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2016.12.11.
은유는 쥐구멍이 있다면 그게 어디라도 당장 들어가고 싶었다.
제게로 쏟아진 시선들에 어쩔 줄을 몰라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때에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를 찾았다.
“좀 괜찮니?”
“……네, 네 아버님…….”
“낙원이 때린 건 미안하다, 아가.”
“아, 아니에요!”
미쳤지, 미쳤어.
거기가 어디라고 쳐들어가, 쳐들어 가기를.
그리고 뭐? 우리 낙원씨 때리지 마세요?
정말 미쳤다 심은유. 너 어디까지 미칠 예정이니?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건 용납할 수 없지만, 아가 네 일이라면 다르지. 사내 녀석이 제 아내 뒷담화 하는 것들을 두고만 보는 것도 용서가 안 된다.”
그제야 무뚝뚝했던 시아버지의 모습 뒤로, 늘 어머님에게 다정했던 모습이 떠올라 은유는 더더욱 죄송스럽고 창피했다.
“……죄송합니다…….”
“네가 뭐가 죄송해. 그 녀석들이 잘못한 거지. 혐의가 밝혀졌으니 죗값은 제대로 받을 거다 아가. 그러니 그런 말 마음에 두지 말거라. 알려고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같은 음성과 시선에 은유는 또 다시 울컥했다.
무뚝뚝하신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시아버지가 이렇게 다정하신 분이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은유가 감동에 젖어 있던 것도 잠시, 그 옆에 앉아 있던 낙원에게 시아버지의 꾸중이 날아들었다.
“너는 네 와이프가 그렇게 우는데 안아주지도 않고 있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은유 너, 낙원이가 항상 이렇게 대했어?”
“아, 아니에요 아버님! 이번엔 정말로 제가 잘못한 거에요!”
그에게 해선 안될 말까지 내뱉었는데, 괜히 불똥까지 튀어 대신 혼이 나는 모습에 은유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에도 준원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더니, 그 말이 딱이었다.
“어떤 이유건 여자가 울었으면 남자가 잘못한 거야. 알았어 강낙원?”
“네.”
“설렁설렁 대답하지 말고. 또 은유 울리면 진짜 맞는다.”
“알았어요.”
아닌데. 내가 잘못한 건데.
남편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그 말을 다 듣고만 있는다.
“은유 놀랐을 텐데 데리고 올라가서 좀 쉬어 낙원아. 식사 준비되면 부를게.”
수연의 제안에 낙원은 말없이 몸을 일으켰고, 은유는 덩달아 일어나 어른들께 인사를 꾸벅 하고는 낙원의 뒤를 쫓았다.
“쟤들이 이젠 부부싸움도 하네요 어머님.”
“그러게 말이다. 그래도 금방 풀릴 거니까 걱정 하지 마라, 아가. 지혁이 너 카메라 좀 줘봐. 잘 찍은 거 맞아?”
“와, 진짜 너무 한다 할머니. 나 같은 고급 인력을 지금 두 사람 사랑싸움 찍는 사진기사로 가져다 쓴 거야?”
“너 이사장 누가 시켜줬다고?”
“……자. 실컷 보세요, 실컷. 아주 끝내주게 잘 나왔네.”
화기애애한 1층과 달리 2층에 있는 낙원의 방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은유는 낙원의 눈치를 봤고, 낙원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는 채였다.
결혼 전까지 사용했던 그의 방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그녀에겐 없었다.
외투를 벗어 옷장에 넣은 그가 뒤를 돌아 은유와 마주보고 섰다.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어, 네…….”
“해.”
어떻게 해야 마음이 풀릴까?
아니,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겠지.
옆에 있는 게 힘들다는 그런 막말을 내뱉고서 이렇게 간단히 용서 받길 원하는 자신이 정말이지 미웠다.
자꾸 울컥해서 코끝이 찡해지는 은유를 보며 낙원이 자꾸만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울지마.”
