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71화 (71/112)

71. 후회할 텐데요, 오빠2016.12.03.

“대리기사님 오셨대?”

“어. 도착하셨다네.”

“그래. 얼른 가 봐. 심선생 오늘 많이 마셨네.”

“그러게요. 아까부터 혼자 엄청 마시더니 아주 갔네요.”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각, 다들 술집 앞에서 낙원과 은유에게 손을 흔들었다.

은유를 감싸고 멀어지는 낙원을 보며 다현이 작게 웃었다.

“심선생이 어지간히 속이 상했나 보네.”

“뭐가요?”

“정선생이랑 이선생님이 강선생님 옛날 얘기해서. 여자들한테 인기 엄청 많았다는.”

“아~ 세상에. 그럼 질투해서 그렇게 마신 거라고요?”

“당연하지. 인기도 보통 인기가 아니었다며?”

“그건 그렇죠. 하기야. 저 같아도 질투 엄청 났을 걸요. 헐, 아까 이선생님이 뽀뽀 얘기도 했잖아요!”

“지난 얘긴데 뭐.”

“지난 얘기라고요? 그래도 여자 입장에서는 엄청 화 나는 말이에요 그거!”

자신을 가운데에 두고 또 다시 투닥거리는 두 남녀를 보며 다현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곳을 빠져 나왔다. 하여간 이선생님도 참 눈치 없으시지.

이미 많이 취한 은유를 차에 태운 낙원은 기사에게 차 키를 건네고는 은유의 옆자리에 올라 탔다.

멍하니 창 밖을 쳐다보는 은유가 걱정이 되어 상체를 기울여 그녀를 쳐다보았음에도 웬일인지 보는 척도 하질 않는다.

“은유야.”

“왜요.”

“속 괜찮아?”

“몰라요.”

퉁명스러운 말투로 지금 그녀의 기분이 어떤지 알아차린 그가 조용히 웃고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화났어.”

“화 안 났는데요.”

“그럼 왜 나 안 봐.”

“저 졸려요. 잘래요.”

그 말을 끝으로 은유는 차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아버렸다.

운전을 하며 기사는 백미러를 힐끔거리며 두 사람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곤 낙원에게 짠한 눈빛을 보냈다.

자신도 아내에게 잡혀 사는 입장이라 누구보다 낙원의 지금 처지가 이해가 되어 속으로 힘을 내라며 그를 응원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은유는 한 번도 눈을 뜨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죽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잠에 든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은혁과 윤주의 말이 머리 속을 둥둥 떠다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강낙원 인기는 장난이 아니었지.’

‘각 학과에 미모 탑인 여자애들이 맨날 와서 고백하고.’

‘무용과 탑이었던 선배가 한 3개월인가 맨날 강선생님한테 와서 밥 먹자고 하고, 커피 마시자고 하고, 고백하고 이러셨거든요?’

‘화이트데이에는 사탕이 넘쳤고, 빼빼로데이에는 빼빼로가 넘쳤어요.’

‘수학과에는 맨날 ‘오빠’소리만 엄청 떠나가라 울렸잖아요.’

이런 젠장. 왜 자꾸 이런 것들만 떠오르는 거야?

아니. 그보다 무슨 사람들이 공부는 안 하고 남자만 보고 쫓아다녀?

휴학은 또 왜 해? 힘들게 학교에 갔으면 자기 공부 열심히 해야지.

맨날 밥은 왜 먹자는 건데? 친구도 없나?

“자, 다 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기사님도 조심해서 가세요.”

기사가 먼저 차에서 내려 주차장을 빠져나갔고, 낙원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은유를 쳐다보았다.

“심은유. 자?”

“깼어요.”

“걸어갈 수 있겠어? 내가 안고 갈까?”

“됐거든요? 저도 걸어갈 수 있어요.”

