼭 껴안고 등을 쓰다듬은 은유는 주원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응 새언니. 잘 지냈어요?”
“그럼요! 세상에, 더 마른 것 좀 봐. 밥 잘 챙겨먹고 있는 거 맞아요?”
만나자마자 쏟아지는 잔소리에 주원은 가슴이 따뜻해져 옴을 느끼며 은유의 어깨에 제 손을 턱 올렸다.
“나 너무 바빴잖아요. 엄마랑 인사했어요? 작은엄마랑 고모들이랑 맛있는 거 만든다고 주방에서 안 나오시는데.”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인사 드리러 가려고요.”
주원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하는 은유의 뒤를 낙원이 조용히 따랐다.
안으로 들어서자 집안 여자들이 다 모여 음식을 만드는 모습이 흡사 어느 양반 집의 ‘잔칫날’과 다를 게 없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계란 물을 풀고 있는 수연의 옆으로 다가간 은유가 그녀의 팔에 팔짱을 쏙 꼈다.
“어머님!”
“어머! 은유 왔어? 언제 왔어?”
“조금 전에요! 안녕하세요 작은어머님, 고모님.”
예쁘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은유를 보는 여자들의 시선엔 따뜻함과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요 근래의 근황부터 시작해서 신혼여행에서는 어땠고, 학교에서는 어땠고 예쁜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은유를 지켜보는 낙원의 얼굴에도 행복함이 가득 피어 올랐다.
“형수님 대단하시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틀자 언제 왔는지 모를 지혁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은유를 팔짱을 낀 채로 보고 있었다.
“대단하지. 이 집안 사람들을 다 쥐고 있잖아.”
“좋겠네, 강낙원.”
전과는 달리 환하게 웃으며 저를 보고 있는 낙원의 모습에 지혁이 작게 웃으며 부러운 목소리를 내자 5년 전의 그날들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좋아 죽겠어. 그러니까 너도 빨리 결혼해.”
저렇게 가족들 틈에 섞여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이지 미치도록 행복한 일임에 틀림 없으니까.
너도 이런 행복한 감정 꼭 느꼈으면 좋겠다.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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