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고작 그런 이유로2016.12.08.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권중식 의원 정도라면 노강그룹과 친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게 당연한 일인데 그것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낙원의 팔에 팔짱을 낀 은유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지만 자켓에 겹쳐 잘 보이지 않는 게 천만다행일 정도로 그녀는 크게 놀랐다.
중식을 보던 낙원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셨어요.”
“예. 하하. 정말 놀랐습니다. 강준원 사장님 아드님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쩐지 좀 낯이 익긴 했어요.”
“제가 시끄러운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하하. 정말 그러신가 봅니다. 민지는 호주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선생님께서도 들으셨겠지요?”
“네. 잘 생활하는 모양입니다.”
낙원에게로 향해 있던 중식의 시선이 그 옆의 은유에게로 옮겨졌다.
학교에선 민지를 데리고 나가고, 그 식당에선 지혁과 함께 있던 여선생.
“두 분이 부부였다는 사실도 참으로 놀랍군요. 아, 그래서 저번에 강지혁 이사장님과 식사하셨던 거군요? 어쩐지, 여선생님과 둘이서만 식사를 하시는 게 조금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제가 크게 오해할 뻔 했습니다.”
자신들을 보고 웃는 중식의 얼굴에 낙원 또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크게 오해하실 뻔 하셨네요.”
“하하하. 이거 참 죄송합니다. 모쪼록 우리 민지 앞으로도 잘 부탁 드립니다. 아, 이제 돌아와서 졸업하게 되면 자주 못 만나시겠네요.”
뼈가 있는 말에 낙원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제가 워낙 학생들과 가깝게 지내서요. 민지가 와이프를 많이 따르기도 하고요.”
“그렇습니까? 그럼 이거, 앞으로 자주 보게 되겠습니다. 민지 돌아오면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하시죠.”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두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중식이 연회장 안쪽으로 사라졌고, 휘청거리는 은유를 잡아준 낙원이 동그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괜찮아?”
“네, 네. 조금 놀라서 그래요…….”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따뜻한 음성으로 전해오는 목소리에 얼었던 마음을 녹인 은유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일이다. 아무 일도 없을 거다. 그러니 미리 걱정하지 말자.
늦게 도착한 원식과 이야기를 나누던 지혁의 눈에 낯설지 않은 광경이 포착되었다.
민지의 큰아버지인 권중식 의원과 그 맞은 편에 있는 정진건설 김태형 이사.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인데…….
‘여선생님과 사이가 좋아 보이십니다.’
‘나중에 기회 되면 식사 같이 하시죠.’
둘을 지켜보던 지혁의 눈이 커다래졌다.
분명 은유와 식사하던 그 날, 식당에서 본 장면이다.
중식의 뒤에서 저를 힐끔 쳐다보고 지나가던 중년의 남자와 유난히 닮아 보이는 얼굴. 그리고 김비서가 건네준 사진 다섯 장 중 한 장의 주인공인 그 남자.
정진건설 김태형.
“…래서 아무튼 엄청 바빴어 오늘. 야. 강지혁. 너 내 말 듣고 있냐?”
“형.”
“왜?”
“저 남자 알아?”
지혁의 물음에 그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제 시선을 옮겼던 원식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건설 김태형 이사잖아.”
“그건 나도 알고.”
“원래 노강건설이랑 라이벌이었던 건 알지? 카타르 사업권 따낼 당시 여러 회사들 중에 노강이랑 정진, 대안 이렇게 세 그룹이 최종까지 올라갔고.”
“…….”
“무원이 그렇게 죽고 노강 휘청이면서 두 회사가 경쟁했고, 결국 정진이 카타르 사업권 따냈지. 저 김태형이 일을 그렇게 잘한단다. 그러니까 그 사업권 따낸 거고, 그 뒤로 이사로 승진했고.”
설마.
“갑자기 그건 왜?”
“……아니야. 아무 것도.”
