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68화 (68/112)

68. 괜히 어른이 아니구나2016.11.29.

경기도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오리고기 전문식당 앞엔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작은 가게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그 안에 8개뿐인 테이블 중 제일 가운데 자리에 커다란 오리가 담긴 냄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은 두 남자는 서로의 잔에 맑은 술을 따랐다.

“요즘 많이 바쁘십니다 의원님.”

“하하. 이 정치라는 게, 늘 국민들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역시. 제가 이래서 의원님을 좋아합니다.”

“김사장님이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중년의 남자와 술잔을 부딪힌 중식은 오늘따라 유난히 단 술을 목으로 넘기며 털털하게 웃었다.

그런 중식을 보며 중년의 남자가 빈 술잔을 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의원님.”

“말하세요.”

“……요즘 그 일을 묻는 사람이 있다고 하네요?”

“그 일이요? 그 일이라면…….”

중년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일’이라는 말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걸쳐져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의원님께서도 많이 바쁘시고, 저도 제 일로 많이 바쁜데 이런 일이 생겨서야 되겠습니까.”

“그렇죠…….”

중식이 마주 앉은 중년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속을 알 수 없는 저 표정이 목에 메인 그의 넥타이를 더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 탈 없게 잘 처리하셨겠죠.”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사장님. 근데 대체 누가 그 일을 캔다는 겁니까?”

“노강재단에 강지혁 이사라고, 아십니까?”

“강지혁 이사라면……. 그 시퍼렇게 젊은 놈 아닙니까?”

“네. 그 시퍼렇게 젊은 놈이, 우리 목을 물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 걱정일랑 내려놓으시고 술 한잔 받으세요.”

중년의 남자의 술잔에 술을 따르는 중식의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강지혁 이사.

얼마 전 집을 나간 조카인 민지가 다니는 학교의 재단 이사장이다. 그 때 직접 만나기도 했었고.

제 사촌 형의 죽음을 이제 와서 갑자기 왜? 다 마무리가 된 게 언제인데.

갑자기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일이 터지면 늦는다. 시작도 전에 싹을 잘라버려야만 한다.

중식의 눈이 무겁게 빛났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멜버른 아발론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의 현재 시간은 오후 5시 50분이며 영상 35도입니다. 손님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비행기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 좌석에 앉아 좌석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 머리 위 선반을 열 때에는 안에 있는 물건이 떨어져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내리실 때에는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저희 제트항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13시간이 넘는 비행 끝에 흘러나온 착륙을 알리는 마지막 안내방송에 눈을 감고 있던 지혁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야근을 하고 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니 피곤한 게 당연했다. 그런데다가 멜버른은 직항도 없어서 시드니를 거쳐 경유를 하고, 기내 안에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보느라 잠깐 눈을 붙인 게 전부였으니 얼굴이 까칠한 것도 당연한 거였다.

김비서와 함께 입국심사를 마치고 빠르게 공항을 나온 지혁은 호텔로 향했다.

스위트룸으로 들어와 짐을 푸르고 샤워를 마친 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미니 바에 마련된 와인을 꺼내 잔에 따라 향을 음미했다.

달콤쌉싸름한 와인을 넘기고 잔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캐주얼한 옷을 꺼내 입고는 호텔을 나섰다.

영국에서 알던 친구들이 호주로 넘어오면서 몇 번 와봤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도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시티 자체도 복잡하지 않아서 길을 헤맬 일은 없었다.

멜버른의 명소인 야라 강을 따라 걷던 그가 멈춘 곳은 한 아파트였다. 그 앞에 멈춰선 지혁은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로 들어가 익숙한 이름을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어디냐?”

“[저요? 저 호주죠?]”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어디’냐고.”

“[저 어학원 끝나고 친구들이랑 바닷가 다녀왔어요. 트램 타고 이제 들어가는 길이에요. 왜요?]”

“시티 도착하면 전화해.”

“[네?]”

“나 멜버른이야. 플린더스 역 앞에서 기다릴 테니까 와서 연락해.”

그리고 정확히 20분 후.

트램에서 내리면서도 의구심을 가졌던 민지는 멜버른 사람들이 애용하는 플린더스 기차역 앞으로 다가가다 익숙한 형체를 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이사장님!”

“시간이 몇 신데 지금까지 놀다 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잔소리를 하는 남자는 정말로 지혁이었다.