단호한 그의 말에 은유는 여린 입 속을 깨물고는 울지 않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저절로 숙여지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두 손을 꼭 마주잡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에게선 어떠한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거 사실 아니에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그럼 무슨 의미였는데.”
“……저는 낙원씨한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낙원씨 옆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그게 무서웠어요……. 다른 여자들은 더 잘난 것 같고, 전 낙원씨한테 한없이 부족하기만 한 것 같아서…….”
지금까지는 잘 몰랐다. 대기업 사장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그 동안의 결혼생활에서 그런 사실들을 깨달았던 건 고작 몇 번뿐이었고, 그 때마다 낙원이 다독여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피부로 와 닿는 차이가 그녀에겐 엄청난 압박감으로 느껴졌다.
내로라하는 기업의 여식부터 시작해서 말도 안 되게 좋은 학벌에, 외모에. 결국 스스로가 자신감을 잃어 그 화살을 죄 없는 남편에게 돌렸다.
“……제가 실수했어요. 정말로 죄송해요…….”
“나 상처 많이 받았어.”
“…….”
“내가 옆에 있어서 힘들다는 말 듣고 진짜 별 생각이 다 들었어. 네가 나 때문에 힘들다니까 너랑 헤어져야 하나.”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은유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제게로 향한 시선이 하염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낙원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너는 나랑 헤어지고 싶어?”
“……절대 안돼요…….”
“거 봐. 너도 못 하겠지.”
헤어지다니.
절대 그럴 수 없다. 절대 안 된다.
‘헤어진다’는 말로도 이렇게 가슴이 턱 막히고 숨이 차는데, 절대 안 된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 너 없이 못 살아.”
“……죄송해요…….”
그제서야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은유는 미안함에 눈물을 터뜨렸고, 그렇지 않아도 작은 몸이 유난히 더 작게 보여 두 팔을 뻗은 낙원이 그리웠던 향기를 제 품에 가뒀다.
“앞으론 그러지 마 은유야. 나 진짜로 무서웠어.”
“흑, 흑.”
“네 옆이 아니면 안 돼, 정말로.”
“……흑. 잘못, 잘못했어요.”
“나도 상처 줘서 미안해. 너 혼자 그런 말 듣게 해서, 내가 미안해.”
부드럽게 안아주는 품 속에 은유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자신이 잘못한 거였다.
그런데도 낙원은 미안하다며 자신을 안고 달래주었다.
“나도 잘못했어. 미안해 은유야.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미안해.”
은유가 괜히 주눅이 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남을 깎아 내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기죽게 하고 속상하게 했을 것이다. 자신은 바보처럼 그걸 몰라줬다.
혼자 얼마나 또 속을 끓였을까 하는 생각에 낙원은 작은 얼굴을 감싸고선 붉어진 눈가를 쓸어주었다.
한참을 낙원의 품에 안겨 울던 은유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의 침대 위에 눕혀졌다.
결혼 전에 그가 사용하던 침대라 둘이 눕기에는 좁았지만 덕분에 서로 꽉 끌어안고 있을 수 있었으니 화해한 직후인 두 사람에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작은 숨소리를 내며 제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있는 은유를 내려다보던 낙원이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이마부터 시작해서 입을 맞췄다.
고작 하루 하고 반나절 집을 비웠을 뿐인데 떨어져 있는 그 순간에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혹시라도 아내가 정말로 자신과 헤어지자고 할까 봐 겁이 나서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연애를 처음 하는 티를 이렇게나 내고 있으니 원.
“기분 좀 풀렸어?”
이 질문은 제가 해야 하는데, 반대로 물어오는 그의 목소리에 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서 얼굴을 쏙 내밀고는 오랜만에 보는 잘생긴 남편을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충분히 사과 했잖아. 잘못은 나도 했고.”
“그래도요……. 제가 너무 심했어요.”