무원의 죽음. 카타르 사업. 라이벌 회사. 정진건설 김태형. 권중식과 김태형의 아버지와의 관계.
무원이 죽고 난 후 전무에서 이사로 승진한 김태형.
너무 딱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에 지혁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닐 거다. 아니어야 한다.
“당시에 무원이랑 좀 친하게 지냈었지. 무원이한테 저 사람 얘기도 몇 번 들었고. 저랑 동갑인데 이 바닥 사람답지 않게 착하고 말도 잘 통해서 맘에 든다고 했었거든.”
기억해 내.
강무원이 그 날 말했던 그 이름. 제발 기억해 내.
아무리 되뇌어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 석자에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절대 아니어야만 한다. 제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어야 한다.
고작 그런 이유로 무원이 죽은 게 아니어야 한다.
지혁의 매서운 시선이 태형에게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렇지 않아도 중식과의 대면으로 기분이 언짢았던 낙원은 저 앞에 보이는 남자 때문에 더 언짢아졌다.
“괜찮으세요?”
“네, 덕분에요. 죄송하고 감사했어요.”
“아니에요. 안 다치셨다니 다행이에요.”
방금 전 주먹을 꽉 쥔 채로 화장실에서 급히 나온 그의 눈에 웃으며 마주 서있는 두 남녀가 포착되었다.
아내인 은유와 이름 모를 한 남자.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누구냐고 묻자 아내에게 향해 있던 시선이 제게로 날아들었다.
“정진건설 김태형입니다. 강낙원씨, 맞으시죠?”
“예. 제 아내와는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잔뜩 굳어진 낙원의 목소리에도 태형은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두 남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까 아내 분이랑 부딪힐 뻔 했거든요.”
“낙원씨, 이 분이 저 잡아주셨어요.”
뭘 해줘?
누굴 잡아. 어딜 잡아?
“잡아줬다고.”
“네. 이분 아니셨으면 넘어질 뻔 했어요.”
“하하. 제가 잘 못 본건데요.”
연회장에 온 지 2시간이 지났다.
인사도 이미 실컷 했고, 얼굴도 잘 비췄고, 제 할 도리는 다 했다.
“잡아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당연한 일이죠. 이런 미인이신 분을 다치게 할 수는 없죠.”
은유의 허리를 감싼 낙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 놀란 은유가 그를 쳐다보았지만 남편은 무표정으로 맞은 편의 남자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즐기다 가세요.”
“예. 다음에 또 뵙죠. 안녕히 가세요, 은유씨.”
“아, 네. 오늘 감사했습니-”
은유는 인사를 마치지 못했다. 거의 다 마쳤을 때쯤 낙원이 그녀를 돌려세워 연회장 밖으로 향했다.
“낙원씨? 어, 어디 가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그녀가 그를 쳐다보며 물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연회장을 빠져나가 호텔 카운터로 향한 낙원이 직원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자 그의 손에 호텔 객실 카드가 쥐어졌다.
“낙원씨. 왜 그래요?”
한없이 굳어있는 얼굴에 은유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얼굴.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은유를 데리고 VIP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른 낙원은 망설임 없이 18층을 눌렀고 문이 열리자 긴 복도에서 왼쪽 세 번째 방에 카드를 센싱하고는 방 안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낙원씨.”
영문도 모른 채로 그에게 이끌려 들어온 은유는 당황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고, 낙원은 목에 둘렀던 타이를 거칠게 빼냈다.
“그 남자가 어디 잡았어.”
“네?”
“넘어질 뻔 했다면서. 어디 잡았냐고.”
날이 선 낙원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 은유가 두 눈을 깜빡였다.
대체 뭐 때문에 화가 난 거지?
“내 질문이 어려워?”
“낙원씨. 혹시 화났어요?”
화가 났냐고?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낙원은 답답한 듯 잘 손질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은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 화났어. 그러니까 대답해. 그 남자가 어디 잡았냐고.”
