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75화 (75/112)

75. 뜻밖의 만남2016.12.07.

이런 행사 때마다 잠깐씩 얼굴을 비추어서 친한 사람은 없었지만 친한 척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오랜만입니다, 강낙원씨.”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낙원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마음 같아선 다 때려 치우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준비한 행사인 만큼 어느 정도 예의는 갖춰야 했기에 불필요한 관계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자신은 모르는 얘기들로 조금 불편해진 은유가 슬그머니 낙원의 팔에서 제 팔을 빼내자 걱정이 가득한 시선이 그녀에게 내려앉았다.

“왜 그래?”

“저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같이 가.”

“아니에요. 낙원씨는 얘기 마저 나누세요. 금방 다녀올게요.”

혹시라도 자신의 존재가 낙원을 더 불편하게 만들까 걱정이 되어 은유는 재빠르게 연회장을 벗어났고 그런 은유의 뒷모습을 쫓는 낙원의 시선은 지켜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회장을 벗어난 은유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숨을 내쉬며 화장실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커다란 화장실 안의 한 칸으로 들어가 잠시 앉아 힐을 벗고 그 위로 발을 꺼낸 은유는 붉게 부어 오른 제 발을 내려다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런 것도 해본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야. 아까 봤어?”

“응. 진짜 어이 없더라.”

“내 말이. 낙원오빠는 왜 그런 여자랑 결혼했대?”

바깥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담긴 제 남편의 이름에 은유는 심장이 철렁했다.

대화 내용의 주제는 남편인 낙원과 자신이었다. 더 정확히는 ‘자신’을 향한 목소리였다.

“들어보니까 무슨 이름도 없는 집안 여자라던데?”

“어디 돼먹지도 않은 게 오빠 옆에 붙어서. 아까 표정 봤어? 연애 결혼도 아닌 주제에 연인인 척 하느라 힘들겠지.”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욕을 들어 본 적은 꽤 있다.

잘못했던 일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잘못한 건 고치려고 노력했고, 저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욕은 그저 한 귀로 흘려 듣는 게 현명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상황을 피할 수도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니 그녀들과 마주칠 게 걱정이 되었고, 듣고 있자니 손이 덜덜 떨려왔다.

“낙원오빠네 부모님도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원. 무원오빠까지 그렇게 됐으면, 결혼은 당연히 우리 집안이랑 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안 그래도 너랑 혼담 오갔다면서?”

“나랑 했으면 카타르 사업 정진으로 넘어가지도 않았을 텐데. 고작 저런 년이랑 결혼하려고 나랑 안 했다는 게 말이나 돼?”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속에 은유가 알아차린 사실이 있었다.

카타르 사업이라 하면, 돌아가신 아주버님인 무원이 진행했던 건설사업이다. 그의 사망으로 인해 잘 진행되던 사업이 휘청거렸고, 결국 라이벌 회사인 정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낙원이 지금 밖의 저 여자와 결혼했다면 그 사업이 그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란 이야기다.

“가만 보면 노강 회장님도 참 멍청하셔. 그걸로 잃은 돈이 얼만데. 거기다 건설사업 일으키느라 들어간 돈은 또 어떻고? 건설사업 휘청거려서 밥줄 끊긴 직원들도 엄청 많았잖아.”

“그러니까 더더욱 결혼은 나랑 했어야지. 어울리지도 않는 애랑 왜 해서는.”

“보나마나 그 여자가 돈보고 몸 굴렸겠지. 또 아니? 침대에선 너보다 더 잘할지.”

“뭐? 야! 내가 얼마나 잘 하는데! 너 배우 이서한 알지? 걔가 나랑 하고 나서 나한테 얼마나 목매는 지 알아?”

시끄럽게 들려왔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멍하니 변기 위에 앉아 있던 은유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눈물이 차 올랐지만 울지 않으려 입술을 꾹 깨물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제 잘못이 아니다. 아주버님이 돌아가신 것도, 사업이 라이벌 회사로 넘어간 것도, 노강건설이 휘청거렸던 것도. 모두 다 자신과 무관한 이야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쪽이 불편하게 아파왔다.

분명 자신과 결혼하기 전보다 한참 더 전의 지난 일이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잔뜩 붉어진 눈가로 입술을 깨문 채 퉁퉁 부은 발을 힐 안으로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은유는 심호흡을 하며 일어나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떨지 않으려 했지만 몸은 여전히 떨렸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어지러운 머리 속을 비우려고 애써도 흐트러지는 정신에 자꾸만 눈앞에 뿌옇게 흐려지던 때, 코너를 돌던 그녀는 누군가와 부딪히며 몸이 휘청였다.

아주 잠깐 사이의 일에 눈을 꽉 감았던 은유는 아픔이 전해져 오지 않아 살며시 눈을 뜨고 제 앞에 보이는 얼굴에 깜짝 놀랐다.

“괜찮으세요?”

“……네? 아, 네, 네! 죄, 죄송합니다!”

갑작스런 부딪힘에 놀라 넋을 놓고 있던 은유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재빠르게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서고선 다시 한 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안 다치셨어요?”

“네, 네. 괜찮아요.”

놀란 그녀를 부드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던 남자는 반대편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형수님!”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틀자 놀란 얼굴을 한 지혁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도련님.”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제가 넘어질 뻔 했는데 이분께서 잡아주셨어요.”

제게로 향한 지혁의 시선에 남자는 나른하게 웃으며 오른쪽 손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

“강지혁 이사장님 맞으시죠? 반갑습니다. 정진건설 김태형 이사입니다.”

은유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맞은 편 남자에게로 닿았다.

