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서로의 아픈 마음2016.12.15.
조금은 이른 저녁 식사 시간.
다른 자원봉사자들 틈에 섞여 식사를 하는 동안 은유는 태형에게서 의외의 모습들을 발견했다.
대기업 이사답지 않은 털털한 웃음과 행동이 그녀를 놀랍게 만들었다.
게다가 와서 사진만 몇 장 찍고 가는 기업인사들이나 정치인들과는 달리 태형은 청바지에 면 티셔츠로 복장부터가 달랐다.
“오늘 자원봉사 오신다는 분이 김태형 이사님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맞아요~ 아까 뵙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자원봉사자들 중에서도 여자들이 그에게 관심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대한민국 내에 10대기업 안에 드는 정진건설의 이사인 그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외국에서 유학하지 않고 오로지 대한민국 내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한 데 이어 대학교까지 한국에서 마친 그는 졸업하자마자 현역으로 군대에 입대함으로써 많은 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었다.
제대 후에는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정진건설에 들어가 밑바닥부터 시작했는데 승진이 빠르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수긍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욕을 하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또한 사회에 기부를 많이 하고, 남몰래 봉사활동을 다니는 일들이 1년에 몇 번씩 매스컴에 오르내려 서민들이 그에게 가진 이미지는 전부 다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습하며, 남들과 거리낌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하며,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은유는 유난히 그 모습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은유씨. 왜 이렇게 밥을 못 먹어요?”
“네? 아, 아뇨. 저 먹고 있어요.”
제게로 향한 태형의 시선에 은유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는 수저를 든 손을 움직였다.
그 날 행사에서 그를 본 뒤로 몰래 인터넷에 찾아보면서 앞으로 마주칠 일이 없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하필 낙원도 없는 지금 그와 마주쳤다.
하긴 뭐,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남편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날 자신을 잡아줬던 태형을 죽일 듯 노려보던 낙원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 자리에 없는 게 백 번 천 번 나았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끝내고 나니 아주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태형과 마주앉은 은유는 조금 전 커피를 마시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보니까 급하게 나가시던데, 무슨 일 있으셨어요?”
“네? 아……. 급한 일이 좀 있어서요.”
“그러셨구나. 저는 강낙원씨 표정이 안 좋아서, 제가 뭐 실수라도 했나 걱정했거든요.”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혹시 불쾌하셨다면 대신 사과 드릴게요. 제가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아니에요. 급한 일 있으셨다면서요. 그럴 수 있죠.”
말하는 걸로 보나, 웃는 얼굴로 보나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제가 그러길 꺼려할 정도로 정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태형은 그런 은유를 빤히 쳐다보며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유명한 강낙원과 결혼한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오늘 보니 그냥 평범한 여자였다.
아이를 좋아하고, 잘 웃고, 남을 배려하고. 제 주변에서는 볼 수 없던 부류의 여자.
“듣자 하니 강낙원씨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 중이시라면서요?”
“네. 그렇게 됐어요.”
“좋으시겠어요. 그 때 보니까 두 분 사이도 굉장히 좋아 보이셔서, 부러웠거든요.”
“아……. 하하. 네.”
부러웠던 건 사실이다.
그 동안 많은 여자들을 만나봤지만 다들 자신이 아닌 돈 때문에, 집안 배경 때문에 옆에 있었을 뿐이니까.
그 수많은 여자들 중에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다들 그냥 시시하고, 재미없었다.
“이렇게 뵌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자주 보면 좋겠어요.”
“네?”
“아, 당연히 강낙원씨도 같이요. 은유씨가 워낙 좋은 분 같아서요. 저도 좀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 네…….”
면전에 대고 ‘아니요’할 수는 없어 은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아직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무턱대고 미워하지 말자. 내 감이 틀렸을 수도 있는 거고, 오래 봐도 모르는 게 사람이니까.
괜히 불편하게 생각해봤자 봉사활동을 하는 내내 신경만 쓰일 거라는 걸 깨달은 은유는 마음을 비웠다. 단지 처음이라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마지막 서류를 검토하고 자켓을 집어 든 지혁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 뜬 이름 세 글자에 의아한 얼굴을 한 그가 화면을 부드럽게 밀었다.
“어.”
“[어디야.]”
“나? 회사. 왜? 너 또 집 나왔냐?”