“……혹시 그거 때문에 화 내는 거에요?”
“뭐?”
“아버님이랑 어머님께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나왔어요. 근데 그게, 그 이유 때문에 화가 나서예요?”
은유의 목소리가 제법 높아졌다.
영문도 모른 채로 낙원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그 자리에는 아버님께서도 계셨고, 어머님께서도 계셨고, 다른 친척 분들도 계셨다. 그런데 고작 이런 이유로 화가 나서 자신을 끌고 나온 것인가?
“’그 이유 때문에’라고 했어, 지금?”
“저 넘어질뻔한 거 잡아주신 거에요. 그게 그렇게 잘못이에요?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은유의 말에 낙원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렇게 중요하냐고?
넌 모르지. 오늘 네가 얼마나 눈부시게 예쁜지. 그리고 그건 내 눈에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화장실에 갔을 때 그 안에서 다른 새끼들이 나누는 말을 들으며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넌 아무것도 모르지.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고?”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배경으로 인해 낙원은 물론이고 집안 어르신들에게까지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얼마나 조심을 했는데. 말도, 행동도 전부 다 사람들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는데.
“우리만 있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 다 같이 있는 자리에요. 더군다나 어머님께서 준비하신 행사에요. 근데 그런 자리를 멋대로 박차고 나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날카로운 은유의 목소리가 낙원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나한텐 네 일보다 중요한 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가 않은데.
그런데 너는 왜. 너는 왜 내가 아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이렇게 전전긍긍인지.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네. 그 분은 단지 절 도와주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그게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에요?”
낙원의 손에 쥔 넥타이가 처참하게 구겨졌고, 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조금 전 화장실을 나서며 우연찮게 두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야. 봤냐?”
“어. 가슴 죽이더라.”
“난 힙이 대박이던데.”
손을 씻고 나가려던 낙원의 귓가로 전해진 대화는 저속한 것이었다. 어딜 가던지 또라이는 많구나 하는 생각으로 지나치려던 찰나,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단어가 들렸다.
“노강그룹 며느리, 맞지?”
“어. 왜 그렇게 꽁꽁 감싸고 안 보여주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어.”
“그니까. 얘기 들어보니까 집안은 별로던데. 돈 주고 샀나?”
“그럼 내가 다시 사면 안되나? X나 꼴리지 않냐?”
“되면 내가 먼저야 이 새끼야. 룸으로 끌고 가서 눕히고 싶다 진짜. 아까 보니까 다른 놈들도 엄청 쳐다보던데.”
제 귀로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더러운 입에서 담지도 못할 이야기가 내뱉어지는 게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에 낙원이 천천히 그 둘에게로 발을 옮겼다.
“내가 지금까지 본 애들 중에 제일 조신해.”
“얼굴은 귀여운데 가슴 봤냐? 골도 존X 예쁘던데.”
뒤에 선 낙원을 보고서도 두 남자는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이런 행사에 잘 참석하지 않아 제 얼굴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렇게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겠지.
“근데 저 새끼가 아까부터 뭘 자꾸 쳐다봐?”
거울 너머로 자신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등을 돌리기가 무섭게 낙원의 주먹이 멀건 얼굴에 그대로 꽂혔다.
“아악! 이 미친 새끼가!”
얼굴을 정면으로 맞고 코를 감싸 주저 앉은 남자를 보고 옆에 있던 남자가 낙원에게 주먹을 뻗었지만 그가 몸을 틀어 가볍게 피하고는 긴 다리를 뻗어 복부를 걷어 찼다.
쿨럭거리며 세면대 앞에 쓰러진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간 낙원의 얼굴은 차갑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시렸다.
“그 입.”
“…….”
“닥쳐.”
그 모습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져 두 남자는 벌벌 떨며 낙원과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죽여버리기 전에.”
몸을 천천히 일으키는 낙원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무섭게 빛났다.
그리고 혼자 있을 아내가 있는 연회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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