그렇게 호기롭게 차에서 내렸지만 술기운에 휘청거리는 은유를 본 낙원이 재빠르게 따라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리 와. 걷긴 뭘 걸어.”

“저 걸어갈 수 있다니까요?”

두 눈에 힘을 주고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사랑스러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차 키를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끄덕인 낙원은 먼저 걸어가는 은유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바닥에 그림을 그리듯 비틀거리는 모습이 신경이 쓰이던 찰나 저쪽에서 차 한대가 핸들을 틀며 은유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재빠르게 은유의 팔을 붙잡아 제 품에 가둔 낙원이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고집 부리지 말고 옆에서 걸어.”

방금 상황이 위험했다는 생각은 들었는지 은유는 말없이 낙원이 시키는 대로 걸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은유는 저를 감싸 안은 낙원의 손을 풀고선 모서리에 달린 손잡이를 잡았다.

“내가 안는 게 싫어?”

“아니요.”

“그럼 왜 그래.”

“제가 뭘요?”

이 남자가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모르는 척 하는 거야?

몰라서 묻는 거라고 보기에 남편은 눈치가 빠른 편인데. 모르는 척 한다고 보기엔 정말 표정에서 거짓이라곤 느껴지지 않고. 아악! 다 짜증나!

띵.

13층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나선 은유가 집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아니라, 틀렸다는 기계음이 나온다. 대체 왜?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 진짜!”

결국 입 밖으로 짜증이 터져 나온 은유는 씩씩거리며 다시 손을 뻗었고, 그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낙원은 웃음을 꾹 참고 그 작은 손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한 발자국 다가가 작은 몸 옆으로 팔을 뻗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릭.

“열렸네.”

“고오맙네요!”

벌컥 문을 열고 휙 안으로 들어가는 은유를 보며 낙원이 자꾸 올라가려는 입가를 쓸어 내리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은유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주고 그녀를 뒤따라 안방으로 향했지만 그곳에 은유는 없었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코트를 벗어 옷장 안에 넣은 낙원은 물소리가 나는 욕실 앞으로 향했다.

“너 혼자 씻을 수 있어?”

“제가 무슨 애에요? 혼자 씻을 수 있어요!”

“너 다칠까 봐 그래.”

“됐거든요? 알아서 씻을 테니까 가서 씻어요!”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걱정이 되는 건 또 다른 문제인데.

술기운에 혹시라도 미끄러져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 되는 자신과는 달리 은유는 질투에 눈이 멀어 있었다.

결국 그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던 낙원은 욕실에서 물소리가 그치고 나서야 밖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목욕가운을 입고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욕실에서 나온 은유는 여전히 입을 삐죽이며 바깥으로 나섰다.

휑한 거실에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괜히 기분이 상한 그녀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을 빠르게 스캔 했다.

얼마 전 사놓았던 맥주를 발견한 은유가 한 캔을 꺼내 따고선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 사람들이 이 맛에 마시는 구나. 역시.”

‘어떤 여자애는 강선생 공부하는 도서실까지 쫓아가서 쟤 자는데 몰래 볼에 뽀뽀하다가 들켰잖아.’

아 또 그 말이 생각날 건 뭐야?

근데 뭐. 뽀뽀? 아니 공부하러 도서실에 갔으면 공부나 할 것이지, 감히 뽀뽀를 해? 신성한 학교에서?

그렇게 생각하던 은유는 불과 몇 시간 전 자신도 그 신성한 학교에서 뽀뽀를, 아니 더 농도 짙은 키스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심은유는 학생이 아니고 성인이니까, 벌도 성인처럼 받아야지.’

그 말과 함께 제게 입을 맞춰오던 남편의 모습에 생각이 났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멋도 모르고 말했던 ‘으른섹시’라는 게 어떤 건지.

방음이 잘 되는 음악실에서 그의 품에 안겨 영혼까지 빠질 정도로 진한 키스를 나누며 아슬아슬한 수위를 넘지 않으려 어찌나 애를 썼던지.

