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속았다2016.12.10.
본가로 향하는 내내 은유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도련님. 더 빨리는 안돼요?”
“도로 상황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길 위에 제법 많이 쌓인 눈으로 인해 차들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사람 속 터지게.
옆에서 자꾸 재촉하는 은유를 흘겨보며 지혁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왜 싸워서는.”
“저도 제가 잘못한 거 알아요!”
“형수, 지금 나한테 화냈어?”
“……아, 아니요. 빨리 가야 하는데…….”
금새 또 꼬리를 내리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입을 꾹 다물며 애써 참아냈다.
학교에서 본가까지는 차를 타고 10분이면 도착할 만큼 가까운 거리인데 그 거리를 지금 이렇게 연료 낭비를 해가며 아주 속이 타게 가고 있었다.
“차라리 걸어가는 게 더 빠르겠어요.”
“이 날씨에 뭘 걸어가. 얼어 죽어.”
“낙원씨 많이 혼나면 어떡해요?”
“뭘 어떡해? 혼날 건 혼나야지. 그런 것들은 고소를 해야지, 손 아프게 때리긴 왜 때려? 한 놈은 완전 코가 주저 앉았다던데.”
세상에.
코가 주저앉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세게 때린 거야?
“그 사람들이 심하게 말했다면서요. 맞을 만하니까 맞았겠죠.”
“얼씨구? 지금 강낙원 편들어?”
“그냥 빨리 좀 가주세요.”
“형수. 자꾸 잊는 모양인데, 나 형수 기사 아니야. 월급 내가 준다니까?”
“아 정말. 그럼 그냥 저 자르세요 도련님!”
결국 터져 나온 볼멘 소리에 지혁은 숨이 넘어갈 듯 웃다가 제게로 날아든 따가운 시선에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째 성격이 점점 강낙원을 닮아가는 것 같단 말이지. 기분 탓인가?
10분이면 올 거리를 30분이 걸려 도착했다.
대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튕겨나가듯 차에서 내린 은유가 급히 초인종을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열렸다.
지혁이 고개를 저으며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는 동안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문 앞에 다다른 은유가 벌컥 문을 열었다.
“낙원씨!”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낙원을 찾는 목소리에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노진희 여사가 의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은유야. 왜 그래?”
“할머님! 낙원씨, 낙원씨 어디 있어요?”
“응? 낙원이?”
“네! 낙원씨요!”
주방에서 예쁜 그릇에 과일을 담던 수연이 나와 헉헉대는 은유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은유야! 왜 이렇게 숨을 헐떡거려?”
“어머님! 낙원씨 대체 어디 있어요?”
“낙원이? 아빠랑 서재에 있는, 어머 아가! 은유야!”
수연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헐레벌떡 1층의 제일 끝 방으로 뛰어간 은유는 안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멈칫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얼굴을 때려?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어?”
“……죄송합니다.”
“너 때문에 할머니랑 내가 얼마나 고생 했는지 알아? 기사 나가는 거 막고, 목격자 확보하고. 너 때문에 피해 본 사람이 얼마인 줄이나 아느냐고?”
“……면목 없습니다 아버지.”
“이러라고 너 하는 대로 내버려 둔 줄 아냐? 이럴 거면 당장 선생님 때려 치워!”
준원의 호통에 낙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피해를 본 건 사실이다.
숙여지는 고개로 날카로운 음성이 한번 더 날아들었다.
“그리고, 새아기랑 싸우고 외박을 해?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연애 처음 하는 티 그렇게 낼 거냐? 이게 보통 연애도 아니고, 결혼생활이야 이 녀석아!”
누군가를 처음 좋아하고, 처음 연애를 해보는 낙원으로써는 이 상황이 전부 다 어렵기만 했다.
처음으로 크게 아내와 다퉜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조차 오질 않아 그 상황을 피했다.
분명 저로 인해 상처받았을 아내인데, 그 모습을 마주하기가 두려웠다.
그런 아들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는 준원은 안타까우면서도 속이 상하고, 화가 났다.
“나랑 네 엄마가 널 이렇게 책임감도 없는 남자로 키웠더냐?”
성이 난 목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은유가 서재 문을 벌컥 열었다.
서재 안에 마주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은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낙원에게 손을 번쩍 들고 있는 시아버지의 모습에 그녀는 그대로 뛰어가 낙원의 허리를 꼭 감싸며 그 앞을 막아 섰다.
“아버님! 이러지 마세요!”
“……아가?”
“엉엉. 제가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아버님! 그러니까, 그러니까 낙원씨는 때리지 마세요!”
“……아니, 저기. 아가야.”
갑자기 들이닥친 며느리의 모습에 당황한 건 준원뿐만이 아니었다.
제 허리를 끌어 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린 아내의 모습에 당황한 낙원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서럽게 울기 시작하는 모습에 걱정이 앞선 그가 두 손으로 은유를 떼어내자 그 행동에 거절당했다고 느낀 그녀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은유를 뒤따라 들어온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수연까지 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은유를 쳐다보았고, 준원은 억울함과 당황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며느리와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심은유. 너 왜 울어.”
낙원의 목소리에 은유는 두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상한 게 느껴져 미안함이 가득 밀려왔다.