“[……좀 보자. 회사 앞이야.]”
귓가를 통해 들려온 낙원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뚝 끊어진 전화를 내려다본 지혁은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층에서 내려 로비를 지나자 정문 옆에 서있는 기다란 형체가 보였다.
“너 내 애인 코스프레 하냐?”
“넌 무슨 일을 이 시간까지 해.”
낙원의 핀잔에 시간을 확인한 지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10시면 별로 늦지도 않았구만.
“잔소리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집으로 가자.”
“언젠 집에 오지 말라며?”
“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잘 들었다고.”
티격태격 하면서도 두 사람은 묘하게 달라진 공기를 느끼고 있었다.
각자의 차를 타고 지혁의 집에 도착하자 낙원은 저번처럼 제 집인 양 편안하게 걸어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이젠 놀랍지도 않은지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들어가 자켓을 벗고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와인?”
“분위기 낼 기분은 아닌데.”
“그럼 맥주 마셔.”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맥주 두 캔을 꺼내온 지혁이 낙원의 맞은 편에 앉아 다리를 꼬고 캔을 땄다.
거품이 올라오는 입구에 입을 가져다 대자 특유의 시원함과 개운함이 목 뒤로 꿀꺽꿀꺽 넘어갔다.
“크. 역시 일 끝나고 마시는 맥주가 맛있네.”
젖은 입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지혁이 자신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 낙원을 쳐다보았다.
오늘 왜 이래 진짜.
“뭘 그렇게 봐? 사람 설레게.”
“너 PTSD있다며.”
낙원의 목소리가 거실에 잔잔하게 울렸다.
맥주 캔으로 손을 가져가던 지혁이 흠칫 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개소리야 이건 또.”
“원식이 형한테 듣고 오는 길이야.”
“……아, 형 진짜.”
“왜 얘기 안 했어.”
지혁은 맥주 캔을 들어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양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달던 술이 지금은 좀 쓰게 느껴지는 것 같다.
“신경 쓰지 마. 심각한 거 아니니까.”
“심각한 게 아닌데 잠을 못 자?”
“네가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왜. 얘기 듣고 나니까 동정심이라도 생겨?”
“강지혁!”
“너도 힘들었잖아. 거기다 대고 내가 뭐라고 말을 해. 난 무원이 형이 죽어가는 동안 아무것도 못했어. 그 쉬운 번호도 못 눌렀다고.”
둘의 사이에 적막감이 흘렀다.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일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힘이 들고 괴로운지 누구보다 서로가 더 잘 알아서.
낙원은 천천히 제 두 손을 꽉 쥐었다가 펴며 마주앉은 지혁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붉어진 모습에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치밀어 올랐다.
“적어도 나한테는, 나한테는 사실대로 얘기 했었어야지.”
“왜. 죄책감 들어? 나한테 그렇게 퍼부어서?”
“그래!”
날카롭게 파고든 목소리에 맥주 캔을 내려놓던 지혁의 손이 우뚝 멈췄다.
“내가! 내가 얼마나! ……내가 얼마나 널 원망했는데. 형 죽인 거 너라고, 너한테 얼마나 내질렀는데. 그걸 왜 네가 다 듣고 있어. 왜 가만히 듣고 있어!”
“사실이야 강낙원.”
“강지혁.”
“형 죽은 거, 나 때문이야.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신고했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구급차를 불렀더라면.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렸더라면! 무원이형 그렇게 안 죽었어.”
울음이 섞인 외침에 낙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난 옆에 할머니라도 있었지. 우리 아빠, 엄마, 주원이. 그리고 은유라도 있었지.
넌. 강지혁 넌. 넌 아무도 없었잖아.
네 부모님한테조차 말 못했잖아 넌.
그런 너한테 내가 얼마나 독하게 굴었는데.
죽은 형만 불쌍하다고 내가 얼마나 널 원망했는데.
“그게 왜 너 때문이야. 강무원이 신고하지 말라고 한 거잖아.”
“그러니까 내 잘못이지. 그렇게 해선 안됐는데, 판단을 잘못했어. 그래서 형이 죽었어. 강낙원. 난 아직도 죽을 듯이 후회해. 다시 한 번 그 기회가 온다면, 다시 한 번 그 날이 온다면 절대 형 그렇게 안 뒀어. 무원이 형이 뭐라고 말했던 간에 무시하고 형 먼저 살렸을 거야.”
