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몰랐던 이야기2016.12.14.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어?”
“그럼요! 난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일 편하게 봐요 낙원씨.”
두 사람이 탄 차가 커다란 보육원 앞에서 부드럽게 멈췄다.
낙원은 안전벨트를 푸는 은유를 쳐다보며 미안함을 전했다.
“혼자 보내서 미안해.”
“괜찮아요 정말로. 잘 하고 갈게요.”
“끝나면 전화 하고. 일찍 마치면 바로 올게.”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저 그럼 가볼게요.”
“그래. 조심해서 잘 하고 와.”
토요일인 오늘, 원래대로라면 같이 봉사활동을 했어야 하는데 낙원이 아침 일찍 원식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며칠 전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생겨 시간을 내달라고 했고, 바빴던 원식으로부터 오늘 오전에 잠깐 시간이 난다는 연락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봉사활동을 포기했다.
은유는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혼자서 다녀오겠다며 의지를 불태워 보육원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뒷모습이 보육원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차를 돌린 낙원은 원식이 기다리고 있을 병원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병원 로비에 위치한 카페로 들어선 낙원은 가운을 입은 채로 피곤한 얼굴을 매만지며 앉아있던 원식을 발견했다.
“얼굴이 다 죽어가네.”
앞에서 들려오는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원식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피곤해 죽겠다 진짜.”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
“그러게 말이다. 요즘 바쁘네.”
“밥은 먹었어?”
“일단 잠부터 좀 자고 싶다.”
그 귀한 시간을 제게 나눠줬으니 낙원은 더 지체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지혁 때문에 보자고 했어, 형.”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던 원식은 낙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낙원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뭐 있지.”
“……뭐가?”
“강지혁 요즘 이상해. 자리 자주 비우는 것도 그렇고,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피곤함은 가득하고. 형은 뭐 알 거 아냐.”
어릴 적부터 워낙 같이 친했기에 자신과 지혁이 틀어진 이후로도 원식과 지혁은 자주 연락하고 만난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얼마 전부터 지혁이 이상해서 원식에게 찾아왔는데 역시 생각대로 그는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너 지혁이랑 사이 안 좋잖아.”
“언젠 더 늦으면 안 된다며.”
원식은 제 앞에 앉아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낙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동안 오래 숨기기도 했고, 지금 이렇게 물어보는 걸 봐서는 이 관계가 회복될 기회가 온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원식은 제법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낙원을 쳐다보았다.
“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거 알아?”
“어.”
무원의 일로 온 가족이 겪었던 병이니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낙원은 그런 걸 갑자기 왜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원식을 쳐다보았고, 원식은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 할머님부터 시작해서 아버님, 어머님, 너. 그리고 주원이까지 전부 다 심리치료 한참 받았지?”
“그게 왜?”
“지혁이는 어땠을 것 같냐?”
“……무슨 말이야?”
“너 그 자리에 지혁이 있던 거 알지.”
안다. 강지혁이 그 자리에 있었던 건. 그래서 제가 그를 미워하고 있으니까.
“지혁이가 거기에 있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너랑 주원이, 나. 이렇게 셋밖에 없어.”
“알아. 형이 강주원한테만 얘기했다며.”
“무원이 죽던 날, 강지혁이 신고 할 수 없던 거 알아?”
“무슨 소리야 그게.”
“경찰에 전화하려던 지혁이를 강무원이 말렸어. 살아있던 강무원이, 경찰 대신 나한테 전화하라고 지혁이한테 부탁했고.”
낙원은 지금 혼란스러웠다.
앞에 앉은 원식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단 한 마디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 똑바로 해 형.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야.”
5년 전 그 날.
레지던트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던 날들로 정신이 없는 수많은 일상들 중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5시간이 넘는 긴 수술이 끝나고 잠깐 눈을 붙이려고 침대에 막 누웠을 때, 지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강지혁?”
“[……형…….]”
“뭐야. 너 목소리가 왜 이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잘게 떨리는 목소리에 원식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급히 구급차를 보내 무원의 집으로 가서 그를 병원으로 옮기고 수술을 했지만 그 중간에 무원이 숨을 거두었다.
무원을 싣고 온 구급차에는 지혁도 함께 있었다. 커다란 충격으로 병원으로 오는 도중 실신한 지혁은 응급실로 옮겨졌고, 다시 깨어났을 때 지혁은 알 수 없는 말을 원식에게 남겼고 다시 정신을 놓았다.
그리고 지혁이 완전히 깨어났을 땐 무원의 집에서부터 병원에 도착한 부분까지 기억을 몽땅 지운 후였다.
“당시 정확한 상황은 나도 잘 몰라. 강지혁이 기억을 다 되찾은 게 아니라서. 분명한 건, 신고하려던 지혁이를 무원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절대 안 된다고 말렸고 나한테 전화를 한 거였어. 분명 무원이가 지혁이한테 무슨 이야기를 했을 텐데, 기억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을 지는 아직 모르고.”
말도 안 된다.
형이 그랬을 리가. 그랬을 리가 없다.
“갑자기 도망치듯이 영국으로 가고 나서 한동안 연락이 뜸했었어. 많이 해봐야 1년에 한두 번? 그러다 1년 전에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나한테 그 때 상황 기억하냐고 물어보고. 악몽을 꾼다더라. 매일 밤 하루도 빠짐없이.”
“……말도 안 돼.”
“지혁이 위치가 위치인지라 병원을 자유롭게 드나들지도 못했고, 불면증에 시달려서 수면제도 먹고 그랬어. 한국 돌아와서 병원 나오래도 재단에 피해 갈까 봐 고집부리고 안 나오고.”
