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봉사활동2016.12.05.
앞을 보며 운전을 하던 낙원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힐끔 고개를 돌려 은유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제가, 제가 낙원씨 첫사랑이에요?”
“어.”
어쩜 이 남자는.
어떻게 이 남자는.
“사랑해요.”
갑작스럽게 날아든 고백에 낙원은 하마터면 이 넓은 도로 위에서 차를 멈출뻔했다.
“그거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었어.”
“저 너무 행복해요. 낙원씨한테 그런 사람이라는 게, 진짜 너무 행복해요. 그리고 너무 죄송해요.”
“뭐가.”
“……저는 첫사랑이 낙원씨가 아니어서요. 저도 그래야 하는데, 저는 아니어서 죄송해요.”
“그거 지금 나 질투하라고 하는 말이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낙원씨한테도 이런 감정 느끼게 해주고 싶은데, 거짓말할 수는 없잖아요. 대신 제 마지막 사랑은 낙원씨에요. 이건 정말로 제가 장담해요.”
또 한번 사고 위기를 넘긴 낙원은 아예 핸들을 틀어 갓길로 차를 세웠다.
“안되겠다.”
“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뜨던 은유는 제게로 다가오는 낙원의 얼굴에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밀어낼 새도 없이, 물론 그럴 생각은 당연히 없었지만 낙원은 거침없이 은유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혔다.
모두가 달리는 창 밖과는 달리 차 안의 두 사람의 시간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아예 안전벨트를 푸르고 은유의 목 뒤를 끌어당겨 입술을 진하게 탐하던 낙원이 잘은 숨을 몰아 쉬며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집으로 갈까?”
“가, 가긴 어딜 가요! 얼른 출발이나 해요!”
“너 오늘도 일찍 자긴 틀렸다.”
“네에? 오늘은 안돼요!”
“안되긴 뭘 안돼. 나야말로 안돼.”
“어, 어제도 엄청!”
“어제는 어제고.”
남편이 점점 변태가 되어 가는 게 틀림없다.
절대 일찍 재우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얼굴에 은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어쩌면 같이 변태가 되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약 1시간가량을 달린 낙원의 차는 경기도에 위치한 작은 보육원 앞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이 뒷좌석에 싣고 온 선물꾸러미를 꺼내 양손 가득 무겁게 들고선 작은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여 벌써부터 마음이 아파왔다.
정원을 지나쳐 입구로 들어서자 분주히 움직이던 여자가 두 사람을 보고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오늘 봉사활동 신청한 강낙원입니다.”
“어머. 네 안녕하세요!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자원봉사자의 안내를 받아 원장실로 향하자 작은 공간 안에 앉아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시느라 힘드셨죠? 위치가 조금 안 좋아서요.”
“아닙니다. 이거 별건 아닙니다만 아이들 나눠주려고 가져왔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안 하셔도 괜찮은데……. 너무 감사합니다.”
다른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선물은 바깥으로 옮겨졌고, 원장은 따뜻한 차를 두 사람의 앞에 놓아주고 이 곳의 방문에 대한 감사인사를 전했다.
“보시다시피 위치도 안 좋고, 시설 자체도 작아서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많이 필요해요. 다들 큰 기관으로 많이 가시는데, 처음에 전화 받고 많이 놀랐습니다.”
“생각해보니 큰 기관은 저희가 아니더라도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고요. 이왕이면 도움이 더 필요한 곳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젊은 부부가 어쩜 이렇게 마음 씀씀이가 예쁠까 싶어 원장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보통 시에서 지원해주는 봉사자들 이외에 정말 원해서 먼저 연락을 주고 이렇게 찾아와주는 봉사자들은 거의 없었다.
원장은 다시 한 번 감사인사를 전하며 시설에 대해 소개해주었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신생아부터 시작해서 7살까지 총 15명입니다. 그에 비해 관리하시는 분들이 네 분 뿐이라 저희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오늘 두 분께서는 신생아들 우유 먹이는 거랑 아이들과 놀아주기, 청소를 해주시면 됩니다.”
간단하게 설명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원장을 따라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에 들어갔다.
옷을 단정히 하고 손을 깨끗하게 씻고 나서야 갓난아기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총 세 명의 아이가 바닥에 깔린 요 위에 누워 있었는데 은유는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냈다.
보기만 해도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들인데, 대체 무슨 사연으로 이렇게 낯선 곳에 있는 것일까?
“아이들 안으실 때는 목 뒤를 받쳐서 안아주시고 젖병 물려주시면 돼요. 다 먹은 후에는 안고서 등 두들겨서 꼭 트림 시켜주셔야 하고요.”
다른 자원봉사자가 먼저 아이를 안아 시범을 보였고 은유는 어렵지 않게 그 아이를 받아 안았다.
워낙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인지라 어릴 적부터 사촌 동생들을 키우다시피 한 그녀로써 아이를 안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제 품에 가만히 안겨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나도 안쓰러우면서 사랑스러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우’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를 안은 채로 젖병을 물려주자 작은 입을 오므리며 맛있게도 먹는다.
“우리 지우 너무 잘 먹네? 맛있어?”
지우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고 예쁘다고 해주는 은유를 보며 낙원은 울컥했다.
민지를 보살필 때도 느꼈지만 이렇게 직접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엄마였다.
그런 은유의 옆에 다가가 앉은 낙원은 제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서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아이인데 낯을 가리는지 울음을 터뜨려 천하의 강낙원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 울어 서진아. 나 싫어?”
“풉. 그게 뭐에요.”
“내 얼굴만 보고 울잖아. 내 얼굴 보고 운 애는 처음인데.”