그러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그저 눈물만 주구장창 새어 나왔다.
그러다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는데.
“흑흑. 아버님, 끕. 제가 잘못했어요. 엉엉. 우리 낙원씨 때리지 마세요.”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굴 때려?
준원이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은유를 쳐다보았고, 할머니와 엄마 옆에서 킥킥 웃고 있는 지혁을 발견한 낙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강지혁 저 자식이 진짜.
“심은유. 그만 울어.”
“제가, 제가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여전히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며 울지 말라는 아들의 말을 귓등으로 넘긴 며느리의 모습에 준원은 애가 탔다.
아니 저 작은 몸에서 무슨 눈물이 저렇게 나오는지. 저러다 탈진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는데 아들은 그거 하나 달래지 못하고 저러고 있으니.
“그만 울어.”
부드럽게 달래줘도 모자랄 판에, 뭐? 그만 울어?
아들의 무뚝뚝함에 허공에 멈춰 있던 준원의 손이 기어이 낙원의 등짝에 날아들었고,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낙원의 몸이 흔들리자 은유가 울음을 뚝 멈추었다.
역시, 아들이 영 시원찮아서 그런 거였구나 하고 뿌듯해하던 것도 잠시, 더 크게 들려온 울음소리에 준원의 얼굴이 파래졌다.
“흐, 흐어어엉! 아버니임! 낙원씨 때리지 마세요!”
“으응? 그, 그래. 내, 내가 미안하다 은유야. 내가 잘못했어. 아이고, 그만 울어. 낙원이 안 때릴 게. 안 때리마. 응?”
제게로 날아든 아내의 매서운 시선에 준원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수연의 옆으로 가 섰다.
“당신도 참, 애를 때리긴 왜 때려요?”
“아니 낙원이 저게 은유를 잘 못 달래니까 그랬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남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수연은 제게 손짓하는 노진희 여사를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왜요 어머님?”
“카메라 좀 가지고 와라.”
“네?”
“얼른!”
노진희 여사의 명령에 수연이 카메라를 가지러 간 사이, 여전히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 은유를 보며 낙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은유. 뚝 그쳐.”
제법 무서운 목소리에 은유가 입을 꾹 다물었지만 그렇다고 울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더 짠하게 느껴져 낙원은 두 손으로 은유의 볼을 감싸 쥐었다.
“그만 울어. 너 이렇게 울면 무슨 얘기를 해.”
“안, 흑. 안 울어요.”
안방으로 들어갔던 수연이 카메라를 가지고 오자 노진희 여사가 지혁을 쿡쿡 찔렀다.
“아, 왜 찔러 할머니.”
“조용히 해 인석아. 너 얼른 사진 좀 찍어라.”
“뭐?”
“쓰읍. 시키는 대로 해 얼른!”
“이 상황에 사진은 무슨 사진이야?”
“네놈 이사장 시켜준 거 나다.”
“……와, 진짜. 치사해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은유에게 써먹었던 수법을 그대로 할머니에게 당한 지혁은 기도 안 막힌다는 듯 카메라를 받아 들고 두 사람을 렌즈에 담았다.
잘은 숨을 토해내며 진정을 찾아가는 은유를 내려다본 낙원은 여전히 그녀를 안아주지 않고 있었다.
“다 울었어?”
“끕, 네.”
“더 울 거야?”
“……아니요.”
“여긴 왜 왔어.”
무뚝뚝하게 나오는 말투와 달리 다정하기만 한 음성에 은유는 속이 상했다.
분명 남편도 상처를 받았을 거면서, 이 순간에도 울고 있는 저를 걱정하는 눈빛을 하고 있다.
“……그게…….”
“얘기해.”
“……도련님한테 다 들었어요……. 금요일 날…….”
“금요일 날.”
두 사람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지혁은 멀찍이 떨어져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그 사람들이……. 함부로 말을 해서……. 그래서, 낙원씨가 화가 나서…….”
“그래서.”
“……제가 오해했어요. 잘못했어요……. 낙원씨가 저 때문에 아버님한테 맞을 까봐…….”
은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준원과 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누구한테 맞는다고?
“내가 아버지한테 왜 맞아?”
“……네? 아니, 그, 아버님이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건 안 된다고……. 그래서 낙원씨 많이 혼날 거라고…….”
“그건 잘했다고 칭찬 하시던데.”
“……네?”
숙였던 고개가 팍 들리며 부은 두 눈이 보였다.
다갈색의 동공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보며 낙원이 말을 이었다.
“티 나게 얼굴 때렸다고 혼은 났지. 외박한 것도.”
……그럼 아까 얼굴을 때렸냐고 뭐라고 하셨던 게…….
“한대씩밖에 안 때린 것도 혼났고.”
“…….”
분명, 분명 지혁이 그랬다. 많이 혼이 날 거라고.
시아버지는 어떤 이유에서건 폭력은 절대 용납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멍한 얼굴로 옆으로 고개를 돌린 은유는 마침 찰칵 하고 저를 찍는 카메라를 보며 망연자실했다.
씩 웃고 있는 저 얼굴을 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속았다. 도련님에게.
그것도 아주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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