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81화 (81/112)

81. 점점 더 좋아서2016.12.13.

폭신한 이불 속에 맨 살을 맞대고 누워있는 남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꽤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일찍 눈이 떠진 낙원은 제 팔을 베고, 제 품에 안겨 있는 아내를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쳐다보며 어젯밤 일을 회상했다.

세상에서 제일 섹시한 여자를 마주했던 그는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 여자를 제 품에 가두고 아낌 없이 사랑해주었다.

반쯤 젖은 머리칼과 잔뜩 풀어진 눈동자, 작게 벌어진 입술, 그 어떤 비단 천보다 부드러운 피부와 향긋하고 달콤한 체취에 취해 거의 정신을 놓았다.

제 욕심에 힘들었을 것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자신을 오롯이 다 받아주었다.

바로 옆에 있음에도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제 아내라는 사실이 아직까지 믿기지 않는 그는 벅찬 얼굴로 작은 얼굴 위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며 작은 몸을 제 품으로 더 깊이 끌어안았다.

.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며 부드럽게 브레이크를 밟은 낙원은 옆에 앉은 은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하는 은유의 얼굴엔 피곤함과 생기가 같이 번져 있었다.

“많이 졸려?”

“네…….”

“그러니까 왜 그렇게 예뻤어.”

밤새 남편의 품에 안겨 제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인지 깨닫는 과정은 행복함 그 자체였다.

그게 좋아서 그에게 더 매달리고, 끌어안고,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 그리고 기상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늦은 시각에 잠에 들었고,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일어나 정신 없이 준비를 하고 그와 함께 출근길에 올랐다.

여전히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은유를 사랑스럽게 쳐다본 낙원이 마주잡은 손을 들어올려 짧게 여러 번 입을 맞추며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큰일이다 진짜.”

“왜요?”

“네가 점점 더 좋아서.”

이젠 대놓고 심장폭행을 하는 남편의 모습에 오늘도 설렌 은유는 베시시 웃으며 그의 팔에 제 얼굴을 기댔다.

“저도요.”

오늘따라 유난히 애교가 듬뿍 묻어 있는 모습에 낙원은 오늘이 주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안타깝게 생각하며 다시 엑셀을 밟았다.

“출근하지 말까?”

“그건 안 되죠.”

“가기 싫다 진짜.”

“그래도 오늘 금요일이잖아요. 오늘만 참아요.”

“쉬는 시간에 좀 자둬.”

“왜요?”

“오늘도 너 못 재울 것 같아서.”

그래. 이젠 될 대로 돼라.

좋은 게 좋다고, 잠이야 뭐 좀 나중에 자면 되지.

점점 남편을 닮아가는 게 분명했다.

“이 애가, 권중식 의원 조카라고.”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 노강고등학교 3학년 2반이었고 담임인 강낙원과 그 부인인 심은유가 몇 달간 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강낙원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예. 강낙원보다 강지혁을 더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직접 멜버른으로 가 문창수와 접촉했었답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민지의 사진을 손에 쥔 남자의 얼굴이 가차없이 일그러졌다.

일 처리 똑바로 하라고 했더니 그 늙은 노인네가 덜미를 잡힌 모양이다.

지금 목격자라고는 문창수 한 사람뿐이었기에 그가 입만 열지 않는다면 크게 걱정이 될 건 없었지만 사람 입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열릴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가만히 손을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단 문창수는 더 지켜보고. 요즘 심은유가 혼자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다닌다던데.”

“네. 이번 주 토요일로 일정 같이 잡아뒀습니다.”

“그래. 가까이서 직접 좀 봐야지. 그 때 보니까 사람은 참 괜찮던데.”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에 옆에 서있던 비서의 얼굴엔 궁금증이 잠시 비춰졌지만 이내 그 표정을 지워내고선 남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5년도 더 전의 일을 갑자기 왜 이제 와서 들춰내는 걸까?

그것도 친동생인 강낙원이 아닌 사촌동생인 강지혁이. 그 일이 있고 나서 영국으로 나가 쥐 죽은 듯 살던 그가, 갑자기 왜?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는 궁금증들을 머리 속에서 지워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던져놓은 사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권민지라……. 잘하면 값 좋은 미끼가 될 수도 있겠다.

