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85화 (85/112)

85. 무서운 또라이2016.12.17.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4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집에서 컴퓨터를 하던 은유는 책상 위를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진동 소리에 드라마를 보며 웃다가 액정을 밀었다.

“응, 엄마.”

“[은유야 뭐 해?]”

“나 드라마 봐. 왜 아직 안 와?”

“[엄마 입원하래.]”

그 한마디에 웃고 있던 은유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입원이라니.

“입원?”

“[응. 좀 심해서 사진 찍어보기로 했어. 미안한데 엄마 짐 좀 대충 챙겨서 가지고 와 줄래?]”

“알았어. 내가 챙겨서 갈게 엄마.”

전화를 끊고 난 은유는 떨리는 손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이 메이고 눈물이 핑 돌아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문지르고선 백팩에 필요한 물품들을 챙겼다.

집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정형외과 건물 4층으로 올라가 ‘402호’라고 적힌 문 앞에 다다르자 프린트된 종이에 적혀 있는 엄마 이름이 그녀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굳은 얼굴을 애써 피며 똑똑 문을 두드리자 ‘네’하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손잡이를 잡고 돌려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에 있는 두 명의 아주머니와 마주친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오른쪽 끝에 위치한 침대에 앉아 있는 엄마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엄마.”

“어, 왔어?”

“많이 안 좋대?”

“사진 봐야 알지. 너무 걱정하지 마.”

“입원할 정도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어제 오후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엄마는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면서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부딪혔다.

첫 날에는 작은 통증이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무릎 전체에 시퍼런 멍이 들어 정형외과에 다녀오겠다며 나선 엄마가 입원을 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땐 심장이 철렁했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에 다리 수술을 받아 무릎은 항상 조심해야 하는데, 그런 엄마가 다쳐서 입원까지 했다는 사실에 은유는 속이 쓰렸다.

챙겨온 물품을 꺼내는 그녀를 보며 반대편에 앉아 있던 두 아주머니가 그녀를 칭찬했다.

“딸이 참 곱네.”

“하하. 감사합니다.”

평소 발목을 자주 접질리고 손목이 약한 은유도 이 정형외과의 단골 환자였다.

엄마에게 주사를 놔주기 위해 들어온 간호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그녀를 보며 같은 병실을 쓰는 다른 두 아주머니는 그녀의 성품을 칭찬했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집안일은 은유가 맡아 했다.

청소부터 시작해서 빨래를 하고, 반찬을 만들고, 군복무 중에 휴가로 나와 있는 남동생을 챙기고. 이직을 하기 위해 잠시 쉬던 때라 천만 다행이었다.

일요일은 집에서 쉬면서 집안일을 하고, 월요일에 일찌감치 청소를 해놓고 전날 만들어 놓은 반찬을 싸서 병원으로 간 은유는 엄마의 건강부터 살폈다.

“좀 어때?”

“이것 봐. 멍이 더 심해졌어.”

“세상에. 미쳤어. 의사 선생님은 뭐라셔?”

“아직 회진 안 오셨어.”

심각한 얼굴로 엄마의 무릎을 살피던 사이, 누군가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 은유는 늘 그랬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 예쁜 아가씨는 누구야?”

“아, 우리 딸이에요 할머니.”

토요일 늦은 오후에 같은 병실로 들어왔다던 할머니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실제로 뵈니 할머니가 아니라 고운 아주머니처럼 보였다.

할머니의 발에 감긴 깁스를 본 은유가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고 침대에 앉게 해주었다.

“아이고, 고마워요 아가씨.”

“아니에요. 다리 괜찮으세요 할머니?”

“응. 괜찮아요. 늙으면 다 이렇지 뭐.”

제 다리를 침대 위로 올려주고 이불까지 덮어주는 은유를 보던 노진희 여사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제 엄마에게로 다가간 아이는 집에서 만들었다는 반찬들을 꺼내 냉장고에 차곡차곡 담았고, 바로 앞 시장에서 사온 과일들을 씻어와 예쁘게 깎아 병실 사람들에게 건네주었다.