그 부분은 아직도 잘린 상태다.
무원이 왜 자신에게 신고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는지 아는 바가 없다.
그래도 후회가 된다.
그래서는 안됐었다. 무원을 살렸어야 한다. 절대 안 된다고 애처롭게 말하는 그의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한다.
다 마신 맥주 캔을 손으로 찌그러트린 지혁이 눈가가 촉촉해진 낙원을 보며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죄책감 갖지 마, 강낙원. 내가 너였어도 나한테 똑같이 했어.”
“……너 진짜…….”
잠시 숨을 고르던 낙원이 머리를 쓸어 넘기고선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조사한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냥 흘려 들어.”
“강지혁.”
“아직 아니야. 내 기억이 믿을 만한 건지도 아직 모르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
“무원이형 일이야. 적어도 난 알아야 할 자격 있어.”
“너까지 들춰서 꼬리 잡히면 다 끝이야. 기다리는 중이니까, 너도 조금만 더 기다려봐. 뭔가 나오면 너한테 제일 먼저 얘기할 테니까.”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동안 넌 대체 어디까지 한 걸까.
너도 무서웠을 거면서. 너도 힘들었을 거면서.
어떻게 너 혼자 이렇게 견뎠고, 내가 모르던 사실을 찾아보고 있었던 걸까.
난 대체 얼마나 더 너한테 미안해야 하는 걸까.
낙원이 천천히 울음을 삼켰다.
“내가 도울 일은.”
“아직 없어. 넌 애들이나 잘 가르치고, 형수님한테나 잘 해. 뒷조사는 내 전문이야.”
그렇게 말하는 지혁이 다른 날보다 더 든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미안해 강지혁.
괜찮아 강낙원.
두 사람의 사이에는 그렇게 둘만 아는 눈빛이 서로의 아픈 마음을 위로했다.
띵동.
조용한 집안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소파 위에 누워있던 은유가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달려 나갔다.
현관문을 철컥 열자 커다란 몸이 그녀를 덮쳤다.
“낙원씨?”
“……은유야.”
“세상에……. 무슨 술을 이렇게……. 낙원씨, 괜찮아요?”
남편에게서 전해져 오는 진한 술 냄새에 은유는 그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단단한 허리에 다른 손을 둘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저보다 훨씬 큰 키에 커다란 몸을 이끄는 게 쉽지 않았지만 가까스로 침실로 들어선 그녀는 힘겹게 발을 옮겨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어휴,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봉사활동이 끝이 나서 그에게 연락을 했는데 오늘은 조금 늦어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걱정이 되어 먼저 자라는 말을 지키기 못하고 기다렸는데,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들어온 남편은 인사불성이었다.
그의 외투를 벗기고 양말까지 벗겨준 은유는 주방으로 가 컵에 찬물을 따라 침실로 향했다.
“낙원씨. 물 한잔만 마시고 자요.”
대답이 없는 그의 등 뒤로 손을 넣어 상체를 일으킨 은유가 물컵을 그 입에 가져다 대었고, 목을 축인 그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 안아 품에 안았다.
“은유야…….”
“낙원씨. 괜찮아요?”
단 한번도 그가 취한 모습을 본 적은 없었던 터라 은유는 당황스러웠지만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힘들어하는 건가 싶어 두 팔로 그의 넓은 어깨를 꼭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괜찮아요. 나 여기 있어요.”
“……은유야…….”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젖어 있어 은유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은유를 꽉 끌어안은 낙원은 작은 어깨에 제 얼굴을 묻고 울었다.
어깨가 젖어가는 것을 느낀 은유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지만, 이내 더 다정한 손길로 남편의 등을 토닥거리며 머리카락 사이로 제 손을 넣어 안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낙원씨. 다 괜찮아요.”
은유에게 위로를 받는 이 순간에도 낙원은 죄스러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다.
잘못은 자신이 해놓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는 저와는 달리 지혁은 혼자다.
옆에 아무도 없을 그가 가여워서, 그 동안 모질게 대했던 자신이 미워서 낙원은 쏟아지는 눈물을 닦지 못했다.
그저 사랑하는 아내의 품에 안겨 조용히 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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