째깍. 째깍.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초침소리만 퍼지는 침실 안. 넓은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작은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고통의 근원지인 배 아래쪽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잠에서 깬 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혹시라도 남편이 깰까 봐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을 앙 다문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문 쪽으로 옮겨 천천히 걸었다.

침실을 나서 거실을 가로질러 간신히 주방에 도착한 은유가 싱크대의 옆의 서랍 하나를 열고 많은 종류의 약들 사이로 손을 뻗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컵에 물을 따라 약과 함께 넘긴 후에도 더 무섭게 계속되는 고통에 결국 식탁 앞에 앉아 배를 움켜쥐었다.

원래 생리통이 심해서 약을 먹는데 이번엔 깜박하고 약 먹는 것을 잊었더니 한밤 중에 찾아와 이렇게 괴롭히는 모양이다.

아픈 배를 두 손으로 감싸고 식탁 위에 엎드리듯 누워 있는 사이,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낙원은 팔에서 느껴지는 허전함에 이불 속을 더듬거리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제법 축축하게 젖어 있는 옆자리에 은유는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자 방문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불빛을 발견하고선 긴 다리로 침실을 나섰다.

불빛의 근원을 따라간 낙원의 시야에 식탁 위에 엎어진 은유가 담겼고, 놀란 그가 재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은유야!”

그 외침에도 작은 몸은 미동이 없었다.

다급히 그 옆으로 다가간 낙원이 손을 뻗어 은유의 상체를 일으키자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 사이로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드러났다.

“심은유!”

마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오고 낙원이 다급하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왜 그래. 어? 어디 아파?”

“……낙원씨…….”

“안되겠다. 병원 가자.”

당황한 그가 은유를 안아 들자 축축하게 젖어 있던 손이 그의 옷자락을 감싸 쥐었다.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됐다. 일단 병원부터 가.”

“저 진짜, 안 가도 돼요……. 생리통이 심해서, 약 먹었어요…….”

한 글자 한 글자 내뱉기도 버거워하면서 병원은 가지 않겠단다.

약을 먹었으니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라는 은유를 침실로 옮긴 낙원은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고선 이불을 덮어주고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들었다.

인터넷을 켜 검색 창에 질문을 적은 그가 무수히 많은 글들을 꼼꼼하게 읽어보고는 침실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수건에 적셔 비닐 팩에 넣고 침대 위로 올라온 낙원이 은유의 배 위로 수건을 올려주고는 다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욕실로 들어가 마른 수건을 미지근한 물에 적셔 꾹 짜고는 누워있는 그녀의 옆에 앉아 얼굴에 흐르는 땀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좀 괜찮아?”

“네. 괜찮아요.”

약 효과가 나타나는지 찌푸려졌던 얼굴이 조금씩 펴지는 게 보여 낙원은 한시름 놓았다.

끙끙대며 잠이 든 은유의 숨소리도 제법 가벼워졌지만 낙원은 잠들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수건이 식지 않도록 뜨거운 물에 적시고, 땀으로 인해 축축하게 젖은 몸을 닦아주고 나서야 그 옆자리에 누워 작은 머리통 안으로 제 팔을 넣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제가 깰까 봐 또 혼자 끙끙거렸을 모습에 한숨을 내쉰 낙원이 부드러운 이마를 쓸며 입을 맞추었다.

여동생인 주원도 생리통이 없는 편이라 이런 모습은 은유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당황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선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배를 따뜻하게 해주는 게 좋다는 글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도 약 효과가 나타나서 조금 전보다는 얼굴이 풀어졌지만 되려 낙원의 얼굴은 굳어져만 갔다.

대신 아파 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어느 때보다 속이 상한 그는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은유의 상태를 살폈다.

아침 일찍 눈을 뜬 은유는 제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잠이 든 낙원을 마주하고선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새벽에 그렇게 아팠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지금은 통증이 약했다. 물론 또 약을 먹어야겠지만 지금은 살만 했다.

밤새 제 배 위에 따뜻한 수건을 올려주고, 식기 전에 다시 갈아주고, 끊임없이 저를 안고 다독거려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저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그에게 미안함이 들어 작은 손을 뻗어 얼굴을 감싸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뜬 낙원과 마주쳤다.

