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으른섹시2016.12.01.
“지금 뭐 하는 거-”
“쉿!”
아무도 없는 학교의 복도에 서서 부부싸움 하는 모습을 들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낙원을 잡아당겨 교실 안으로 들어와 말소리를 내는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굳게 닫힌 문에 귀를 대고 수위아저씨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것을 듣고 나서야 작은 숨을 내쉰 은유는 제게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살며시 고개를 돌리다 다시 숨이 멎었다.
남편을 교실 뒷문 옆쪽의 구석진 벽면에 등을 기대고 서있도록 만든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
급한 마음에 일단 데리고 들어와 밀어붙이기는 했는데, 그로 인해 몸이 완전히 밀착되어 있었다.
게다가 입까지 손으로 틀어막고 있는 터라 분위기가 상당히, 묘했다.
“어……. 저, 저기……. 아! 소, 손부터 떼야지.”
은유가 낙원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급히 내렸지만 낙원의 시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그……. 수위 아저씨가 지나가셔서…….”
변명을 했지만 낙원은 오히려 ‘어디 더 해봐라’하는 눈빛이었다.
괜히 이상해진 분위기에 은유가 한걸음 물러나려던 순간 낙원의 팔이 허리를 단단하게 감쌌다.
“어딜 도망가.”
“네? 아……. 그……. 여, 여기는 학교고…….”
“아무도 없어.”
“아니, 그. 어, 언제 다른 사람이 들어올 지도 모르고…….”
“음악실에?”
“예?”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낯설지 않은 풍경이 보였다.
중앙에 마련된 커다란 검정색의 피아노와 그 앞으로 놓인 기다란 의자와 책상들. 그리고 한쪽에 잘 놓여있는 악기들이 이곳이 ‘음악실’이라는 걸 잘 보여주고 있었다.
넓은 공간을 둘러보던 은유의 귓가로 방금 전 뮤직비디오에서 들었던 목소리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섹시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갔다.
“여기 방음 끝내주는데.”
“……네, 네, 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방음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아니, 음악실 방음 좋은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은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낙원이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더 바짝 끌어 당겼다.
“아까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네, 네…….”
“뭘.”
“……그…….”
저를 뚫어져라 꿰뚫듯 마주해오는 시선에 몸이 타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지만 낙원의 다른 한 손이 턱을 잡고 올렸다.
“다른 남자 앓다 죽으면 돼, 안돼.”
“……안돼요…….”
“다른 남자한테 섹시하다고 하면 돼, 안돼.”
“……안됩니다…….”
“다른 남자한테 오빠라고 하면 돼, 안돼.”
“……그것도 안돼요…….”
당당하기만 한 낙원과 달리 은유의 목소리는 점점 더 기어들어갔다.
“다른 남자한테 잘생겼다고 하면 돼, 안돼.”
“안돼요…….”
“잘못 했어, 안 했어.”
“……했어요…….”
그래. 내가 죽을 죄를 지었다.
잘생긴, 아니. 그냥 좀 생긴 빅시 멤버들한테 앓다 죽을 거라고 한 것도, 섹시하다고 한 것도, 오빠라고 한 것도. 다 내 잘못이다.
아니, 그래도 그렇게 죽을 죄를 진 건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는 동안 다시 한 번 낙원의 목소리가 은유에게로 던져졌다.
“그럼 벌 받아야지.”
“네? 아니, 제가 잘못을 하긴 했는데……. 제가 학생도 아니고, 벌을 받아야 해요?”
아주 순식간이었다.
낙원이 은유를 잡아당겨 제 위치와 바꾸었고 덕분에 은유는 등 뒤로는 단단한 벽이, 앞으로는 무서울 만큼 섹시한 낙원이 있어 갇힌 상태가 되었다.
자세가 조금, 위험한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한 순간 낙원의 얼굴이 은유의 코 앞으로 다가왔다.
“심은유.”
“네, 네?”
“너 으른섹시가 뭔 지나 알아?”
“……네?”
으른섹시라고 하면, 섹시 중에서도 제일 으뜸이라는 그것.
어느 누가 봐도 퇴폐미가 느껴지는, ‘어른스러운 섹시함’의 대표인 그 그룹을 좋아하는 은유로써는 ‘으른섹시’라는 말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낙원이 물어오는 질문에서 ‘알고 있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늘 말로만 들어왔던, 상상으로나 해왔던 ‘으른섹시’는 멀리 있지 않았다.