은유가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 노진희 여사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은유의 엄마를 쳐다보며 물었다.

“딸이 참 착하네. 올해 몇이에요?”

“스물 여섯이에요 할머니.”

“아주 싹싹하고 예의 바르네. 딸 너무 잘 키웠어.”

“우리 딸이 좀 그래요. 애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다 컸구나 싶고.”

그 뒤로도 은유라는 여자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병실을 찾았다.

그 때마다 손에 간식거리나 과일을 들고 와서 병실 사람들과 나눠먹고, 제 엄마를 살뜰히 챙기고, 옆에서 말동무도 되어주었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누구보다 정확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노진희 여사에게 은유는 보석과도 같은 아이였다.

예의 바르고, 말도 예쁘게 하고, 웃는 것도 예쁘고. 생각 자체가 바른 아이였다.

그래서 노진희 여사는 한 남자가 떠올랐고, 그 날부터 은유의 엄마를 졸랐다.

“은유가 너무 예뻐서 그러는데, 내가 손주한테 소개 좀 시켜줘도 되겠어?”

“네? 은유를요?”

“응.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우리 손주가 괜찮아. 생긴 것도 잘생겼고, 선생님인데 마음씨도 착하고. 내가 은유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래.”

은유의 엄마는 노진희 여사의 제안에 적잖게 당황했다.

할머니와 같은 병실을 쓰며 느낀 점은 그녀의 성품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꽤 잘 사는 집의 할머니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고, 말하는 것도 교양 있었으며 말이 잘 통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은유의 엄마는 결국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인격이 훌륭한 할머님이 며칠을 계속해서 제발 한번만 부탁한다고 하시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퇴원을 하던 날 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은유야. 선 한번 볼래?”

병원에서 가져온 짐들을 정리하던 은유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뭐?”

“되게 괜찮은 사람이래. 생긴 것도 잘생겼고, 직업도 선생님이고.”

“엄마, 머리도 다쳤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갑자기.”

“이게 정말. 엄마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어이가 없으니까 그렇지. 내가 무슨 선이야? 난 결혼 안 한다니까.”

“누가 결혼하래? 한 번 만나나 보라는 거지.”

보통의 엄마들과는 달리 은유의 엄마는 ‘결혼’에 대해 그녀에게 전혀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 살고 싶다는 그녀에게 네 마음 편한 대로 하라는 이야기를 늘 해주셨던 분이다.

그런데 갑자기 병원에 다녀오시더니 선을 보란다. 대체 왜?

“싫어. 그런 거 안 해.”

“만나 보기나 해 봐. 좋은 사람일지 어떻게 알아?”

“언제는 혼자 살아도 된다며?”

“그래. 혼자 살아도 좋고, 괜찮으면 가정 꾸리고 사는 것도 좋지.”

“싫어. 안 볼래.”

순할 땐 한없이 순하다가도 이렇게 고집을 부릴 때면 한없이 철벽을 치는 탓에 은유의 엄마인 민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의 성품을 보면 그 손주라는 아이도 분명 괜찮은 사람일 텐데, 하는 생각에 민정은 이상하게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진짜 밥만 먹고 올 거야.”

“알았어 알았어.”

“정말이야 엄마.”

“알았대도.”

평소와는 달리 끈질기게 부탁하는 엄마의 모습에 은유는 마지못해 오케이를 했다.

‘밥 한끼’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이끌려 나온 은유가 향한 곳은 고급스러운 느낌의 한정식 전문 음식점이었다.

알뜰하기도 하고, 평소 밖에서 사먹는 음식을 별로 좋지 않아 하던 엄마가 얼마나 이 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이런 곳을 찾았을까 싶어 의아함을 품고 들어선 지 10분 뒤 은유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어서 와, 은유야.”

