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사랑의 징검다리2016.12.09.
넥타이를 꽉 움켜쥔 낙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꽉 막힌 기분에 머리 끝까지 화가 차 올랐다.
“저 도와주려고 하셨던 분한테까지 질투하는 거,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너무하다고?”
“네. 다른 사람들 다 있는 자리잖아요. 행동 하나, 말 하나가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지 낙원씨가 더 잘 알잖아요.”
그에게, 집안 어른들에게 절대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남들 입에 쉽게 오르내리는, 남들이 만만하게 보는, 남들이 가볍게 물고 뜯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혁의 말대로 어깨 펴고 당당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지만 그래도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왜. 어째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남편이 그런 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맑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찼지만 은유는 낙원을 똑바로 마주보고 섰다.
“저 잘해내고 싶었단 말이에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대단한 집안은 아니어도, 낙원씨 옆에서 당당하게 서 있고 싶었단 말이에요. 근데 왜 망쳐요?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얼마나 힘들게 그 옆에 서 있던 건데.”
“넌 내 옆에 서 있는 게 힘들어?”
“네. 힘들어요! 저랑 어울리지도 않는 이런 옷 입고, 이런 공간에 있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래도 저 노력했어요. 어르신들 다 계시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낙원씨 가족들이 있는 자리니까! 그래서 노력했단 말이에요! 근데 왜 그걸 몰라요? 왜 그런 질투 때문에 내 노력을 헛되게 한 거냐고요!”
넥타이를 꽉 쥐고 있던 손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검정 색의 천이 부드러운 카펫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제서야 제 맞은 편에 서있는 낙원을 본 은유는 제 입을 막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엔 온기라곤 없었고, 오로지 상처를 받은 얼굴을 한 남편이 저를 보고 서 있었다.
“내 옆에 있는 게 힘들다고.”
“…….”
“고작 내 질투 때문에, 너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이게 아닌데.
“근데 심은유.”
“…….”
“너 실수했어.”
내 옆에 있는 게 힘들다는 말, 그건 하지 말았어야 했어. 나 진짜 상처 받았거든.
낙원이 천천히 은유를 지나쳐 방 문을 열었다.
“네 옆에 없을 테니까 마음껏 행복해 봐, 어디.”
쿵.
문소리와 함께 적막이 흐르는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은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툭. 툭.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눈물이 붉은 드레스와 회색의 카펫을 빠르게 적셔갔다.
그에게 상처를 받았고,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해선 안될 말을 해버렸다.
정말로, 실수했다.
.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잔뜩 붓고 까진 발로 안으로 들어와 드레스를 벗지도 않은 채로 소파 위에 쓰러진 은유는 또 울음을 토해내며 밤새 잠들지 못했다.
화장이 번졌고 눈이 부었지만 은유는 소파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낙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이, 정말로 옆에 없다.
하루가 지났음에도 낙원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멍한 얼굴로 계속 소파에 누워 있던 은유는 아침이 온 것을 깨닫고 출근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 봤자 거창한 건 없었다. 그저 가만히 누워 있다 혼을 빼놓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전철을 타고.
학교에 도착한 은유는 제 맞은 편 자리에 앉아 있는 낙원을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에 다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심선생. 왜 그래? 안 앉고 뭐해?”
“네…….”
은혁의 물음에 은유는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이 없는 은유는 주아가 옆에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나타난 낙원은 웬일인지 오늘 은유와 함께 오지 않았다. 게다가 표정도 좋지 못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은유를 보니 답이 나왔다. 두 사람이 싸운 게 분명했다.
왜 싸웠을까?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기에 주아는 그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심선생. 오늘 상태 왜 이래?”
“저요? 저 완전 멀쩡해요 송선생님.”
싸울 때마다 늘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 같아 은유는 일부러 괜찮은 척 웃어 보였지만 다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강선생님이랑 싸웠지?”
“아,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는 무슨. 둘이 분위기 안 좋은 거 엄청 티 나.”
“……안 되는데…….”
“크게 싸웠어?”
“……네…….”
축 처진 은유를 보며 한숨을 내쉰 다현은 도서실로 올라가며 그녀의 등을 어루만져주었다.
“잘 풀어 심선생.”
“……죄송합니다…….”
“얼굴 보기 껄끄러울 텐데, 가만히 도서실에 있어.”
“……네.”
다현의 말처럼 은유는 하루 종일 도서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도 혹시라도 그와 마주칠까 봐 보충수업 시간을 이용해 빠르게 다녀왔고, 점심도 걸렀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축 늘어져 있던 은유는 카운터를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그곳엔 한심하단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지혁이 있었다.
“강낙원이랑 싸웠다는 소문 듣고 구경 왔는데, 참 가관이다 가관이야.”
“…….”
“따라와.”
“……오늘은 그냥 있으면 안될까요?”
“심선생 월급 주는 거, 나야. 안 잊었지?”
“……갑니다.”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혁을 따라나선 은유는 운동장 바닥에 쌓인 하얀 눈을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이번엔 또 뭐 때문인데?”
“…….”
“그 날 강낙원이 형수랑 나가는 건 봤고. 나가서 싸운 거야?”