은유의 얼굴 옆으로 벽을 짚고 있던 낙원의 팔이 목 뒤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 손에서 전해져 오는 열기에 심장이 쿵. 쿵. 뛰기 시작했다.
녹일 듯이 저를 쳐다보는 눈빛과 나른하게 풀어진 목소리, 느슨하게 늘어져 있는 입술.
“심은유는 학생이 아니고 성인이니까, 벌도 성인처럼 받아야지.”
“…….”
그리고 은유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남편은 무서운 선생님이었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
퇴근 후 학교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온 다섯 명은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을 했다.
돼지갈비 5인분과 소주와 맥주를 시키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한 것도 없는데 되게 배고프네요.”
“그지? 맨날 먹기만 하는 것 같아.”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앞에 차려지는 돼지갈비를 보는 눈에선 빛이 났다.
잘 달궈진 철판 위에 돼지갈비를 올리자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
낙원이 고기를 굽는 동안 은혁은 소주와 맥주를 따서 소맥 제조에 들어갔다.
“잘 말아줘~”
“푸하하. 송선생님 진짜 웃겨.”
옛날에 유행하던 노래에 진심을 담아 부르는 다현을 보며 은혁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각자의 앞에 잘 말은 술이 담긴 잔을 놓아주었다.
“우리끼리 이렇게 모이는 건 또 처음이네? 앞으로 자주 모입시다.”
다 같이 술잔을 들고 챙 하는 경쾌한 소리로 그들만의 새해 기념 파티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내일 뭐 해?”
“아, 저희 내일 봉사활동 가요.”
“봉사활동?”
“네!”
얼마 전 은유가 낙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봉사활동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며.
평소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집안 전체가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 편이었기에 낙원은 봉사활동에 대한 거부감 같은 건 없었다.
보통 가서 사진만 몇 장 찍고 오는 보여주기 식의 봉사활동을 하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증조할아버지부터가 사회 공헌에 대한 개념이 남다르셨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그런 활동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은유가 먼저 낙원에게 봉사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처음엔 의아해했다. 주말에 쉬어도 모자랄 판에 봉사활동을 가자는 말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 다 아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장소는 보육원으로 정하게 되었고, 집안에서 후원하고 늘 방문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보기로 결정했다.
“우와. 진짜 멋있다. 피곤할 텐데 대단하네.”
“하핫. 아니에요. 그냥 하고 싶어서요.”
“두 사람 진짜 잘 만났네.”
은혁의 칭찬에 고기를 굽던 낙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진짜 잘 만났지.
“어우. 강선생 진짜. 고기나 구워.”
“이선생은 그만 먹어.”
“나 별로 안 먹었거든?”
“이선생 젓가락이 제일 바빠.”
말은 그렇게 해도 낙원이 누구보다 은혁을 잘 챙기고 편해한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기에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시간이 점점 지나자 쌓여가는 고기 그릇과 비례하게 빈 술병들도 늘어났다.
“배는 채웠고, 옮길까?”
“네!”
고기도 신나게 먹었겠다, 배도 부르겠다. 다섯 명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각자 짐을 챙겨 나왔다.
어딜 갈까 둘러보던 중에 근처에 있는 맥주 전문점이 낙찰되었다.
자유로운 분위기도 그렇고, 금요일이라는 이유로 가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생사를 잔에 담아 술과 함께 넘기고 있었다.
가게 안쪽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생맥주와 안주를 시키고 나니 1차로 마셨던 술이 조금 깨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은유를 제외하고.
“괜찮아?”
“네. 아직 괜찮아요.”
식당에서 제법 많이 마시는 것 같아 저지했는데 그러길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벌써 취해서 또 힘겨운 날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졸업식도 얼마 안 남았네.”
“진짜요. 시간 너무 빨라요. 우리 애들 만난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윤주가 아쉽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정선생은 올해 첫 담임이었지? 어땠어?”
“저 진짜 실수투성이죠 뭐. 아이들도 잘 못 챙겨준 것 같아서 속상하고, 아쉽고.”
처음이다 보니 욕심이 생겨 뭐든 다 잘해내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못한 것 같아 자꾸 속이 상했다.
은혁이 그런 윤주의 등을 토닥거리고는 부드럽게 달랬다.
“처음엔 누구나 다 그래. 몇 년 지난 선생님들도 실수는 다 해. 항상 아쉽고, 속상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잘 하고 있다는 거야.”
“정말 그럴까요?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을 텐데, 모자란 선생님으로 기억될까 봐서 무서워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아이들한테도 다 잊혀질 거고…….”