‘정진건설’이라니.

“예. 노강재단 강지혁입니다.”

마주잡은 남자의 손에서 느껴진 힘에 지혁은 표정을 구길 뻔했다.

사람 좋은 특유의 미소를 걸친 지혁이 은유의 어깨에 제 자켓을 벗어 덮어주고는 태형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형수님을 도와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못 보고 부딪힐 뻔 했는데요. 다치신 곳이 없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예. 이사님도 괜찮으시죠?”

지혁의 물음에 태형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회장 쪽으로 눈짓했다.

“그럼 들어가실까요?”

태형이 먼저 몸을 돌려 연회장으로 들어섰고, 지혁은 은유의 어깨를 감싸고는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눈가가 붉은 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왜 울었어?”

“네, 네?”

“티 나.”

“티 많이 나요? 안 되는데.”

금새 불안함이 가득 떠오른 얼굴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 지혁은 연회장 바로 옆 테라스로 그녀를 데리고 나섰다.

한겨울이라 바람이 찼기에 덮어준 자켓을 꼭 여며준 지혁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어요.”

“근데 울었어?”

“……네. 그냥 하품한 거에요.”

“퍽이나 그렇겠다.”

울기 직전까지 간 거지 울진 않았는데. 티가 난다니 걱정이 밀려왔다.

어머님께 누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되는 자리인데, 이 얼굴로 들어갔다간 무슨 말들이 오고 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화장실에서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어?”

“네? 아뇨?”

“아닌 얼굴이 아닌데.”

“진짜 아니에요.”

“누가 그랬는데.”

제 말만 하는 지혁을 보며 은유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열 수 없었다.

무원의 죽음을 낙원만큼이나 가슴 아파하는 그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전할 수는 없었다.

“그냥. 발이 너무 아파서요.”

거짓말.

다른 이유가 있었으면서 발이 아프다고 둘러대는 그녀를 지혁은 더 이상 몰아세우지 않았다.

대신 몸을 굽혀 퉁퉁 부어 있는 그녀의 발 위로 제 손바닥을 덮었다.

“도, 도련님!”

“가만 있어 봐. 내 손 완전 따뜻해.”

“누, 누가 보면 어떡해요! 저 진짜 괜찮아요!”

“보면 좀 어때. 도련님이 이런 것도 못해주나.”

그렇지 않아도 뒷말이 오고 가는데, 이런 모습까지 누군가에게 보인다면 더 심한 말들이 오고 갈게 분명했다.

은유는 급히 한 발자국 물러섰고, 지혁이 굽혔던 몸을 펴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굳어있지 말고 어깨 펴.”

“……추워서 그래요.”

“누가 뭐래도 형수 노강그룹 사람이야. 노진희 여사님 손주며느리고, 강준원 사장님 며느리고, 강낙원 아내야. 그 사실은 변함 없어.”

“…….”

“여기 사람들이 좀 더러워. 어딜 가도 그런 사람들 한둘 있잖아. 여긴 다른 곳보다 좀 더 많을 뿐이고, 좀 더 지저분할 뿐이야.”

그렇게 전해오는 말은 피곤한 얼굴과는 달리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했다.

“누가 형수 힘들게 하면 우리 집안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강낙원부터가 그렇게 안 둬.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당당하게 행동해. 그게 큰어머니께 더 도움이 되는 거야.”

“……네. 명심할게요.”

“혼내는 거 아니야. 형수 기죽지 말라고. 형수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집안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거 모르고 함부로 입 놀리는 사람들 때문에 기죽지 마.”

괴롭히는 것 같다가도 이렇게 늘 저를 챙겨주는 지혁이 고마워 은유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그런 사람 아닌 거 나도 알고, 낙원씨도 알고, 도련님도 알고, 모두가 다 아는데. 그런 말에 휘둘리지 말자. 이렇게나 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너지지 말자.

굳게 다짐하는 은유를 지켜보던 지혁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다시 들어가자.”

“네. 감사합니다.”

“형수 말대로, 가족이잖아.”

지혁을 따라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선 은유는 어렵지 않게 낙원이 있는 곳을 찾을 수가 있었다.

유독 남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옆에 서 있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예뻤고, 우아해 보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와 정말로 잘 어울리는 사람들처럼 보였고, 아까 그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시 주눅이 들려는 은유를 데리고 그 틈으로 들어간 지혁이 그녀를 낙원의 옆에 세워주자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은유에게로 닿자 다시 다정하게 변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좀 추워서 도련님께서 덮어 주셨어요.”

은유의 어깨에 덮인 지혁의 자켓을 벗겨 그에게 건넨 낙원이 제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로 둘러주었다.

“좀 괜찮아?”

“네. 고마워요.”

은유를 대하는 낙원의 태도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귀한 다이아몬드를 다루듯 아주 세심하게 어루만지는 시선과 손길이 소문으로 들었던 그의 성격과는 정 반대였다.

그 다정한 모습에 부러움과 시기를 느끼는 여자들 사이에 조금 전 화장실에서 은유를 뒷담화하던 두 명도 끼어 있었다.

대체 저 여자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감싸고 도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의 집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여자인데. 보고 있다가 화병이 날 것 같아 자리를 피했다.

아내를 살뜰히 챙기는 낙원의 앞으로 한 남성이 다가와 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강선생님.”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호칭에 낙원과 은유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맞은 편의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권중식 의원님.”

“오랜만입니다. 두분 다.”

인자한 얼굴로 한 손에 와인 잔을 든 중식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엔 기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이거 참, 뜻밖의 만남인데. 그것도 아주 유쾌한.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