“좀 웃어줘요. 낯 가려서 그런가 봐요.”
평소 남들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던 ‘살인미소’에 정말 다행히 서진은 울음을 그쳤다.
웃으며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달래주자 금새 울음을 그치고는 낙원의 새끼손가락을 꼭 말아 쥐었다.
순간 가슴 깊숙이 떨림을 느낀 낙원이 은유를 쳐다보았다.
“이거 봐. 내 손 잡았어.”
“거 봐요. 낙원씨 좋아하잖아요. 그지 서진아?”
팔에 목을 받쳐 안고 젖병을 물린 낙원은 야무지게 젖병을 빠는 서진을 신기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작은 게 살겠다고 먹는 모습이 짠하게 느껴졌다.
“서진아. 배 많이 고팠어?”
부드러운 음성에 고개를 돌린 은유는 낙원과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떨림을 느꼈다.
언젠가 생기게 될 우리 아이에게도 저렇게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줄 그가 상상이 되어 알 수 없는 깊은 감정이 밀려왔다.
두 아이가 금새 젖병 한 통을 비워냈고 은유는 지우를 안고 등을 쓸어 내려주며 트림을 시켰다.
갓난아이는 처음 보는 낙원도 은유가 하는 것을 보며 곧잘 따라 했다.
요 위에 눕히자 천장에 달린 모빌을 보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다음 장소로 향했다.
3세부터 7세가 노는 놀이방 안에는 이미 난장판으로 장난감을 어질러 놓고 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입구에 들어서는 두 사람을 발견한 아이들이 때묻지 않은 순수한 얼굴로 쳐다보며 달려들었다.
아이들에게 다리를 한쪽씩 잡힌 낙원이 코알라처럼 붙은 아이들을 매단 채로 안쪽으로 걸어가자 신이 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와아아! 나무 삼촌이다!”
“나도 나도! 나도 할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어주는 낙원을 두고 은유는 소극적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안녕?”
“…….”
“너무 예쁘게 생겼다. 이름이 뭐야?”
“……세진이요…….”
“세진이? 목소리도 너무 예쁘다. 나는 은유야, 심 은유.”
잔뜩 웅크린 채로 앉아 있던 세진은 올해 6살이 된 아이였다.
태어나서부터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다가 2년 전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는데 늘 말이 없는 아이라고 했다.
잘 노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유난히 몸을 웅크리고 혼자 있는 세진이 안쓰러워 은유는 그 앞에 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세진아.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이모가 세진이랑 놀고 싶어서 왔어.”
“…….”
불안함이 가득 찬 눈동자가 마치 제 마음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자연스레 민지가 생각이 나서 더 속이 상했다. 이 아이는 심지어 태어나서부터 학대를 당했단다.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세진이는 뭘 좋아해? 나는 책 보는 걸 좋아해.”
“…….”
“이모가 동화책을 몇 권 가지고 왔는데 세진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봐도 돼. 저쪽에 있는 책꽂이에 꽂아놨어.”
“……네…….”
여전히 말이 없는 세진을 보던 은유에게로 이제 막 걸음을 뗀 아이가 뒤뚱뒤뚱 걸어와 폭 안겼다.
제 팔에 매달려 올려다보는 아이를 본 은유가 두 팔로 작은 아이를 감싸 안아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아부부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지 옹알이를 하는 남자아이를 보며 은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도리도리를 해주기도 하고, 몸을 흔들어주기도 하며 아이와 놀아주던 중에 세진과 눈이 마주쳤다.
“동생 귀엽지?”
“…….”
“세진이도 이렇게 예뻤을 거야 분명히. 지금도 너무 예쁘니까.”
확신에 찬 듯 이야기를 전해오는 은유를 보며 세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안고 있는 은유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은유의 품에 안겨 있던 남자아이가 그녀의 옷을 잡고 장난을 치기 시작하더니 봉긋하게 솟아 오른 가슴에 손을 턱 얹었다.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에 은유는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웃으며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배고파? 맘마 먹을까?”
“부우.”
“으쌰. 세진아 언니 금방 올게. 잠시만 기다려줘.”
여전히 대답이 없는 세진을 두고 일어선 은유는 아이를 안고서 자원봉사자를 찾았다.
다리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과 놀아주던 낙원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어디 가?”
“아. 애기가 배고픈 것 같아서요.”
낙원은 은유의 등 뒤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세진을 보더니 은유의 품에 안겨 있는 남자아이를 제 품으로 옮겨 안았다.
“내가 갈 테니까 저기 가 봐.”
“네? 그래도…….”
“너 기다리는 것 같으니까 가봐. 얘는 내가 다른 분들께 말씀 드릴게.”
“고마워요 낙원씨. 그럼 저 세진이한테 가볼게요.”
환히 웃으며 등을 돌려 세진에게 다가가는 은유를 보던 낙원은 제 품에 안긴 남자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낙원은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너 저 누나 가슴 만졌지.”
“부으.”
“모르는 척 해도 소용없어. 내가 다 봤어.”
낙원은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가 자원봉사자를 찾았다. 복도를 걸으며 여전히 저를 올려다보며 주먹을 꼭 말아 쥐고 장난치는 아이를 내려다본 그가 작게 속삭였다.
“미안한데 그거 내 거야. 너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
은유가 들었으면 전매특허 팔뚝 때리기를 선보였을 법한 발언이었다.
낙원에게 질투의 대상이 된 아이는 곧이어 자원봉사자 손에 넘겨졌고 낙원은 승리의 미소와 함께 다시 놀이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다짐했다.
아이는 좀 더 늦게 갖는 걸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