항상 아이들에게 애착을 갖고, 사랑을 쏟아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낙원과 은혁도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이 된 지 벌써 4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윤주와 같은 고민을 하곤 한다.
아이들에게 부족하게만 해준 것 같고, 자신이 모자란 선생님인 것 같고.
사랑을 쏟아 부은 아이들이 학년이 바뀌면, 특히 졸업하면 잊혀지게 되는 것 같아 늘 불안하고 속상했다.
그러나 이건 누구나 그런 것이다. 이상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배운 사실이었다.
“잊을 아이는 잊고, 기억해주는 아이는 또 기억해주고. 모두에게 다 좋은 선생님일 수는 없지만 이선생 말대로 이렇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좋은 선생님인 거야.”
“와, 강선생님 멋있네요. 후배한테 얘기하듯이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어? 송선생님 몰랐어? 정선생 나랑 강선생 후배야.”
“네?”
이건 은유도 몰랐던 사실이다. 후배라니? 그러고 보니 세 사람 다 한국대학교를 나왔다고 한 것 같기도 한데…….
은유와 다현이 놀란 사이, 윤주가 씩 웃으며 두 남자를 가리켰다.
“둘 다 인기 장난 아니었죠.”
의미심장한 윤주의 말에 다현은 더 해보라며 그녀를 부추겼다.
은유 또한 자신이 몰랐던 남편의 대학 생활을 들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저 입학했을 때 이선생님은 군대에 있었고, 강선생님은 제대 하고 나서였는데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수학과에 미친 남자 한 명 있다는 소문이 우리학교뿐만이 아니라 옆 학교에까지 퍼져서.”
“강낙원 인기는 장난 아니었지. 입학식 때부터 빛이 났지 아주. 여자 선배들은 다 눈도장 찍어놓고, 각 학과에 미모 탑인 여자애들이 맨날 와서 고백하고. 밥 먹자고 하고.”
분명 풋풋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쁜 은유를 알 리가 없는 은혁과 윤주는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진짜 유명한 일화 있잖아요. 무용과 탑이었던 선배가 한 3개월인가 맨날 강선생님한테 와서 밥 먹자고 하고, 커피 마시자고 하고, 고백하고 이러셨거든요? 근데 강선생님이 워낙 철벽이라 꿈쩍도 안 하니까 다 때려치우고 휴학했었어요. 엄청 촉망 받는 학생이었대요.”
“대박. 정선생도 아는 구나. 그래서 우리나라 무용계에 인재 하나를 잃었다고 그때 그랬잖아.”
어째 점점 더 기분이 나쁜데.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는 은유를 보던 낙원이 말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작은 얼굴에 찌푸려진 미간이 지금 그녀가 기분이 나쁘다는 사실을 아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었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이야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린 그는 앞에 앉은 두 남녀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옛 이야기로 떠드는 은혁과 윤주를 말리지 않았고, 술을 들이키는 아내를 말리지도 않았다.
“와. 강선생님 인기 진짜 장난 아니셨구나. 또? 또 다른 얘기는?”
“송선생님이 직접 봤어야 하는데. 화이트데이에는 사탕이 넘쳤고, 빼빼로데이에는 빼빼로가 넘쳤어요. 그 때뿐이면 얼마나 다행이게. 평소에도 막 맨날 수학과 들락날락 거리고, 같은 강의 들으려고 강선생님이 무슨 강의 듣는지 소문 쫙 나고.”
“완전 한국대 연예인이셨네 강선생님.”
“네! 연예인이었죠. 오죽하면 교수님들이 자기들 강의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시는 정도였다니까요?”
이제 다른 얘기 했으면 좋겠는데, 한 번 터진 은혁과 윤주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학과에는 맨날 ‘오빠’소리만 엄청 떠나가라 울렸잖아요. 강선생님한테 조금이라도 눈에 들려고 선배, 동기, 후배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앞에서 막 알짱거리고.”
오빠? 누구 남편보고 오빠야, 오빠는?
아니 뭐. 나이만 많으면 다 오빤가?
은유는 제 앞에 놓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벌써 세 잔째인데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원샷 스킬을 선보인 은유가 텅텅 빈 맥주잔을 내려놓았고, 이어진 은혁의 말에 ‘한잔 더’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여자애는 강선생 공부하는 도서실까지 쫓아가서 쟤 자는데 몰래 볼에 뽀뽀하다가 들켰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