“……네.”
축 처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다.
어제 저녁 집으로 찾아왔던 낙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너 뭐냐?”
“나 좀 재워줘.”
분명 허락한 적이 없는데, 제 할말만 내뱉은 낙원이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기가 찬 지혁이 우선 현관문을 닫은 후 낙원을 따라 제 집안으로 발을 옮겼다.
“네 집 두고 왜 여기에서 잠을 자?”
“신경 끄고.”
“뭘 신경을 꺼. 야, 나가 빨리.”
“하루만 참아봐 너도.”
“장난하냐? 참긴 뭘 참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낙원은 아예 소파에 기다랗게 몸을 뉘였다.
“얼씨구? 야. 네 집으로 가라고. 왜 여기 와서 난리- 뭐야. 너 혹시 또 형수랑 싸웠어?”
“그것도 신경 끄고.”
“……가지가지 한다 진짜.”
“가서 잠이나 자.”
아니 그렇게 좋아 죽을 땐 언제고, 이번엔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강낙원이 집을 나올 정도면 제법 크게 싸운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혼자 남겨진 은유가 끙끙 앓고 있을 게 분명했고,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학교에 출근했더니 두 사람의 이야기로 교사들 사이에서 말이 오고 갔다.
천천히 걷던 지혁이 발걸음을 멈추자 그 뒤에 있던 은유가 지혁의 너른 등판에 이마를 쿵 찧었다.
“아.”
“뭐야, 괜찮아?”
놀란 지혁이 뒤를 돌아 은유를 살피다 멍한 얼굴을 보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둘 다 가지가지 해, 진짜. 안 그래도 피곤한데, 형수랑 강낙원까지 이렇게 날 도와야겠어?”
“죄송해요……. 저희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도련님 일 보세요…….”
그런 영혼 없는 표정이랑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말하면 내가 잘도 신경 끄고 혼자 일 보겠다.
골치 아프다는 듯 제 미간을 누르던 지혁이 은유를 힐끔 쳐다보았다.
“뭐 때문인지 얘기나 해봐. 들어야 도와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도련님은 못 도와주세요. 제가 엄청나게 실수 했거든요.”
“얘기나 해 보라고.”
끈질긴 그의 설득에 결국 푸념하듯 이야기를 늘어놓은 은유는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속이 상했다.
“……아무리 그랬어도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러게. 그건 형수가 잘못했네. 강낙원 엄청 상처받았겠어.”
“……아니까 확인사살 안 하셔도 돼요.”
가만히 은유를 쳐다보던 지혁이 잔뜩 풀이 죽어 있는 얼굴을 보며 커다란 손을 머리 위에 턱 내려놓았다.
“형수.”
“……이것 좀 내려주세요.”
“그 날 강낙원이 사람 때린 거 알아?”
“……네?”
누가, 뭐를 해?
“몰랐나 보네.”
“무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람을 때리다니. 누가? 남편이? 말도 안돼.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하고 선한 사람인데?
“행사 있던 날, 화장실에서 어느 두 그룹 자제들이 형수에 대해 말도 못할 만큼 더러운 내용을 입에 담았어.”
“……그게……무슨…….”
“그걸 강낙원이 들었고.”
“……말도 안돼…….”
“두 사람은 병원에 실려갔고 일을 좀 키웠어. 자기들을 때린 사람이 강낙원인 걸 몰랐는지 고소하겠다고 경찰 부르고 난리를 피웠거든.”
지혁에게서 전해 듣는 이야기에 은유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정리가 되질 않는다.
“그러다 할머니 귀에 들어가서 걔네 역 고소 당했어. 그 날 화장실 안에 있던 다른 사람이 진술도 해줬고, 자기들 때린 사람이 강낙원이라는 거 알고 자백했거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덜 피해보려고.”
“…….”
“대화 내용이 말도 못하게 심각해서 할머니가 화가 많이 나셨어. 그 두 그룹은 앞으로 노강이랑 손잡기는 어려울 거고, 강낙원은 할머니한테 불려가서 혼도 좀 났고.”
“……혼이 나요? 왜요? 낙원씨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어쨌든 사람을 때린 건 잘못한 거지. 할머니보다 큰아버지가 더 무서운데, 강낙원 방금 전에 본가로 불려갔어. 참고로 큰아버지는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건 절대 용납 안 하시는 분이셔.”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뚝뚝한 시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은유는 몸이 떨려 왔다.
이 모든 게 다 저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그깟 질투라고 화를 냈고, 그의 옆에 있는 게 힘들다는 막말을 내뱉었다.
저 때문에 할머님께 혼나고, 아버님에게까지.
은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런 은유의 귓가로 다정한 목소리가 새어 들었다.
“어떡할래. 퇴근시간도 다 됐는데 여기 이러고 있을래, 아님 본가로 갈래?”
“저 데려다 주세요 도련님.”
“차 대기시길 테니까 짐 챙겨서 나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은유는 도서실 건물이 있는 서관을 향해 달려갔고, 지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하여간 이 부부 뒤치다꺼리 하는 것도 참 힘들다.
무슨 사랑의 징검다리가 된 느낌에 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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