대체 왜.
왜 그런 사실을 숨긴 거야, 강지혁.
“김비서님한테 들은 얘긴데 지혁이 요즘 다시 힘들다더라. 한동안 괜찮다 싶었는데 악몽도 자주 꾸고. 그렇지 않아도 지혁이 만나서 진료 받게 하려고 하던 참이야.”
“…….”
“낙원아. 무원이 일, 아무래도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더 있는 것 같아. 내 생각에 지혁이는 그걸 혼자 알아보는 것 같고.”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지혁이가 너한텐 절대로 얘기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요즘 지혁이 보니까 꼴이 말이 아니라서. 너도 이젠 마음을 좀 연 것 같고. 다른 얘기는 지혁이한테 직접 물어봐.”
“…….”
“너도 많이 힘들었다는 거, 잘 알아. 근데 강지혁도 그래. 다 같은 가족이잖아. 너야 네 가족들이랑 같이 치료 받고, 지금은 제수씨도 옆에 있고. 근데 강지혁은 그 일 이후로 혼자야. 절대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아서 지혁이네 부모님들조차 모르시고.”
‘벌써부터 짜증 나네.’
‘진짜 엿 같네.’
‘우리 형 놔두면서까지 지켜온 재단인데. 거기 먹칠은 하지 말아야지, 내가.’
“……나 강지혁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형.”
넌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 모진 말들을 다 듣고 있던 거야, 강지혁.
천천히 감기는 낙원의 두 눈 끝엔 작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어느새 가슴 위까지 내려온 긴 머리칼을 하나로 질끈 올려 묶은 은유는 저를 졸졸 쫓아다니는 아이들과 놀아주며 추운 날씨에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죽어라!”
“으윽! 이, 이렇게 당하다니…….”
놀이방 안에서 한 남자 아이가 쏜 장난감 총에 맞고 쓰러지는 시늉을 하는 은유에게 달려간 또 다른 아이가 인공호흡을 하겠다며 그녀의 입술에 제 입을 여러 번 맞대었다.
“살아나라!”
“아니! 왕자님께서 절 깨우셨군요!”
조금의 힘든 기색도 업이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은유를 쳐다보는 자원봉사자들의 입에는 똑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처음 전화로 부부가 자원봉사를 오겠다고 했을 때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오늘 아침 보육원에 혼자 오게 되어서 죄송하다는 연락을 전달받았을 땐 의아했다.
몇 시간 전 혼자 들어온 젊은 여자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다시 한 번 사과를 하는 것을 보고 개념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 돌보는 일은 또 어찌나 잘하고, 청소도 얼마나 야무지게 잘 하는지.
자원봉사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던 기존에 있던 봉사자들은 은유의 매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흐뭇한 얼굴로 은유를 보던 그들의 뒤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그 인사에 고개를 돌린 자원봉사자들은 입을 떡 벌렸다.
큰 키에 수려한 외모를 지닌 남자는 경제신문과 텔레비전에서 심심치 않게 봐왔던 인물이었다.
정진건설 김태형 이사.
“아, 안녕하세요. 여기는 어쩐 일로…….”
“오늘 봉사활동 온다고 연락 드렸던 김태형입니다.”
일주일 전, 봉사활동을 오겠다고 연락했던 한 남자가 있었다. 전화로 목소리를 들었을 땐 제법 나이가 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봉사활동을 온 사람이 김태형이라니.
맙소사.
평소 그가 봉사활동은 물론이고 기부도 많이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대중매체와 갖가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접한 상태였는데 실제로 이렇게 보니 신기하고, 외모만 멋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싶었다.
“아, 네, 네. 안녕하세요.”
“저 뭐부터 하면 될까요?”
다른 자원봉사자들의 안내를 받아 태형이 온 곳은 은유가 아이들과 놀고 있던 놀이방이었다.
남자 아이들과 바닥을 뒹굴며 놀고 있는 은유를 발견한 그가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은유씨?”
조금 전 남자아이가 한방 더 쏘았던 장난감 총에 맞고 쓰러져 있던 은유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살며시 고개를 들다 태형과 눈이 마주쳤다.
“어? 김태형 이사님?”
“하하. 정말로 은유씨였네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저 봉사활동 하러……. 이사님은요?”
“저도 봉사활동 하러 왔는데요. 이거 우연 치고는 너무 신기한데요?”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동안 어질러졌던 놀이방을 치우며 태형이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런 곳에서 뵐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저도요.”
그 날 무원의 죽음에 관해 의도치 않게 들은 이후로 다시 마주한 태형은 마냥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건넸다.
“오늘은 혼자 오셨어요?”
“아, 네. 낙원씨가 일이 좀 생겨서요…….”
“그러셨구나. 아기들 좋아하시나 봐요. 아까 보니까 되게 잘 놀아주시던데요?”
“네. 아이들 좋아해요.”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감이 한 가득 들어찬 상자를 들려던 은유는 제 손에서 사라진 상자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앞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에서 상자를 옮긴 태형이 씽긋 웃고는 선반 위로 상자를 올렸다.
“이런 건 저한테 시키세요.”
“괘, 괜찮은데요…….”
“숙녀분께 이렇게 무거운 거 들게 하는 건 매너가 아니죠. 대충 끝났으니까 우리도 밥 먹으러 갈까요? 아까 저쪽에서 모여서 식사 하신다고 하던데요.”
“아, 네.”
불편하기만 한 상황이었지만 은유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태형의 뒤를 따랐다.
슬쩍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은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봉사활동 시간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2시간이 더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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