“할머니?”

가게 안쪽에 개별적으로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서자 미리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은유의 눈에 들어찼다.

엄마와 같은 병실을 쓰셨던 할머니와 그 옆에 앉아 있는 의문의 남자.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야 은유 엄마. 우리도 금방 왔어. 얼른 앉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얼떨떨한 은유가 엄마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고, 맞은 편에 앉은 할머니와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은유야. 놀랐지? 내가 부탁 좀 했어.”

“……네?”

“내가 너 마음에 들어서, 내 손주한테 달라고 엄마한테 몇 날 며칠을 부탁했어.”

그제서야 이 상황이 이해가 갔다.

은유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엄마를 쳐다보았지만 앞에서 저를 보고 웃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에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어 억지로 움직여지지 않는 머리를 끄덕여야 했다.

잠시 후 예쁜 접시에 담긴 음식들이 식탁 위에 가득 차려졌고, 할머니와 엄마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은유는 숨막히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티를 낼 수가 없어 묵묵히 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이만 가볼 테니까, 둘이 알아서 얘기 잘 하고 와.”

“네, 네?”

“낙원이 너, 은유 책임지고 집까지 잘 데려다 줘. 알았어? 은유 엄마. 우린 가자고.”

은유가 잡을 새도 없이 할머니와 엄마는 그 공간을 벗어났고, 은유는 황당한 얼굴로 제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인사 한 번을 한 게 다인 남자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전체적인 키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앉은 키도 컸고, 정장을 입은 어깨는 딱 벌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며 봐온 그 어느 남자보다 잘생겼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무서웠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방의 문이 열리고 따뜻한 김이 나는 차가 두 사람의 앞에 각각 한 잔씩 놓였다.

김여사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지른 건지. 심지어 이런 불구덩이에 저를 던져놓고 홀랑 도망을 가버리셨다.

따뜻한 유자 차를 호호 불어 한 모금 머금은 은유는 슬쩍 남자를 쳐다보다 화들짝 놀랐다.

그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하…….”

바보처럼 실없는 웃음을 내뱉는 은유를 보며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커피를 마신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앳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강낙원. 올해 서른.”

“……네? 아, 네, 네. 어, 저는 심은유고, 올해 스물 여섯이에요.”

남자의 목소리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미성이었다.

차가운 인상 때문에 목소리도 뭔가 낮고 음침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제 예상을 빗나갔다.

심지어 미성의 목소리는 굉장히 듣기 좋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은유에게 날아들었다.

“8월 20일 어때.”

“네?”

“결혼식.”

그 입에서 나온 말에 은유는 미처 삼키지 못한 유자차를 입 밖으로 내뿜었고, 그 액체들은 고스란히 맞은 편에 앉은 낙원의 얼굴과 정장 위에 안착했다.

“세, 세, 세상에……. 어, 어떡해. 죄, 죄송합니다!”

다급히 휴지로 손을 뻗은 은유보다 낙원이 조금 더 빨랐다.

네모난 상자에서 티슈를 뽑은 그가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얼굴과 옷을 닦고선 그녀를 쳐다보았다.

“싫다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하나?”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됐고. 8월 20일 괜찮나. 드레스 고르고, 사진 찍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이 또라이는?

은유는 낙원의 말에 기가 찼다.

아니, 처음 보는 자리에서 결혼식 날짜를 정하다니. 미친 게 아닐까?

“……저랑 결혼하실 생각이세요?”

그 질문에 낙원의 시선이 은유에게 닿았다.

흠칫할 만큼 무거운 시선에 은유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까 할머니 봤지. 네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하게 되어 있어, 이 결혼.”

“……저는 결혼 생각이 없는데요…….”

“그럼 네가 직접 말씀 드려. 내 말은 어차피 안 통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낙원이 어쩐지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자신에게 한 첫 마디가 결혼식 날짜인 이 남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또라이가 분명했다.

그것도 무서운 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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