“아, 깨워서 미안해요…….”

“좀 어때? 괜찮아?”

“네, 덕분에요. 그나저나 낙원씨 제대로 못 자서 어떡해요.”

“너 괜찮으면 됐어. 아프면 아프다고 해 은유야. 새벽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미안해요. 지금은 괜찮아요 저.”

“후……. 출근은 할 수 있겠어?”

“그럼요. 약 먹으면 괜찮아요.”

오늘 하루쯤 쉬었으면 했지만 은유는 괜찮다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은유에게 져준 낙원이 그녀를 안고 욕실로 가 세수를 시켜주고 아침식사까지 차려주었다.

그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몰랐지만 남편에게 정말 많이 사랑 받고 있구나 하는 게 느껴져 아침부터 행복함을 잔뜩 느낄 수가 있었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낙원은 은유에 대한 걱정으로 얼굴이 풀어지지 않았다.

“진짜 괜찮아?”

“벌써 몇 번째나 묻는 건지 알아요?”

“걱정돼서 그래.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이미 목소리 안에 담겨 있는 걱정이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것 같아 은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죽을상 하지 마요 낙원씨. 밤새 저 챙겨준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힘들면 송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양호실 가서 쉬어. 알았지?”

“알았어요. 걱정 말고 얼른 들어가요.”

주아는 출근해서부터 속이 불편했다.

몸이 아픈 건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은유의 옆에서 낙원은 잠시도 떨어질 줄 몰랐다.

보충수업 시간이 지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은유를 직접 교무실로 데리고 와 자리에 앉힌 뒤 따뜻한 차를 타다 주고, 자리에 앉아서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평소에는 이런 모습을 자제하던 두 사람인데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깨끗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게는 절대 보내주지 않던 시선을 은유에게 고정시킨 채 오롯이 그녀만 담고 있는 낙원의 눈동자는 사랑과 애정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날 낙원이 제게 ‘직장동료’라고 선을 확실하게 그은 후로도 마음을 제대로 접지 못했는데 이렇게 직접 겪고 나니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저 남자는 결혼한 사람이구나. 그 옆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구나. 그 여자는 내가 아니구나.

그리고 절대 자신은 그 여자가 될 수 없구나.

그렇게 집요하게 잡고 있던 마음이 한 번 인정하고 나니 허함이 가득 밀려와 주아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가 결혼하기 전부터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마음을 제대로 전달한 적은 없다. 용기를 내지 못했고 결국 다른 여자가 그의 옆자리에 섰다.

상체를 숙이고 업무를 하는 은유를 쳐다보던 주아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거 먹어요.”

“……네?”

갑자기 제 앞으로 불쑥 날아든 손에 은유의 시선이 주아에게 향했다.

멍한 얼굴과 달리 눈동자는 또렷이 저를 보고 있었다.

“안 받아요?”

“아, 네, 네…….”

“철분제에요. 저도 생리통이 좀 심하거든요.”

“아……. 가, 감사합니다.”

갑자기 왜 제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은유는 당황스러웠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낙원과 같이 있는 저를 투기 어린 눈빛으로 보던 여자인데.

“강선생님이 심선생님을 그렇게 쳐다보시는 게 꼴 보기 싫어서요.”

“……아, 네…….”

여전히 저를 빤히 쳐다보는 은유의 시선에 주아는 노트북으로 얼굴을 휙 돌리고는 제법 톡 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빨리 나으시라고요.”

“……감사합니다, 김선생님.”

“별로. 심선생님 좋아서 드리는 거 아니거든요?”

“네, 알아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여자인 제가 봐도 은유는 매력 있는 여자였다.

착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럽고. 분명 누구에게나 그런 여자일 것이다.

그러니 낙원도 반했겠지. 그 사랑스러움에 이기지 못했겠지.

주아는 한 순간에 허무하게 끝나버린 제 짝사랑이 불쌍해서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답지 않게 착한 짓을 한 것 같아 여전히 속이 뒤틀렸지만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교무실을 나서는 주아의 발은 무거우면서도 경쾌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