은유가 혼자 그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샤워를 마친 낙원도 목욕가운을 걸치고 욕실에서 나왔다.

안방으로 향하려던 그는 주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발을 옮기다 우뚝 멈춰 섰다.

술을 그렇게 마셔놓고 또 혼자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얼굴이 제법 붉어져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심은유.”

아니, 나는 아내니까 당연히 그 정도 키스야 할 수 있는 거고.

아무 사이도 아닌 여자가 뽀뽀를, 그것도 몰래 한다는 게 말이나 돼?

아무리 지난 일이라지만 이거 이거, 진짜 열 받네?

“심은유.”

“어? 언제 왔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길래 불러도 몰라.”

무슨 생각이긴.

내 남편의 과거 여자들에 대한 생각이지!

참 나.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서 정말.

“술 그만 마셔.”

“왜요?”

“너 얼굴 빨개졌어.”

“그게 뭐요?”

유난히 공격적인 말투에도 낙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은유의 손에 들린 맥주 캔을 제 손으로 옮겼다.

“오늘 많이 마셨으니까 그만 마셔.”

“싫어요. 더 마실 거니까 주세요.”

“너 혀도 꼬였어. 그만 마셔.”

“참 나. 혀 좀 꼬이면 어때서요? 내가 뭐, 몰래 뽀뽀하다가 들킨 것도 아니고?”

이럴 수가.

결국 속에 있던 말이 튀어 나가고야 말았다.

혹시라도 낙원이 기분이 나빴으면 어쩌지 하고 눈치를 보던 은유는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발견했다.

뭐야. 웃어? 지금 웃는 거야?

“……지금 웃어요?”

“아니.”

“거짓말하지 마요! 지금 웃었잖아요! 어어? 이거 봐. 또 웃네!”

낙원에게 삿대질을 하며 바짝 다가선 은유는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남은 심각한데 지금 웃음이 나와?

“왜 웃어요? 혹시, 혹시 그 여자가 뽀뽀했던 거 생각하는 거에요? 설마 좋았어요? 그런 거에요?”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여?”

“뭐라고요? 하 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에요?”

“난 일방적으로 당한 건데. 내가 한 거 아니야.”

이 남자가 진짜.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모르는 여자한테 막 고백 받으면 돼요, 안돼요?”

“……뭐?”

“돼요, 안돼요?”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 따져 묻는 은유의 모습이 몇 시간 전 제 모습을 따라 하는 것임을 알아차린 낙원은 정말이지 크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모르는 여자 마음에 멋대로 불지르면 돼요, 안돼요?”

“그것도 안 돼.”

“모르는 여자한테 아무 선물이나 막 받으면 돼요, 안돼요?”

“안 되지.”

“그럼 모르는 여자한테 뽀뽀 받으면 돼요, 안돼요?”

“절대 안돼.”

“잘못 했어요, 안 했어요?”

“했어.”

낙원의 대답에 은유가 그의 앞으로 한발자국 더 다가섰다.

몸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서 은유가 두 손을 들어 낙원의 가슴팍에 올렸다.

“그럼, 벌 받아야죠.”

“……어떻게 벌 줄 건데? 참고로 난, 학생이 아니라 성인인데. 그것도 혈기왕성한.”

“그 말 후회하실 텐데요.”

“아닐걸.”

저를 도발하는 낙원의 말에 은유의 승부욕이 발동했다.

술도 마셨겠다, 질투심도 일었겠다.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두 팔을 옮겨 낙원의 목을 감싼 은유는 천천히 제 얼굴 가까이로 고개를 내리게 했다.

“진짜 후회할 텐데요, 오빠.”

은유의 그 예쁜 입술에서 나온 ‘오빠’라는 한 단어에 낙원의 눈이 커다래졌다.

생각하지도 못한 단어였다. 그래서 당황했고, 낙원은 오늘 정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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