“괜찮아. 나도 잘한 거 없어.”
아내에게 모진 말을 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줬고, 혹시라도 아내가 제 옆에 있어서 정말로 힘들다는 말을 할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도망을 치고야 말았다. 비겁하게.
“외박해서 미안해. 이건 진짜 내가 잘못한 거야.”
“……저도 처음에 그랬잖아요.”
“누굴 좋아하고 이런 게 처음이라 어려워. 그래서 많이 부족할 거고, 잘못하는 것도 많을 거야. 그런 건 고치려고 노력할게.”
늘 저를 배려해주고 어른스럽게 챙겨주는 그의 모습에 또 한번 감동을 받은 은유는 고개를 들어 도톰한 입술에 쪽 입을 맞대었다.
그 잠깐 사이에 낙원의 눈동자가 진하게 그녀를 마주했다.
“이거 뭔데.”
“화해한 기념으로 뽀뽀한 거에요.”
화해한 기념이 고작 뽀뽀?
성에 차지 않는 대답에 낙원의 잘생긴 얼굴이 제법 크게 찌푸려지는 것을 본 은유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인상은 찌푸려요?”
“지금 이 뽀뽀로 퉁 치겠다고?”
“……그럼요?”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부쩍 낮아진 낙원의 목소리가 은유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설레서 작은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며칠 전처럼 남편이 누운 그 위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운 게 당연했다.
“여기 시댁이에요 낙원씨.”
“내 방이기도 하고.”
“아래에 할머님이랑 아버님, 어머님, 도련님까지 다 계신데요?”
“식사준비 마칠 때까지 쉬라고 하기도 하셨고. 참고로 지금 4시밖에 안 됐어.”
너무나도 빤히 마주해오는 시선에 은유가 어쩔 줄을 몰라 하자 나른하게 웃은 그가 몸을 일으켜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딸깍.
방문을 단단하게 걸어 잠근 뒤 몸을 돌려 저를 쳐다보는 남편의 시선이 너무나도 뜨거워 은유는 제 몸이 타는 것만 같았다.
“나 문도 잠갔는데.”
“아, 아, 아니……. 낙원씨, 아무래도 이건 좀…….”
제게로 걸어오는 낙원의 모습을 보며 은유는 안 된다고 마음 속으로 외쳤지만, 그런 외침과는 달리 제 몸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은유가 누워있는 침대로 돌아온 그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와 잔뜩 붉어진 얼굴을 내려다보곤 올라가는 입술을 천천히 내렸다.
“어떡하지. 나 중간에 멈출 자신 없는데.”
“그, 그럼 안 되는데…….”
불안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아내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낙원이 통통한 입술에 촉 입을 맞추고선 그 옆으로 몸을 뉘였다.
“네가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좀 참아 볼게.”
“고, 고마워요.”
분명 참아본다고 한 것 같은데, 10초도 지나지 않아 티셔츠 안으로 파고드는 손길에 은유가 숨을 헉 들이쉬었다.
“어, 어, 저기……. 나, 낙원씨?”
“왜.”
“……소, 소, 손이…….”
힘이 잔뜩 들어간 배 위를 부드럽게 쓸던 커다란 손이 점점 더 위로 올라감에 따라 은유의 얼굴도 터질 것마냥 붉어졌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나른해진 얼굴로 은유를 내려다보던 낙원은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만지는 건 좀 봐줘. 안 그럼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래.”
남편은 제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섹시한 얼굴로, 이렇게 섹시한 목소리로 제게 애원하듯 말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져주는 걸 알기에 늘 이렇게 공격을 해오곤 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남편에게 늘 져준다. 그게 서로를 위해 좋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점점 더 짙어지는 손길에 결국 은유는 모든 걸 다 내려놓는 심정으로 오랜만에 남편의 손길을 느꼈다.
어쩐지 남편과 닮아가는 것 같다. 그것도 이런 위험한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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