“아직 9시 안 됐어요!”

“9시 10분 전이야. 겁도 없이 막 돌아다닌다?”

“아니 근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볼 일이 있어서. 저녁 먹었어?”

“아뇨, 아직이요.”

“아직 밥도 안 먹었어?”

“놀다 보니까 조금 늦어졌어요. 식사하셨어요?”

“밥 먹으러 가자.”

자리를 옮겨 지혁이 민지를 데리고 향한 곳은 야라 강이 한눈에 보이는 사우스 게이트 몰 내에 있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간단한 샐러드와 캥거루 스테이크를 주문한 지혁을 민지는 여전히 놀라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와. 진짜 신기해요!”

“뭐가?”

“이사장님이 여기 있는 거요! 저 전화 받고서도 못 믿었는데!”

“속고만 살았어? 그나저나 얼굴 좋아 보이네.”

지혁의 말에 민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주로 어학연수를 온 지 이제 2주정도가 되어가는데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여긴 사람들도 너무 여유롭고,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어요. 저 이렇게 좋은 경험하게 해주셔서 진짜 감사해요.”

“알면 공부 열심히 해. 친구들이랑도 놀러 많이 다니고. 그래도 9시 넘기는 건 안돼.”

“생각보다 별로 안 위험한 것 같은데요?”

그렇게 이야기하며 에피타이저로 나온 빵을 베어 물던 민지는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지혁의 시선에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낙원과 은유가 무조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지혁은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딱 자르는 면이 있었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참 달랐다.

“너 앞으로 9시마다 꼬박꼬박 나한테 전화해.”

“네에? 제가 무슨 애에요?”

“나한테는 아직 애야. 이러는 거 강낙원이랑 형수님이 알면 계속 여기 못 있을 텐데?”

“지금 저 협박하시는 거에요?”

“어. 그러니까 말 들어. 너 안 위험하게 하겠다고 큰소리 쳤는데 너 이러고 다니는 거 두 사람이 알아봐. 너나 나나 좋을 거 없다?”

지혁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민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 하는 사이 웨이터가 다가와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각자의 앞에 놓아주었고, 지혁은 민지의 접시를 제 앞으로 가져가 대신 썰어주었다.

“와. 이사장님 되게 매너 있으시네요.”

“내가 좀. 먹어.”

“저 와인도 마시면 안될까요?”

“안돼.”

“……저도 성인이에요! 이제 스무 살인데요?”

이게 세상 보는 눈을 넓히랬더니 호주 와서 쓸데없는 눈만 넓혀가지고.

민지를 째려보던 지혁은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잔 하나를 더 추가했고 그녀의 잔에 도수가 낮은 달달한 화이트와인을 따라주며 신신당부했다.

“너 술 마시는 것도 안돼.”

“저 스무 살이라니까요?”

“그래서 안돼. 아직 술도 제대로 안 배웠으면서. 오늘만 마시고, 나중에 한국 오면 강낙원이랑 형수님한테 배워. 그리고 마셔.”

“……네에.”

“오늘도 딱 한잔만이야.”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뭐 이렇게 안 되는 게 많아?

속으로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낙원과 은유보다 지혁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두 사람이 불편하다기보다는 지혁이 더 쉬웠다.

낙원과 은유는 자신이 힘들어하는 걸 옆에서 다 지켜봤기 때문에 뭐든지 다 자신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떼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지혁은 조금 달랐다. 낙원과 은유가 저를 대할 때 짠해하는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지혁은 그보다 손 많이 가는 여동생쯤으로 대해주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말도 편하게 하고 땡깡도 부리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맛있어?”

“네! 저 캥거루는 처음 먹어보는데, 생각보다 되게 맛있네요?”

‘캥거루’하면 귀여운 동물이 생각이 나서 인상부터 찌푸려졌는데, 막상 먹어보니 부드럽고 쫄깃한 게 평소 먹던 다른 고기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스테이크 옆에 같이 나온 으깬 감자와 구운 버섯도 같이 곁들여 먹으니 굉장히 맛있었다.

잘 먹는 민지를 보며 지혁이 제 접시에 있던 덩어리까지 그녀에게 덜어주었다.

“어? 저 괜찮아요!”

“나 있을 때 비싼 거 많이 먹어라.”

“넵. 그럼 한국에는 언제 다시 가세요?”

“아직 몰라. 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왜, 나 빨리 갔으면 좋겠냐?”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요. 선생님들은 잘 지내세요?”

“어. 매일 전화통화 한다며.”

“네. 그래도 많이 보고 싶어서요…….”

두 사람 이야기가 나오니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게 안쓰럽게 느껴졌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제법 살도 올랐고 표정도 밝아 보여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했는데, 자신이 착각한 모양이다.

가족들이 가장 그리울 나이고, 사랑을 듬뿍 받아도 모자랄 시기인데.

이곳에 있는 게 좋은 것과는 별개로 두 사람을 제 부모님처럼 생각하는 민지로써는 외로움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가서 실컷 봐. 형수님 요즘 네 방 꾸민다고 바쁘시던데.”

“네? 제 방이요?”

“어. 너 없을 때 인테리어 다시 해주겠대.”

“어쩐지! 요즘 자꾸 무슨 색 좋아하는지, 어떤 방 가지고 싶은지 물어보시는 거에요! 진짜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저를 위해 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에 또 미안한 감정이 얼굴로 떠오른 민지를 보며 지혁이 작게 웃었다.

“뭐 그렇게 죽을상을 해. 두 사람이 좋아서 하는 일이야. 내버려 둬.”

“그래도요……. 전 자꾸 받기만 해서요…….”

“두 사람이 너 생각하면서 준비하는 그 과정들이 그 사람들한텐 다 행복한 일이야. 그 행복함은 네가 주는 거나 마찬가지고.”

까칠했던 말투가 부드러운 말투로 변해있었다.

어학연수를 오기 전 이사장실에서 상담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지혁은 늘 제가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괜히 어른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넌 여기서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오면 돼. 알았어?”

“네. 꼭 그럴게요.”

“그래. 이래야 말 잘 듣는 딸이지.”

거하게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긴 야라 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멜버른은 한국과는 정반대의 계절을 가지고 있고 특히 여름이면 살인적인 더위로 유명했기에 밤에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강을 따라 잘 걷던 민지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지혁이 의아한 얼굴로 그 시선을 따라 옮기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저거 먹고 싶어?”

“네?”

“눈을 못 떼네 아주.”

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지어 서있는 곳에는 다채로운 색깔로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젤라또가 있었다. 쫀득한 식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날도 덥다 보니 그 인기는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뭐 먹고 싶은데?”

그 많은 인파에 지혁과 민지도 동참했다.

지혁은 단 음식이라면 딱 질색이었지만 먹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을 한 민지를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맛 중에 민지는 망고를 가리키며 눈을 반짝였다.

민지는 점원에게 주문하는 지혁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식당에서도 그렇고, 영어 발음이 장난이 아니다.

하긴, 젊은 나이에 이사장씩이나 되는 사람인데 이 정도도 못할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직접 눈으로 보니 더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이사장님도 유학 하셨어요?”

“난 원래부터 잘했어.”

참 뻔뻔하고 재수없게 느껴지지만 이것도 지혁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말이 없고 낯을 가리는 낙원과 달리 지혁은 능글맞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처음 그가 학교에 왔을 때 여학생들이 외모에 한 번 반하고, 그 성격에 한번 더 반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자신의 눈에는 그저 아빠의 철없는 사촌쯤으로 보이지만.

“먹어.”

“우와. 잘 먹겠습니다!”

겨우 젤라또 하나에 세상 전부를 가진 것처럼 행복해하는 모습이 은유와 꽤 많이 닮아 있었다.

그 엄마에 그 딸 아니랄까 봐, 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티슈를 챙겼다.

“흘리지 말고 먹어라.”

“네. 이사장님은 안 드세요?”

“난 단 거 싫어해.”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그니까 너 많이 먹어.”

그 뒤로 ‘입맛도 딱 애다’라고 덧붙인 지혁의 말을 듣지 못한 민지는 잔뜩 부푼 얼굴로 젤라또를 한 입 베어 물고는 황홀함에 몸서리쳤다.

타지에서 혼자 힘들어할까 봐 신경이 쓰여 밥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전화를 했는데 잘한 것 같다.

낙원과 은유에게는 제법 강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막상 보내놓고 나니 자신도 걱정이 되었는데 이렇게 잘 먹고 잘 웃는 걸 보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제 정말로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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